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 행보 (162/210)


#162. 행보
2023.03.19.


카일 황태자와 최정예기사들이 반 종전 세력의 자객들을 섬멸하고 아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서에 대해선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긴박하게 보도되었지만, 상대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위험 세력이니만큼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아서를 사랑하는 민중들은 조마조마해 하며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카일 황태자가 제발 아서를 무사히 구해 내길!

신문마다 두 사람의 우애와 카일 황태자의 활약이 널리 보도되었다.

둘이 함께한 전쟁에 대한 보도, 그동안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카일 황태자의 훌륭한 전투 이력.

별것도 아닌 전쟁의 수치적 기록들과 황태자의 사소한 발언까지 모두 끌어올려져, 카일이 아서를 아끼며 훌륭하게 뒷받침해 주었던 증거처럼 재조명되었다.

사람들이 지레짐작했던 것과 달리 이복형제의 사이는 전혀 미묘하지 않으며, 전장에서도 아서의 부하들 모두가 카일을 좋아했다는 평판과 증언들이 뒤따랐다.

온갖 신문들이 흥분과 설레발로 황태자가 아서를 구할 거라며 난리통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카일이 아서를 구해 내지 못하면 재기 불능의 후폭풍이 불 것 같았다.

* * *

돌아가는 분위기에 마리아 황후마저 당황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카일이 이렇게까지 해 버릴 줄은 몰랐는데…….”

솜씨가 좋네.

황태자 카일이 확실히 자신을 ‘다루고’ 있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훌륭하게 성장해 자신에게 맞서고 있는 아들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리아 황후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일 황태자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야.

이렇게까지 멋진 그림을 그려 왔는데 어미가 어찌 반대할까?


“아서를 못 구하면 큰일 나겠네요. 확실하게 구해요.”

“네.”

마리아 황후는 흡족해하며 미소 지었다.

많이 컸구나.

* * *

아서는 카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안 구해 줘, 이 자식아.

남자 마음도 모르고 춥다면서 순진무구하게 들러붙는 레이나와 강제로 종일 붙어 있으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추위가 아니라 다른 게 문제라는 걸 왜 이 여자는 모르는가.

침착하고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온 심력을 다 쓰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마음속 원망의 화살이 카일에게로 향했다.

너 때문에 나는 좋아하는데 좋아하면 안 되는 여자랑 오붓하게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겠는데.

아군에게도 발각되면 안 되는 입장이 되어서 꼼짝도 못하고 품에서 꼬물거리는 여자를 안고 있자니 정말이지 뛰어내리고 싶었다.

왜 안 오는 거야.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오러 때문에, 같이 있으라고?

설마 칼바람 부는 해안 절벽에 처박혀 며칠 동안 부둥켜안고 있다가 너희에게 구출되라는 건 아니지?

그리고 아서와 레이나는 동굴에서 마지막 보급과 함께 황태자의 지령을 받았다.

보급품이 떨어진 곳으로 뛰어나간 레이나가 바구니를 열어보다 그를 돌아보고 작게 소리쳤다.


“여기 뭐가 적혀 있어요!”

“…….”

레이나가 급하게 쪽지를 펴서 읽었다.


“라이언 달튼 보아라. 12월 23일부터 부둣가 외곽 흰고래 여관 일주일 동안 통째로 빌려 놓음. 구출 예정은 25일에서 27일 사이. 가서 기다려……라…….”

“…….”

“…….”

아서는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러니까 도피는 셀프인 거야?

더럽게 친절하네?

* *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태도가 바뀌었다.

기사들에게 간섭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안주인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녀는 아서가 실종된 이후 묘한 태도로 ‘아내’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기 시작했다.

여전히 귀족적이고 도도하며 줄리어스의 레이디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아서의 실종에 세기의 신부인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마땅히 보여야 할 근심하고 염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사제이기도 한 아그네스가 주관하는 아서와 관련된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아서의 실종과 수색에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그것을 빠르게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크리스티나의 이상한 행보를 알아챈 후작 대부인, 패트리시아 줄리어스가 그녀를 불러들였다.

* * *



“…….”

패트리시아 줄리어스로서는 한평생 숨겨온 비밀이었다.

50여 년 세월을 걸쳐 지켜낸 자신의 자존심과도 연관이 있는 문제였다.

크리스티나가 먼저 찾아올 줄 알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러지 않았고, 패트리시아 쪽에서 손녀를 마주할 용기는 조금 늦게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행보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진작 알려 주지 않았냐고 할머니인 그녀를 찾아와 따지지도 않았다.

다만 올가에게 조용히 ‘로렌슨 선생을 수도의 줄리어스 저택으로 불러들이고, 혹시라도 레이나에게 손대고 있었다면 중단해라.’라며 마틸다를 향한 말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아서와 관련된 예배에 참석하길 중단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설마 겸허하게 부족함을 알고 아서의 아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것도 아닐 텐데?

이오나에서 릴리, 레이나로 이어진 가문의 끈질긴 악연에 대해 알게 됐다면, 지금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자리에 위기감을 느끼고 정치적인 방어를 준비하고 있거나, 최소한 자신을 찾아와 상의하고 적극적으로 숨기고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크리스티나의 행보는 패트리시아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귀부인의 평판은 사실상 성공적인 혼인과 사교 능력, 가문 경영 능력에 달려 있었다.

패트리시아는 그것을 자신의 평생에 걸쳐 체득했다.

자존심 상하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숨기는 것이 좋을 일도 있었다.

이미 한 번 평판을 망쳐 보았고, 재기에 성공해 보기도 했고, 오래도록 평판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확신이었다.

패트리시아는 혹시 크리스티나가 크게 충격을 받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후회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가 신경 쓰였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 역시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부름을 받고 패트리시아를 찾아온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이제야 찾아주시네요. 할머니.”

패트리시아는 소파에 기댄 채 말끄러미 크리스티나를 보다가 피우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이니?”

“…….”

“난 네가 똑똑한 애인 줄 알았는데.”

크리스티나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

손녀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패트리시아가 말을 내뱉었다.


“그래. 네가 이오나에 대해 알았다는 것, 들었다. 미안하게 됐구나.”

“…….”

조금 찔리긴 했다.

당장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게 된 손녀와 아들 부부의 입장에선 화를 낸대도 할 수 없었으니까.

패트리시아에게는 그들을 처리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이오나가 릴리의 무덤 앞에 주저앉아 있던 말던 알 바 아니라고 끌어냈으면 됐다.

어둠의 방법으로 처리하든, 어디로 멀리 쫓아내라 하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패트리시아는 올가를 붙들고 울었던 그 날의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깟 남자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괴물이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피가 나도록 울었던 그 날로.

지금도 딱히 후회는 되지 않았다.

말은 해 줬어야 하지 않냐며 화를 낸다면 좀 미안하겠지만…….


“…….”

울컥 열받기도 했다.

뭘 잘했다고 저들이 날 원망해?

죄 없는 하녀 애를 돈과 권력으로 찍어 눌러 휘둘러댔으니 지 죗값 받는 거지.

나도 죗값 받는 거고.

그리고 안토니오나 마틸다에게 말해 줬으면 아마 살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애들에게 말해 주느니 내 손으로 안전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았겠지.

그래도 패트리시아는 가만히 서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줄리어스는 평생 지켜온 그녀의 이름이었다.

부모된 도리로 자신이 일조한 씨앗만큼은 돌볼 생각이었고, 일단 크리스티나의 말을 들어봐야 했다.


“네가 아그네스 님의 미사에 안 나가고 있다고 들었다. 아서하고 어쩔 생각인 거니?”

크리스티나는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뭐……. 가야 될까요? 분위기 보니 아서 경은 무사히 돌아올 것 같은데. 이미 소재도 파악하고 있을 것 같고요.”

“…….”

패트리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자존심 싸움이 되고 있는 건가?


“아서랑 안 좋다고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라는 건, 들었을 테니 너도 알 거 아니니.”

“괜찮아요. 일단 파혼할 생각이니까요.”

패트리시아가 멍하니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방에 침묵이 흘렀다.

점점 패트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뭐? 파혼?”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계약서상 제가 파혼할 순 없어요. 아서 경이 6개월 이상 참전해서 ‘줄리어스’에게 파혼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원한다면 파혼해 줄 테니, 파혼하라고 아서 경에게 말했어요. 아직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지만, 조만간 소식이 오겠죠.”

“……!”

크리스티나는 태연하게 계속 말했다.


“그리고 레이나를 아버지 호적 밑으로 넣어 주는 대가로 몇 가지를 요구할 생각이에요. ‘저희’를 줄리어스에서 밀어낼 수 없다는 걸 포함해서요. 양쪽 모두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니 아마 받아들일 거예요.”

패트리시아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도 네 건 지켜야지! 가문을 통째로 들어다 남한테 줘 버릴 생각이니?! 그 애가 그렇게 들어오면 가문의 다음 세대에 너희 피는 없어! 아서는 이미 너와의 혼인에 관계없이 줄리어스의 후계자야!”

“네. 잘 알아요. 아버지가 그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이 가문에 제 권리는 하나도 없다는 거요.”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그래서 레이나랑 자매 같은 사이가 되어 보려고요.”

 

 


“……!”

이게 무슨 소리야.

패트리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크리스티나가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레이나랑 자매가 되기로 해서 죄송해요. 할머니는 싫으실 텐데. 그게 죄송해서 그동안 못 찾아왔어요. 그래도 이해해 주실 거죠?”

“…….”

“가문을 버리고 떠나셨으니까, 미래는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맡기겠다는 거. 할머니의 말씀이셨잖아요.”

“크리스티나. 아니, 무슨 말이니, 그게?”

“지켜보세요.”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아서 경은 처음엔 레이나를 택하게 되겠지만, 저한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패트리시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크리스티나, 결혼은 그렇게 맘대로 떼었다 붙였다가 되는 게 아니다! 일단 한 번 부부가 되고 나면 뜻대로 되지 않아! 심지어 자매가 되겠다니?”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평이하게 말했다.


“아. 가문의 피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짧으면 몇 달, 길어도 몇 년 안에 정리될 테니까.”

패트리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아서 경은 ‘줄리어스’를 갖기 위해선 저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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