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 돌파구 (159/210)


#159. 돌파구
2023.03.09.



“여기가 마지막이야?”

“네.”

부둣가의 창고를 누비며 아서를 찾아 헤매는 황태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자객들을 빠르게 정리하며,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처음의 기대와 달리 아서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도 저택의 폭발과 자객들의 등장, 사라진 총사령관을 찾고 있는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대로 아서가 사라져 버리면…….

전쟁…….

전쟁은 안 된다.

그 전쟁을 어떻게 끝냈는데.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건 안 돼.

제발,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게 하지 마세요.

제가 어머니의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하지 마세요.

그들은 몇몇 자객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객들 중 하나는 자신들의 은신처로 부둣가의 창고 몇 곳을 자백했다.

카일은 만약 아서가 자객에게 붙잡혔다면 그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기사들 백여 명을 이끌고 자객이 자백한 창고들로 쳐들어갔다.

더 이상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 몸을 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서가 잡혔다면 목숨이 위험할 가능성이 높으니 한시가 급했다.

달려가며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함정이길 바랐다.

그 자객의 자백으로부터, 이들 자객 무리가 살리아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살리아의 자객은 자백하지 않는다.

반 종전 세력 같은 놈들이라면 더더욱.

그가 알아챘으니 케이 포드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혹은, 그의 어머니에게 충동질 당한 줄리어스가 이 습격에 배후로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러나 도착한 창고는 이미 몇 구의 시신만 남긴 채 비어 있었다.


“…….”

시신은 모두 사로잡힌 포로처럼 의자에 손과 발을 묶인 채 얼굴을 가리고 앉아서 죽어 있었다.


“…….”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포로로 잡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카일의 숨통을 조여왔다.

카일은 일부러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듯 성큼성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발 아서가 아니길 바라며 얼굴을 가린 시신들이 목까지 뒤집어쓴 검은 자루들을 하나하나 열어젖혔다.


“…….”

의연함을 가장했지만 세 명째에 손이 마비되며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말았다.

카일은 뒤틀리는 손을 일부러 세게 몇 번 털었다.


“…….”

이렇게 약할 수는 없었다.

카일은 황족으로서 몸값에 가치가 있었기에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지만, 몸값에 가치가 없는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포로로 묶여 있다가 카일 대신 죽었다.

딜런 오스본처럼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고 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고 멀쩡히 돌아온 내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황태자가 마비로 뒤틀리는 손을 힘주어 콱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억지로 쥐어지며 경련했다.


“…….”

황태자의 상태를 알아챈 케이가 정중하면서도 중립적인 어조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나머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황태자가 정색했다.


“아니, 내가 한다.”

혹시 내가 못 하겠다고 물러난 시신에서 아서가 발견되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카일은 기어이 자신의 손으로 모든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서는 없었다.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아서는 어디 있지?


“…….”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아 황태자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케이에게 내뱉었다.


“……자객이 자백하지 않은 곳도 다 조사해. 말하지 않은 곳이 있을 수 있어. 부둣가의 창고란 창고는 전부…….”

케이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네. 루칸 경과 리오넬 경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줄리어스 후작 대부인을 통해 이곳의 지리와 근거지가 될 만한 곳을 확인했고, 하녀들에게 안내 부탁하여 전수 조사하고 있습니다. 부둣가에 존재하는 모든 창고와 건물을 수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카일 황태자는 침착해지려 애썼다.

다음 순간 케이에게서 묻지 않은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해안 절벽 쪽에 몸을 숨기고 계실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고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쪽엔 트리스탄 경과 볼튼 경이 수색대와 함께 자객들 정리하며 찾고 있습니다.”

카일은 자신이 냉정하지 못함을 깨닫고 심호흡했다.

아서의 가장 유능한 참모, 케이 포드는 아서가 죽거나 붙잡히지 않고 그쪽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환기시켜 준 것이었다.

아서는 무사해.

무사할 거다.

카일이 아서에게 느끼는 감정에는 고마움과 미안함, 전우애와 형제애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적인 양심에서 온 고통과 간절함이 있었다.

카일은 진심으로 아서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았다.

아서가 나를 구한 대가로 이런 부당한 위협을 받을 순 없는 거였다.

내가 더 냉정하고 단호하게 어머니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아서는 결코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녀석이 아니라고.

그는 내 형제이며 함께 피를 흘린 전우라고.

난 이런 식으로 형제와 전우를 배신하고 황제가 될 생각은 없다고.

어머니가 이러시면 나는 황제가 되는 걸 포기하겠다고.

카일은 반쯤 정신이 빠진 채였지만 몸은 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화재가 났고, 안에서 시신이 몇 구 발견되었다는 창고로 말을 달리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카일은 끝없이 어머니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를 막을 수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린애처럼 공허한 말로 황제 따위 안 되겠다고 어머니의 자비를 조르는 것뿐인가?

그러나 쉽게 황후 마리아가 이기는 결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 어머니는 황제가 되어야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저울의 반대편에 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카일이 슬프고 두려운 것은, 그런 어머니임에도 카일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아서를 구할 수 있지?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서를 구할 수 없나?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이렇게 후회하느니 어머니를 포기하게 되더라도 무엇이든 할 셈이었다.

아서가 살아있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그러니까 제발 무사해라, 자식아.


“황태자 전하!”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에 들어왔다.

카일이 퍼뜩 말을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트리스탄이었다.

트리스탄이 가까이 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서 경 무사하십니다. 찾았습니다.”

카일의 눈이 커졌다.


“찾았다고?”

황태자가 황급히 트리스탄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세웠다.


“지금 어디 있어!? 다쳤지?”

너무 반갑고 안타까웠다.

아서를 찾았다는 소식임을 알아챈 케이가 바짝 다가왔다.

카일 황태자는 안도하면서도 놀라서 트리스탄을 다그치고 있었다.


“왜 당장 사람을 보내지 않고 이러고 있어!”

트리스탄이 짧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과 케이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상은 당하셨지만 정상적으로 대화 가능할 만큼 의식도 있으시고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자기가 발견된 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황태자 전하께 보내신 전언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기 전에 케이 경과 함께 들어보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트리스탄은 레이나가 내어놓은 제안을 카일 황태자와 케이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했던 말을 채 절반도 전달하기 전에 그 제안의 파급력을 파악한 케이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서의 입장이 곤란하다는 건 케이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아서 경이 떠올릴 수 있을 정도면 내가 진작 떠올렸어야 했는데.

그리고 트리스탄의 말이 끝난 뒤.

카일 황태자도 깨달았는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트리스탄을 바라보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점차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빛이 되며 초조해 보이는 것이, 머릿속으로 바쁘게 황후의 반응과 이후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 같았다.

트리스탄은 초조하게 두 사람의 판단을 기다렸다.

나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카일 황태자도, 케이도 놀라워하며 그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트리스탄은 주먹을 꽉 쥐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게 누구 의견인지 말하고 놀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레이나의 발언이라고 하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색안경을 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며, 아서가 자신의 의견이라고 전달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조바심과 흥분을 참지 못하고 케이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황태자 전하. 명령해 주십시오.”

아서의 말대로 하라고 명령해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카일 황태자는 간절해 보이면서도 케이보다 더 신중해 보였다.

마침내 카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솔직히 난 지금 신이 응답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굉장히 솔깃하거든.”

“…….”

카일이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낸 건 아서의 공이잖아. 그렇게 하면 내가 과대평가를 받는 일이 될 텐데, 그건.”

트리스탄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며 아서 경께서 황태자 전하께 보내는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

“평가절하도 한 번 당하셨으니 과대평가도 한 번 받아 보시라네요.”

“…….”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카일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감히 평가할 입장이 아니니 그동안 이런 말씀 드린 적 없지만, 사실 지금의 평가는 전하께 부당하다고 생각하신답니다. 결정은 황태자 전하의 몫이지만, 혹시 자기 의견이 필요하다고 여기실까 봐 말씀드린다고요.”

“…….”

트리스탄이 조금 벅찬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구출해 주신다면 아서 경께서는 구출되시는 데에 전혀 유감없으시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케이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좀 지친 듯하면서도 기분 좋은 탄식을 내뱉었다.


“……참모가 있을 필요가 없게 만드시네요.”

카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가 웃었다.


“……빨리 구해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

“아니, 좀 천천히 구해야 하는군요. 일단 아서 경께 의사 보내드리고요.”

정말 오랜만에,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케이의 인정이 떨어지자 참지 못한 트리스탄은 말해 버렸다.


“……레이나 아스타린 양 제안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서 경을 구하게 하라는 거.”

카일 황태자는 멈칫하고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레이나 아스타린?

케이와 트리스탄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리스탄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고, 눈매는 씩 웃고 있었다.

케이는 멈칫하는 눈빛이었다.

카일은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 여자?

트리스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 경. 그분은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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