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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조용한 열정 (158/210)


#158. 조용한 열정
2023.03.05.


레이나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네? 지금 뭐라고…….”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부러 돌려 말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선대 후작의 혈육이라면 할머니가……?

레이나는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저희 엄마가 후작가의 사생아라는 말씀이세요?”

아서가 조용히 답했다.


“아니. 어느 쪽이 정통이냐를 두고 다툴 수 있는 관계야. 사생아와 달리 당신은 후작을 위협할 수 있어. 당신을 노리는 자객들이 찾아오는 건 그 때문이야.”

“…….”

아서가 피식 자조하듯 웃었다.


“……내가 황후에게 위협받는 이유와도 비슷하지. 나는 당신과 달리 사생아가 맞지만.”

레이나가 할 말을 잃었다.

아서가 묵묵히 동굴 바깥으로 시선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할머님은 밝히길 원하지 않으셨어. 당신도 할머님과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길 바란다고 하니 나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

아서가 검을 짚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

레이나는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할머니는 밝히길 원치 않았다니?

할머니가 인정하셨다는 거야?

할머니의 의사 표현은 지금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나 조심스럽고, 그렇게나 귀족을 싫어하는 할머니가?


“……아서 경, 뭐,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닌가요?”

“…….”

아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표정 없이 바깥만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 당신은 전혀 짚이는 게 없나?”

짚이는 거?

말도 안 된다. 전혀…….


“…….”

레이나는 반박하려고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

할머니가 귀족을 싫어했던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서 귀족을 싫어하게 된 거라면?

귀족과 얽히는 일을 몹시도 경계하는 할머니.

내가 없을 때 할머니를 찾아왔던 허스트 부인.

내가 저택에 취업한 걸 알게 된 후 할머니의 반응.

후작가는 한 번 저택에 고용한 하녀를 그만두게 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레이나는 자신이 깨뜨린 적 없는 접시를 깨뜨렸다는 오해를 받아 불려가선 해고를 당할 뻔했다.

줄리어스 저택에 고용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이나는 줄리어스의 하녀들이 그런 사소한 일로 해고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아서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녀장은 알고 있었던 거다.

후작 부부조차 모르는 사실을.

그리고 할머니에게 타민을 권한 사람이…….


“…….”

레이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서 경은 그걸……. 어떻게 아신 건데요?”

아서는 잠시 틈을 두고 답했다.


“당신에 대해 조사하다 알게 됐어.”

“…….”

레이나가 머뭇거렸다.

아서가 그녀가 말하지 못한 의문을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걸 보면 그쪽에서도 내내 몰랐다가 최근에야 알게 된 거겠지. 그 집에서도 내가 골칫덩이가 되기 시작하면서 당신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을 테니.”

“…….”

레이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

아서가 피식 웃고는 그녀를 불렀다.


“레이나.”

레이나는 퍼뜩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네?”

그에게 이름을 불리자 왠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어딘지 낯선 사람의 이름처럼 들렸다.


“…….”

아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지금 말고 나중에.”

“……네?”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 당신도 수도로 가야 할 것 같으니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야. 지금은 당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나도 힘들어서.”

레이나가 그의 몸 상태를 깨닫고 퍼뜩 당황스러워하며 더듬거렸다.


“……아, 아. 죄송해요. 많이 힘드세요? 제가 도와 드릴 건…….”

아서가 웃었다.


“괜찮아. 잠깐 쉬면 돼.”

솨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둘은 묵묵히 검은 동굴 안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결국 오러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고, 왜 살리아 사람으로 추정되는 자객들이 자기를 노렸는지도 듣지 못했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도.

아서가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으며 말을 돌린 탓이었다.

레이나는 아서가 던져 놓은 말에 머릿속이 꽉 차 버리고 말았다.

설령 그가 말을 돌렸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어도 중상을 입은 아서가 몸이 좋지 않다는데 더 캐묻기는 어려웠다.

휘이잉.

절벽 안으로 찬바람이 들이쳤다.

레이나가 순간적으로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레이나는 거의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상태였고, 아서의 옷은 폭발에 손상되어 제 기능을 잃었다.

아서가 감싼 덕에 레이나의 옷은 온전했지만 남은 천을 찢어서 지혈하는 데 썼더니 레이나도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밤에는 두려움 속에서 바짝 붙어 있느라 추운 줄도 몰랐지만,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초겨울의 해안 절벽은 무섭게 추웠다.

뭔가 더 두껍고 따뜻한 걸 입고 있었다면 좋았을걸…….


“…….”

아서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까이 있어도 되나? 당신 추울 것 같은데. 나도 좀 춥고.”

레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네, 네! 그럼요!”

내 정신 좀 봐!

그는 피까지 잔뜩 흘렸는데.

레이나가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의 옆에 가까이 갔다.


“…….”

하지만 얼마나 가까이……?

체온을 옮겨 주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았지만 이런 차림새로 그러는 건 너무 파렴치하게 보일 것 같았다.

지난밤은 지난밤이고.

지금은 너무 밝았다.


“…….”

아서가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좀 기대도 되나? 웬만하면 벽에 기대고 싶은데. ……등을 다쳤더니 뒤로 기대는 건 어려워서.”

“……네, 네!”

레이나가 삐걱거리며 그의 옆에 앉아서 어색하게 몸을 붙였다.

그가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약간 앞쪽으로.


 
아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등과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온기가 옮아왔다.


“잠깐만 쉴게.”

“…….”

아서가 피로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군이 감당 못 할 규모는 아니었어. 카일도 있고.”

“…….”

“곧 사람들이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

“조금만.”

레이나는 그의 목소리가 목에 닿는 것이 긴장되고 간지러워 견디기가 어려웠다.


“…….”

레이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서는 아쉬움 속에서 묵묵히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

내 팬이라…….

좋은 핑계라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였다.

휘말리게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아서는 저에게 오랫동안 의미를 두었다는 레이나의 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녀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절을 철회한 거라고.


“…….”

그래도 저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고 달아서 한동안은 믿는 척하고 싶었다.

입 맞추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과 함께 있어도 되는 이 시간이 조금만 길었으면.

아서는 그녀가 곁에 있어 준 시간만큼 되찾은 오러를 숨겼다.

마지막일 테니 아껴 쓰자고.

이번엔 함부로 날뛰다 잃어버려서 이 여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자고.

아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 * *

레이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

아서가 소리 없이 검을 뽑고 레이나의 몸을 당겨 제 뒤로 옮겨 놓았다.

툭. 스르륵……. 툭. 스르륵…….

파도 소리를 뚫고 동굴의 입구 너머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잠이 깬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키고 숨을 멈춘 채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 위에서 드리운 밧줄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절벽 위에 고정한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

아서가 조용히 검을 쥐고 공격을 준비했다.

레이나가 초조하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뒤이어 밧줄을 감고 내려오는 사람의 발그림자가 나타났다.


“!”

팽팽하던 긴장감은 이내 놀란 얼굴과 함께 누그러졌다.


“각하!”

레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트리스탄 경!”

트리스탄이 아서와 레이나를 발견하고 감격한 얼굴로 동굴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트리스탄은 그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개선군이 황태자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들을 공격한 자객들을 전부 처리했고, 개중 몇을 생포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서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풀어 해안 절벽과 자객들의 은거지로 추정되는 해안가의 부두 창고 몇 군데를 조사 중이었다고 했다.

트리스탄은 무사하셔서 다행이라며 기뻐했지만, 레이나가 그는 무사하지 않다며 아서가 많이 다쳤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트리스탄은 아서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무슨 말인가 이해를 못 하고 있다가, 레이나가 그의 팔을 잡아 등을 돌려 보여주자 얼굴이 새하얘졌다.


“당장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근처에 테일러 로렌슨이 있습니다.”

“잠깐만요.”

레이나가 갑자기 트리스탄을 불렀다.


“네?”

레이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민하다 물어보았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 와 계신 거예요?”

아서가 대신 답했다.


“응.”

레이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갑자기 뭔가 복잡한 생각에 빠진 초조한 얼굴이었다.


“…….”

왜 카일의 존재는 꼭 한 번씩 저렇게 짚고 넘어가지.

아서는 자신의 감정이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불쑥 불가해한 질투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냥 그러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무사해?”

트리스탄이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택이 일부 파손됐고 귀부인들께서 많이 놀라셨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각하만 노린 겁니다.”

“……음.”

“그래도 케이 경과 황태자 전하께서 잘 수습하고 계십니다. 각하께서 무사하시니 빨리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일 커지지 않게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안에 일을 크게 만들면 안 된다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 수고했어. 곧 가지.”

“아서 경.”

레이나가 퍼뜩 아서의 손목을 잡았다.

아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머뭇거렸다.

그녀는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걸로 보였다.


“저희…… 돌아가지 말고 여기 조금만 더 머물 순 없나요?”

“…….”

잠깐 레이나를 보고 있던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아니, 돌아가야 해. 이 습격을 별일 아닌 걸로 무마시키려면.”

“하지만, 아서 경…….”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황후는 일을 크게 만들어서 내가 제대로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온 것처럼 만들 거야. 그럼 개선식이 엎어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엔 포로로 온 왕족들을 보복 삼아 죽이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 가야 해.”

레이나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 거꾸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나요?”

“……뭐?”

레이나가 초조한 표정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지금 저희…… 황태자 전하께 아서 경을 구할 기회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트리스탄이 멈칫했다.


“……?!”

레이나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이대로 숨어서 저희가 좀 더 위험에 처해 있는 것처럼 버티고 있다가……. 그 소문이 퍼져서 다들 아서 경을 걱정하고 있을 때 황태자 전하께서 극적으로 아서 경을 구해 주시면…….”

말을 이어가며 확신을 얻은 듯, 레이나의 말이 조금 더 급하게 이어졌다.


“만약 그렇게 알릴 수만 있다면, 황후께선 무조건 그걸 좋은 그림으로 포장해주시지 않을까요?”

레이나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트리스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께서 상한 체면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군요!”

고개를 다급하게 끄덕인 레이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서 경이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구했고, 황태자 전하가 다시 아서 경을 구한다면, 사람들은 황태자 전하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서로 목숨을 구해 준 두 형제의 우애가 멋지다고 생각하겠죠. 그럼 애초에 황태자 전하의 체면이 상한 일이 아니게 돼요.”

“……!”

트리스탄이 놀란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했다가 황급히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는 놀란 얼굴로 레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리스탄의 머릿속엔 그녀의 스크랩북이 떠올랐다.

그 스크랩북엔 전쟁 실황과 아서가 처해 있는 정치적 상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종종 레이나의 통찰력 있는 비판이나 의견이 덧붙여 적혀 있던 칼럼들도 있었다.

그녀는 아서의 일에 대해서만은 날카로운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

레이나가 아서를 보며 말했다.


“그럼 황태자 전하는 인망을 얻을 수 있고, 아서 경은 안전해질 수 있어요. 황후는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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