165. 두 번째 초야
(165/210)
165. 두 번째 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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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두 번째 초야
2023.03.30.
털썩.
아서는 순식간에 레이나를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그의 손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벌어진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 같았다.
울고 있던 레이나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채 이해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눕혀진 채 그를 올려다보는 사이, 아서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비로운 눈에 숨이 막혔다.
그의 눈 안에는 하얀 번개가 결정이 되어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열정이라곤 모르는 듯 냉정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새하얀 불꽃 같은 석영.
레이나는 꼼짝없이 그 안에 갇힌 듯했다.
침착. 정적. 이지. 안정과 균형.
무한한 견고함.
그를 묘사하는 활자 속 말들이 어울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채색.
채도라곤 없는 회색 눈이 새하얗게 쏟아지는 뇌우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날것의 욕심.
“…….”
숨이 가빠지며 목 안에서부터 열기가 치밀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목과 어깨까지 붉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레이나는 당혹감에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얼마나 당황한 것으로 보일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피하고 싶어졌다.
이 사람을 좋아한다.
회색빛 종이 위에 박힌 우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타는 듯이 바라보는 이 눈을.
“……!”
바스락.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잠, 잠깐, 잠깐만요. 아서.”
레이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금방 눈치챘다.
내내 억눌렀던 것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러내지 못한 아픔, 참았던 고통,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양 짓밟았던 욕심.
그 모든 것이 견고한 이성의 절제를 뛰어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레이나는 당황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서!”
그를 밀어내는 손이 떨렸다.
하지만 거부하는 손에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는 자신에게조차 거부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밀려나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손등이 침대 위에 짓눌렸다.
“……!”
당황해 올려다보자 시선이 교차했다.
레이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신, 아프, 아프잖아요. 이러지 마요. 당신 아프게 하기 싫…….”
그의 입술이 콧등 위에 비스듬히 누르듯 내려앉았다.
“……!”
레이나는 하던 말을 잃고 숨을 멈추었다.
입술조차 아닌 곳에 안타깝게 내려앉은, 좋아하는 사람의 입맞춤에 심장이 떨어지며 숨이 턱 막혔다.
어떡해.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자, 잠깐만…….”
목소리에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새된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잠깐만요…….”
언제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입혀주던 손에 옷이 벗겨지고 있었지만,
의지를 벗어난 몸은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에도, 몸에도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아니었다.
환희로 몸이 떨렸다.
제 마음을 모조리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아서. 제발…….”
레이나는 거의 흐느끼듯 속삭이며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했다.
난.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
당신에게 안기고 나면 욕심내지 않을 자신이 없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오 년 전과는 다르단 말이야.
난 결국 당신을 떠나보내야 하는데.
「원하지 않으면 안 해.」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 사람인 걸 안다.
자신이 원치 않으면 그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레이나는 울면서 눈을 감았다.
……또 나만 상처 입지 않기 위해 그를 밀어내려고?
그가 자신에게 애틋한 걸 안다.
그는 내게 묶여 있었다.
내 이기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감히 당신의 신부인 척 당신의 결혼을 기만하고.
후작 부인의 앞에서, 그리고 테일러의 앞에서 당신을 배신하는 말을 몇 번이나 당신의 귀로 듣게 만들었고.
몇 번이고 상처 주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자신이 오만했다며, 당신만 고민하면 날 곁에 둘 수 있는 줄 알았다며 사과하고 웃었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도 나를 보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질끈 감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에게는 그저 대가를 받고 나갔던 자리였어도, 오 년 동안 나를 생각한 그에게는 내가 신부였던 걸 안다.
나를 감싸다 만신창이가 되고서도 내 앞에서는 아프지 않은 척하고, 지켜 주고, 웃어 주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플 때에야 간신히 나를 찾는 사람이었다.
그의 팔이 등 뒤로 들어와 레이나의 몸을 제게 천천히 밀착시켰다.
아.
그와 몸을 맞댄 것만으로 온몸에 저릿한 전율과 열기가 퍼져나갔다.
온몸의 감각이 그를 향해 깨어났다.
레이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한 번쯤 당신을 온전히 욕심내 보고 싶은 마음이 나라고 왜 없었을까.
이렇게 좋아하는데.
레이나는 그의 목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기어이 그를 끌어안았다.
제발 이 시간이 나에게만 새겨지길.
당신에게는 상처로 남지 않길.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둘 사이에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일을 잊고 매달렸다.
* * *
레이나는 그와의 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밤은 오 년 전의 밤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정중하지도 않았고, 침착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다급했고, 거칠었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그녀를 안았다.
마치 이런 모든 일이 처음인 것처럼 조급했다.
그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뜨거웠고 사랑스러웠다.
레이나는 몇 번이고 그의 품 안에서 절정에 올랐다.
* * *
오 년 전 아서와의 밤은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레이나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멋지고 좋은 사람이었고, 아주 정중하게 배려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 보는 남자와의 원치 않는 초야가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레이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로를 원하는 밤이라는 것은, 그저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며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그런 밤과 전혀 달랐다.
레이나는 태어나서 처음 그런 기분을 느꼈다.
온전히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
그리고 온전히 누군가를 사로잡고 있다는 느낌.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가슴 아프게 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다시 이런 충만한 느낌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의 것이고, 나는 그의 것이었다.
레이나는 자신이 이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을 알았다.
* * *
겨울 해는 조금 늦게 떴다.
뽀얀 조각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에 발을 들이고 눈치를 보듯 서성였다.
파도 소리와 바닷새 소리가 작게 창을 두드렸다.
레이나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의 품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잠들어 있었다.
레이나를 안고 잠들어 있는 그의 숨소리가 평안했다.
낯설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러웠다.
“…….”
그리고 몸이 깨 부서질 것같이 아팠다.
그는 환자였다.
치료를 위해서였다지만, 등을 칼로 헤집은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리하게 움직이고도 괜찮은 건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레이나는 많이 힘들었다.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상처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힘들기도 했고 이불 속이 따뜻해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이나는 그래서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도 않았고, 안색이 창백하지도 않았다.
체온은 안온하게 따스했다.
안정되어 보였다.
“…….”
그의 표정이 평안하다.
그것은 레이나에게 낯선 위안을 주었다.
자신이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줄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 같았다.
“…….”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욕심이 나더라도.
인정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오랫동안 침대에 있고 싶었지만, 레이나는 햇살을 가늠한 뒤 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이 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레이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숨을 흡 들이켰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으. 으…….’
레이나는 간신히 앓는 소리를 내지 않고 참았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레이나는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할 순 없었다.
레이나는 옷을 입은 뒤, 슬리퍼를 신고 살금살금 문을 열고 나갔다.
* * *
아서는 홀로 눈을 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정의 나무 무늬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에서 말고는 저런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인 상태였다.
“…….”
다음 순간 침대를 손으로 짚고 일어선 그는 모든 것이 꿈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밤에 자신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
당황한 아서는 두통을 느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눈 아래까지 쓸어내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시력이 돌아왔다.
간밤에 절개한 상처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나가 곁에 없었다.
“……!”
아서는 반사적으로 레이나를 찾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디, 당신, 어디에…….
아서는 안색이 변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레이나는 여관의 아래층, 부엌에서 불을 때었다.
여관의 부엌은 낯설었지만 불을 붙이기가 쉽고 물을 끓이기 편하게 되어 있어 그럭저럭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과 얼굴을 닦고, 물그릇에 물수건을 담가 일어서려던 레이나는 다소 거친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서가 숨을 몰아쉬며 부엌 입구에 손을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기색이었다.
레이나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서?”
레이나는 한눈에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손에 든 걸 팽개치고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왜 그래요? 아까, 아까는 괜찮아 보였는데. 어디 안 좋아요?”
“…….”
아서는 환상을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제게 다가온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상처를 더듬더듬 살피려고 했다.
“아파요? 돌아서 봐요. 좀 볼게요. 보여 주세요.”
“…….”
아서는 몸을 조금 숙인 채 레이나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뭔가 이상해서 레이나는 멈칫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아서? 왜…….”
그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실감이 나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레이나의 눈가를, 뺨을, 조심스럽게 엄지로 덧그렸다.
“…….”
타닥.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조용히 부엌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