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 오러에 관하여 (161/210)


#161. 오러에 관하여
2023.03.16.


레이나가 무릎걸음으로 움직이려다 말고 멈추었다.


“……하지 마. 필요 없어. 내가 뭘 해야 한다고 하면 다 해 줄 셈이야?”

아서의 귀 끝이 붉어지고 있었다.


“…….”

아서가 이렇게까지 거부할 줄 몰라서 레이나는 일단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아서가 당황스러워하자 갑자기 자신까지 창피해졌다.


“가까이 오지 마. 뒤로.”

“…….”

“그런 걸로 해결되지 않아.”

레이나는 민망해졌다.

그냥 모포를 같이 덮으려는 거였는데.

당신도 춥다고 기대도 되냐고 부탁했었으면서…….

난 해 줬는데…….


“…….”

아닌가? 모포를 같이 덮는 건 또 다른가?

나 지금 파렴치한가?


“그럼…… 어떻게 하면 해결되는 건데요?”

“…….”

아서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다시 거짓말을 하려다가.


“…….”

더 이상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그건, 나도 몰라.”

“……모른다구요?”

“그래. 황실에서도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겠지만 밝혀진 게 없어. 대놓고 연구할 수도 없는 문제라 선황제가 남긴 기록과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고.”

“…….”

“그리고 황실이 그 문제를 해결했으면 카일도 오러를 쓸 수 있었을 거야. 오러를 나만 익힌 건 오러가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

“일단…… 조금 떨어져. 다 말해 줄 테니까.”

“……네…….”

레이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옮겼다.


“…….”

레이나가 다시 물었다.


“저…… 모포를 같이 덮자고 말씀드리려고 한 거였는데 혹시…….”

아서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 어깨에 걸친 모포를 건네주었다.


“써.”

“……그럼 아서 경은 춥잖아요.”

“난 더워.”

휑.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칼바람에 둘 다 마구 머리카락이 날렸다.

더울 리가.


“같이 덮는 게 따뜻할 텐데…….”

“…….”

아서는 결국 난처한 얼굴로 외면하면서 어렵사리 팔을 열어 레이나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

레이나가 민망함을 참고 꿋꿋이 그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살그머니 그의 팔 아래 들어갔다.


“…….”

“…….”

침묵이 흘렀다.


“…….”

“…….”

“저기…… 말씀해 주신다는 건…….”

“……아아.”

아서는 정신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서가 불편한 듯이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비밀로. 특히 카일이나 황실에는 당신이 아는 건 없는 걸로 해야 해.”

“네.”

“…….”

아서는 그녀에게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줄리어스 저택에 있을 때, 내 이야기……. 당신한테 처음 해 줬던 날.”

아서가 말을 골랐다.


“그날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내가 ‘눈동자 색’ 같은 것보다 확실한 황통의 증거를 물려받았다는 말.”

“…….”

레이나는 잔잔한 깨달음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오러였군요.”

“맞아.”

아서가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오러는 공간 자체를 감지할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야. 오러를 쓰면 난 그곳의 공기나 온도를 느낄 수 있고, 숨어 있는 사람이나 숨겨진 물건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보통은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

레이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후작 부인에게 불려갔던 날. 내 약점을 알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었지.”

“…….”

레이나가 순간 멈칫했다.


“대가로 테일러 로렌슨을 당신 쪽에 보내주겠다는 소리를 들었고.”

“…….”

아서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걸 난 우리가 머물던 신방에 그대로 앉아서 들을 수 있었어.”

“…….”

아서는 탓하려는 듯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레이나가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든 거였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자신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와 닿기 쉽게 설명한 것이었다.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보다 멀리도 가능해. 전쟁에서 유용했지. 플람베르 평원 전투에서도, 포로로 잡혔던 카일을 구출한 전투에서도, 마지막 전투에서도.”

 

 


“…….”

아서가 짧게 침묵하다 덧붙였다.


“가끔 당신을 찾을 때도.”

“…….”

레이나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서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쓰기 어렵게 됐어. 예민한 감각에 의존하는 거라 그런지 무리하게 사용하면 몸에도 조금씩 영향을 미쳐서. 심각한 건 아니고, 한동안 감각이 무뎌지는 정도인데 그것도 쉬면 괜찮아져.”

아서는 거기에만 조금의 거짓말을 보탰다.

그것으로 자신이 레이나를 붙잡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도록.


“카일도 뭔가 해결할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니까.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레이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서도 그녀가 침묵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레이나?”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

하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서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왜?”

“…….”

레이나는 참지 못하고 터지듯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그때, 당신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물어봤던 건.”

“…….”

“그런 뜻으로 여쭤본 게 아니었어요. 그런 명령을 받고, 후작 부인에게 고해바치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레이나가 꾹 입술을 물고 말했다.


“……그것까지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아서는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레이나가 자신이 그 말을 들었던 그때의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아서가 웃었다.


“알아.”

“…….”

“당신이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나한테 해 끼치지 않으려고 애쓴 거 알아.”

“…….”

“그래서 좋았어.”

당신으로선 날 좋아할 수 없었을 상황이었는데도.


“고맙게 생각해.”

 

* * *



“후작 부인.”

“황후 폐하.”

마틸다가 황송한 태도로 무릎을 깊이 굽혀 알현실의 상석에 앉은 황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일어서세요.”

“예.”

마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서가 실종되고, 후작은 황제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마틸다는 황후의 부름을 받아 그녀의 알현실로 왔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두려웠지만 마틸다는 일단 황후가 자신에게 온정적인 입장일 거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준 사람이기도 했고, 마리아 황후도 내심 아서 때문에 편치 않은 상황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의 황후였다.

마틸다도 살리아만은 모르는 일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황후가 줄리어스 가문으로서는 아서의 지배력이 지나치게 커지기 전에 해결을 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지만, 그건 살리아와 내통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테니까.


“…….”

다행히 마리아 황후가 먼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린 뒤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날 찾아오고 싶을 것 같아서 불렀어요. 마틸다, 당신이 먼저 찾아오긴 어려울 테니 내가 불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황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뭔가 오해도 있을 것 같은데.”

마틸다는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전…… 가문을 지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서가 잘못되어 버리길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살리아에 대해선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황후가 한숨을 쉬며 딱하다는 듯이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서가 잘못되길 바라지도 않았는데 해결사를 쓰고 암살을 의뢰했나요?”

마틸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덜컥했다.


“……네?”

마리아 황후가 어떻게 그걸?

마틸다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남편은 물론 마리아 황후에게도 당연히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마리아 황후는 지금 마틸다의 흉계를 알아채고 그녀를 비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그걸 어떻게…….”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딱하다는 듯이 마틸다를 내려다보았다.


“마틸다. 황실의 사람들과 관계된 일 중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요.”

“……!”

마틸다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황후의 정보력에 놀란 것만이 아니라, 마리아 황후가 아서를 ‘황실의 사람’이라 칭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마리아 황후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틸다를 가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틸다. 나는 그런 의미로 조언한 게 아니었어요. 가문에 두 지배자가 생길 테니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죠. 아서는 우리 제국의 영웅입니다. 아서는 제국에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에요. 당신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요.”

“……!”

마틸다는 황후의 입바른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황후는 분명 마틸다와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는 듯이 데릴사위를 들였던 다른 가문의 역사적 사례를 언급했었다.

마틸다를 걱정하며 그녀의 결단을 간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새 마틸다 혼자 경솔하게 아서를 해코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틸다는 차마 항의하지도 못하고 억울하고 두려워서 항변했다.


“아닙니다! 정말 전 그런 극단적인 걸 바란 게 아니었어요!”

황후가 눈을 찌푸리고 동정하듯 마틸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무엇을 바라서 그리했나요?”

마틸다는 왈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 개선식을 제 남편이 대신 나갈 수 있도록 아서가 조금 다치거나, 잠시 쉬어 주길 바란 것뿐이었습니다. 아서가 다친다면, 아서 경은 저희 줄리어스의 후계자니까, 제 남편과 크리스티나가 손을 잡고 대신 개선식을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해결사들은 그녀의 의뢰를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아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서 경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치게만 만듭니까?」


「차라리 죽이는 거면 모를까. 겨우 이 돈 받곤 그런 위험한 일 못 합니다.」

 
다급해진 마틸다는 아서가 설마 이런 놈들에게 죽진 않으리라 생각하고 그럼 알겠으니 일단 개선식 전에 어떻게든 해 보라며 일을 맡겼던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짐작한 듯, 마리아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과했군요.”

“…….”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아서 경과 카일 황태자, 그리고 장병들입니다. 줄리어스 일가는 전쟁을 치른 참전 용사들 덕분에 선제후의 자리를 얻었고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아서를 다치게 하고서 줄리어스 후작과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영광을 가져가겠다구요? 그건 옳은 일이 아니에요.”

“……!”

성서에라도 실릴 듯이 도덕적이고 바른 말이라 후작 부인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인망 높은 마리아 황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요주의 인물이라 여기며 경고했는데.

마틸다는 발밑이 아득해졌다.

마음속에서 반발감과 독기가 치밀어 오르기 직전, 마리아 황후가 손을 내밀었다.


“제국에 아서가 피습당해 실종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리아의 자객들까지 개입하며 일이 커졌으니 살리아 왕실도 왕족들에게 불똥이 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주목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

나를 잘라내려던 게 아니었어?

마리아 황후는 정말로 마틸다를 걱정하느라 골치가 아픈 듯이 보였다.

궁지에 몰린 마틸다의 마음에 희망이 비치자 순식간에 반발감이 사라지며 그녀는 마리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일단 아서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온 건 아니니까, 우린 무사하길 바라면서 카일 황태자가 아서를 구해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마리아 황후가 걱정스러운 듯 마틸다를 내려다보았다.


“더 위험한 일 하지 말고 자숙하며 기다리세요. 나도 방법을 찾아 볼게요. 당신이 해결사를 썼거나 살리아의 반 종전 세력과 연루되었다는 건…… 밝혀지면 덮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일단 철저하게 비밀로 해요.”

마틸다는 안심이 되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황후 폐하. 살리아는 정말 아닙니다! 해결사를 쓴 건 제가 경솔했어요.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서가 잘못되길 바란 건 아니었어요. 저희 가문으로서도 아서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잘못되면 좋을 게 없는데 제가 왜 그랬겠어요!”

마틸다는 다급하게 그들의 혼인 계약에 대해 설명했다.

아서가 ‘전쟁’으로 잘못된다면 혼인은 무효화 되기 때문에 아서의 개인 재산은 줄리어스가 아닌 황실이나 로아스에 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래서 줄리어스로서도 아서가 개선식 전에 살리아와의 전투로 실종된 것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는 것.


“…….”

황후는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수긍하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듣고 보니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저도 당신을 오해했을 수 있겠어요. 미안해요.”

“……!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마리아 황후가 위로하듯 눈썹을 꺾으며 미소 지었다.


“황제 폐하와 이야기해 볼게요. 하지만 당신이 아서를 상대로 해결사를 썼다는 건 큰 잘못이에요. 그들과 접촉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나도 어떻게 당신을 보호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볼게요.”

 

* * *

마틸다를 돌려보낸 후.

마리아 황후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편지를 보며 미소 지었다.

【 황후 폐하께. 】

카일이 보내온 편지였다.

마리아 황후는 이미 읽은 편지를 다시 보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아직 어리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많이 성장했구나.

당장 황제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황후 폐하.”

황후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돌아섰다.


“아서는 이제 건드리지 마세요. 대신 여자를 잡습니다.”

“여자 쪽 말씀이십니까?”

“응. ‘아서의 무사함’은 카일의 공이 될 테니 멋진 트로피로 남겨 두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줄리어스 가문’과 오러의 통제력은 쥐어 두는 게 좋겠죠. 오러의 범위는 알고 있죠? 아서가 알아챌 수 있는 범위에서 무리하지 말고, 여자의 주변인들을 통제 범위 안에 둬요.”

“알겠습니다.”

황후가 편지를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살리아도 잘 마무리해 줘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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