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 (157/210)


#157.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
2023.03.02.


아서가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은 손을 쓸어내렸다.


“……카일이 실수를 했군.”

아서는 정말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한참을 침묵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전쟁 기밀이야. 황실이 밝힐 수 없는 약점과 관련 있고.”

“…….”

아서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당신이 그걸 알았다는 게 밝혀지면 당신은 평범하게 못 살아. ……놔 줄 수도 없어. 황실 기밀을 알았으니 밖에 둘 수 없다고 황제가 불러들일 테니까.”

레이나는 침잠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축이고 다시 자기 이마를 만졌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카일은 당신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라고 생각했으니 이야기하려고 한 거야. 계속 내 옆에 있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

“하지만 당신은 그런 식으로 나한테 붙잡히고 싶지 않잖아.”

레이나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은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기대하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어떤 반전의 희망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사실의 진술이었다.

그 말이 그렇게 들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내 곁에 남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이 사람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사실이라서…….

이 사람은 당신의 필요와 상관없이, 내가 떠나길 원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줄 생각인 거다.


“…….”

레이나는 자신이 그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성공적으로 숨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나가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 그에게 상처 입혔던 그 날의 말만은 그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던 듯했다.

그와 처음 만난 밤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기에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며, 떠나고 싶다는 말.

그는 오러에 대해 말하기 싫어한다.

정말로 내가 자신 때문에 떠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그게 나에게 강요가 될까 봐.


“…….”

오러에 대해선 모른다.

이 사람이 가까이 올 때 나에게만 느껴지던 바람이 오러인가, 그 정도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하지만 레이나는 이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놓아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위험할 때는 그런 방식으로 날 구했으면서, 지금은 거리를 두는 아서의 태도에서 전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그를 바라보았다.

전부 자신을 구하며 입은 상처였다.

그는 거의 레이나를 감싸 안아서 보호했기에 등 뒤에 비해 앞은 거의 다치지 않았지만, 그의 뺨과 귀에는 폭탄이 터질 때 나온 금속 파편에 입은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

내가 아니었으면 그는 이 정도로 다치지 않았을 거다.

좀 더 합리적이고, 그 자신도 덜 다칠 수 있는 방식으로 구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렇게 감싸는 것 외엔 생각하지 못한 거다.

나를 조금이라도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그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내가 당신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말로 거부하고, 날 보내달라고 했기 때문에.

솨아아!

아래쪽 절벽에 큰 파도가 부딪친 듯, 그들이 숨은 해안 동굴 입구로 하얀 파도의 끝부분이 솟구쳤다.

하얗게 거품을 내며 솟아올랐던 파도는 이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지만, 잘게 부서진 바닷물은 안개비처럼 바람에 실려 안쪽으로 들이쳤다.

우습게도 아서는 제 등으로 레이나를 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옷을 붕대 삼아 매어 놓았대도, 찢어진 상처에 소금물을 맞는 꼴이었다.


“…….”

레이나는 그에게 대답할 말을 고르던 것을 잠시 멈추고 몸을 일으켜 그의 등 뒤로 갔다.


“잠깐 상처 좀 볼게요.”

“…….”

아서는 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그러는 것이 썩 우스워 보인다는 걸 알았는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레이나를 그냥 두었다.

다만 그는 한마디를 했다.


“……보이는 것보다는 아프지 않아.”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시면서.


“……네.”

그의 상의를 벗기고 붉게 피가 배어나는 천과, 채 가려지지 못한 상처들을 살피며 레이나는 숨을 죽였다.

간밤에 입은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등에는 레이나가 모르는 상처와 흉터가 많았다.

오 년 전엔 이런 몸이 아니었는데…….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막막해져 그의 등에 있는 흉터 중 하나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

숨을 멈추고 흠칫하며 아서가 몸을 틀었다.

그는 좀 곤란한 듯이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며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건 하지 않는 게 좋겠군.”

“…….”

레이나가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였다.


“네.”

레이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아래서 그의 상처를 조금 더 살펴보았다.

솔직히 용케 피가 멎었다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급하게 지혈을 한다고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천을 묶었기 때문이었다.

폭탄 파편이 박힌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위를 강하게 묶은 곳도 있었다.

그걸 발견한 레이나는 너무 미안하고 끔찍해서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았다.

상당히 아팠을 텐데…….

어떻게 아픈 티도 내지 않나.

상처가 심했고 레이나의 다급했던 치료는 잘못된 곳이 많았지만, 간신히 피가 멎었는데 대안도 없이 괜히 어설프게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풀기도 어려웠다.

레이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만 얻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상처가 심해요. 빨리 돌아가서 치료해야 해요.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릴 거예요.”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아서는 잠시 침묵했다.

레이나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를 찾고 있겠죠? 자객들은 물러갔을까요?”

“…….”

아서가 묵묵히 다시 옷을 입었다.


“…….”

“……개선식에서만 티 나지 않게 걸을 수 있으면 돼.”

“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쳤다.

오히려 다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레이나와 있는 게 휴식이었다.

아마 오러 때문에, 레이나가 곁에 있어 회복한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이렇게 있는 편이 몸을 위해선 나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오러 때문에 그녀를 옆에 잡아두고 날것의 저를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저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니 이 미련한 여자는 싫은 티도 내지 못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곁에 있으면 잡고 싶어질 것 같았다.

오랫동안 실종되면 안 된다는 것도 문제였다.

일이 커질 테니…….


“걱정 마. 자객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대도 군이 감당 못 할 규모는 아니었어. 금방 보내줄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안에는 정리하고 그들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다.


“…….”

레이나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쉬고 싶어서 아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당신 옆에 있는 거 싫지 않아요.”

레이나가 말해서 아서는 눈을 떴다.


“그 밤이 저한테 상처였다고 했던 말…….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요.”

“…….”

아서는 무엇에 대한 말인지 곧바로 알아듣고 표정을 굳히며 멈추었다.

레이나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땐…… 그렇게 말해서라도 당신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거든요.”

“…….”

“저로서는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이었어요. 당신이 잘됐으면 해서.”

“…….”

머뭇거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가셔야 하는 길을 올바로 가실 줄 알았어요. ……제가 당신을 망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잘못한 것 같아요.”

아서는 레이나를 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레이나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줄곧 사과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

파도 소리가 들렸다.


“…….”

아서는 레이나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다쳐서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가 너무 방어적으로 늘어놓았나.

레이나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있는 게 당신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 당신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신 밀어내려고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했어요. 본심이 아니었어요. 제 진짜 마음은, 당신에게 제가 필요하다면 너무…… 돕고 싶다는 거예요.”

레이나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크리스티나를 밀어내고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릴까 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당신 아내가 될 순 없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 있는 만남이 아니었기도 하고, 당신 오점이 돼서 당신을 주저앉히긴 싫거든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지켜 드리고 싶고, 잘 됐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첫 번째 팬으로서요…….”

“…….”

레이나는 스스로 무릎을 끌어안고 한숨을 한번 내쉰 뒤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당신은 제 우상이었어요.”

“…….”

그리고 슬그머니 아서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많은 제국민들의 우상이시니까요.”

“…….”

레이나는 좀 민망해하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이 넓은 세상으로 훨훨 높이 날아가는 게 좋았어요. 정말로요. 당신이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게 좋고…… 대리만족 같은 걸 느꼈어요. ……아마 이해가 안 되실지도 모르지만, 저한텐 당신 소식을 찾아보는 게 꽤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말하면 제가 뿌듯하고, 나쁘게 말하면 제가 싫고, 화나고…… 그랬어요. 당신의 평판이 망쳐지면 꼭 제가 망쳐진 기분이 들 거예요. ……그래서 그땐.”

“…….”

“당신을 위해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어요.”

끼룩. 끼룩.

한가롭게 바닷새 소리가 들렸다.


“…….”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나가 몇 번이나 머리를 쓸어넘기며 무안함을 견디고, 조금 후에 아서를 바라보았다.


“……저는 진심으로 당신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응원하고 싶고, 도움 되어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 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

“더는 숨기지 마세요. ……오러에 대해 말해 주세요. 희생이나, 견디는 게 아니에요. 제가 듣고 싶어요.”

“…….”

진심이 전해졌을까?

알 수 없었다.

레이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했다.

하지만 아서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아서가 침묵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선. 당신이 당장 알아야 하는 건 오러에 대한 게 아니야. 당신 어머니에 대한 거지.”

생각지도 않은 말에 레이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후작의 딸이 아니야. 하지만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가 선대 후작의 혈육이었어. 후작하고는 이복누이 관계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