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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아프지 마 (155/210)


#155. 아프지 마
2023.02.23.


그녀를 감싼 순간, 아서의 머릿속엔 카일에게 채 묻지 못한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답을 들어두었다면 도움이 되었을까.


「네 눈, 악화됐지?」


「내가 네 오러 부작용, 그러니까, 시력을 잃는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다 알게 된 게 있어.」

 
들을 필요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 눈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혹시 카일이 알아낸 게 있다면 묻고 싶은 건 있었다.

그 여자가 자꾸 아픈 것 같아.

그 여자를 제 목숨처럼 여기는 의사를 옆에 붙여 놨는데도, 계속.

왜 그렇지?

카일.

왜 그 여자가 아픈지, 혹시 알아?

혹시 그게 나 때문일 수도 있어?

카일.

당신이 알아낸 게 있다면, 내가 궁금한 건 그것뿐이야.

혹시 그 여자한테도 내가 필요해?

나한테가 아니라, 그 여자한테.

내가 필요하냐고.


 

* * *

쿠쿵…….

오랜 시간 바닷바람을 맞으며 약해진 별장 저택의 벽이 폭발에 휩쓸려 크게 흔들렸다.

쿵!

불붙은 기둥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레이나의 눈이 기억 속에 있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오 년 전.

불이 난 집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할머니가 목숨을 걸고 저를 구했던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레이나는 겁에 질림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려야 해.

여기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정신이 들었을 땐 나를 감싸려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내 앞에 죽어 있을 수 있다.

그건 절대 안 돼.

아서를 그렇게 만들 수 없어.

폭발에 부상을 입은 아서의 그 뒤에서 자객이 달려들고 있었다.


“!”

아서의 옷을 쥔 레이나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레이나가 어찌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음에도 아서가 움직였다.

간발의 차이로 그 자리에 자객의 칼이 떨어졌다.

콰직!


“…….”

아서가 땅에 검을 내리찍은 자객을 향해 즉시 검을 휘둘렀다.


“크윽!”

자객은 빠르게 몸을 튕겨 달아났지만 얼굴과 가슴을 크게 베이고 신음했다.

치명상이었다.

레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태연하게 몸을 돌리는 아서의 검을 따라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자객의 피가 아니었다.


“…….”

아서의 부상을 눈치챈 자객이 자신이 입은 상처를 개의치 않고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희번덕거리는 자객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Du tust dir weh. Arthur.”

그가 외국어로 말을 던졌다.

그리고 몸에서 조금 전에 죽은 자객이 든 것과 같은 폭탄을 꺼냈다.


“Dann komme ich gerne mit dir. Wir treffen uns in der Hölle.”

앞의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뒤의 말은 레이나도 아는 것이었다.

‘지옥에서 만나자.’

치치치치칙!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는 이들이 세 번째, 네 번째 폭탄을 손에 들었다.

피하거나 공격할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서가 다시 레이나를 강하게 품에 넣고 감쌌다.

숨이 막히며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아서!”

다급한 비명은 폭음에 삼켜졌다.

콰콰쾅!

콰콰콰쾅!

폭탄을 터뜨린 자객들을 집어삼키며 저택이 다시 폭음에 휩싸였다.

* * *

저택에 침입한 적의 수는 이미 암살이라 볼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군대의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색을 드러낸 적의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해 아서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서를 죽이고 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것.

아서만 없다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

인질로 보낸 자국의 왕족 따위는 개의치 않는 태도.

종전을 반대하는 적국의 극단 세력이었다.

개선군 막사 곳곳에서 야습을 알리는 휘슬이 날카롭게 울렸다.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막사에서 뛰쳐나왔다.

* * *

저택에서 연이어 울린 큰 폭발음에 아그네스와 패트리시아, 크리스티나 모두가 놀란 얼굴로 달려나왔다.

귀족들과 저택의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며 아서의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 안내에 따라 대피하십시오!”

패트리시아가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 이게 무슨 일인가요?”

카일 황태자가 굳은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진압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불이 날 수 있으니 일단 대피하세요.”

아그네스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자객이 들었고, 레이나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아서가 찾으러 갔다는 것까지 들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군대가 옆에 있는데, 일개 자객 몇이 벌이기엔 일이 너무 커지고 있지 않나?

아서는? 괜찮은 건가?

크리스티나가 냉정한 낯빛으로 물었다.


“도적이 아니군요. 일개 도적들이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공격할 리 없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아서 경은 어디 있나요?”

케이가 카일 대신 대답했다.


“적국의 반 종전 세력 잔당들이 아서 경에게 앙심을 품고 공격을 해온 것 같습니다. 폭탄을 사용한 걸 보면 적국 살리아 인입니다.”

“……!”

크리스티나가 다시 물었다.


“살리아의 공격이라고요?”

살리아 왕실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황태자 편에 포로로 왕족들까지 보냈다.

제국에 항복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의 보증으로 인질들을 보낸 것이었다.

케이가 그들의 의문에 답했다.


“살리아 왕실은 항복했지만, 그쪽엔 왕족과 대립하며 종전을 반대하는 극단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놈들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쪽에 포로로 보낸 왕족들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케이가 힐긋 카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이게 전부일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대피해 주십시오. 나중에 아서 경께서 말씀드릴 겁니다.”

카일이 동의의 눈짓을 보내자 모두가 끄덕이고 물러났다.


“알겠어요.”

카일이 물러가는 사람들 뒤에서 혼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극단적인 반 종전 세력은 이 정도 공격을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는데…….

자객들의 배후가 후작이나 후작 부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개선식이 열리기 전에 아서를 낙오시키길 원한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카일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제발, 아니길…….

곁에 선 케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카일 황태자에게 말했다.


“……수도에 들어가기 전이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힘을 끌어모았다면 가능합니다. 일단 황태자 전하께서도 대피하십시오. 이 별장, 목조 저택이라 폭탄과 화재에 취약합니다. 불이 날 수 있습니다.”

“잠깐만.”

때마침 저편에서 리오넬이 달려오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카일이 이를 악물고 다가온 리오넬에게 물었다.


“아서는?”

리오넬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루칸 경과 트리스탄 경이 기사들을 이끌고 찾고 있습니다. 폭탄이 일곱 번 터졌는데, 전부 아서 경의 전투 흔적과 함께 있었습니다.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객들은 다 죽어 있었습니다.”

폭탄…….

검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에게는 폭탄을 들고 함께 죽자고 달려드는 적국 놈들의 지독한 싸움 방식이 떠올랐다.


“가까이서 터진 것 같아?”

카일의 눈빛을 보고 리오넬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좀 다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폭탄은 품질이 일정하지도 않고 불발도 많았으며 위험했다.

하지만 죽음을 감수하고 가까이서 수차례 터뜨린다면 그 어떤 인간에게든 확실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고 계신 걸 보니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택 벽이 뚫렸을 때, 폭탄의 살상력을 피하기 위해서 밖으로 탈출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사들이 자객을 추적하며 함께 찾고 있습니다.”

“……밖?”

“바다 쪽 절벽과 숲입니다.”

해안 절벽.

다수 자객에게 쫓기는 사람과, 자객들과, 자객들을 소탕하고 그들을 구하려는 사람 입장에선…….

자객들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이다.

테일러가 달려와 말했다.


“수색에 함께 가겠습니다. 부상 당한 사람이 있다면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

가겠다고 하는 이유는 레이나 때문이겠지만, 그는 도움이 될 것이다.

아서가 다쳤건, 레이나가 다쳤건, 그들이 돌아온 후 레이나를 숨기거나 보호해야 하건.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렘브란트 경과 브로디가 할머니 곁에 남았습니다. 안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가지요.”

 

* * *

아서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레이나를 찾았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정신을 잃으면서도 그는 제 품에 레이나를 꽉 안고 있었으니까.


“…….”

바로 그녀를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아서는 숨을 몇 번 골랐다.


“……괜찮아?”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레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덜덜 떨면서 그의 등 뒤를 더듬었다.

아서의 눈 밑이 고통으로 작게 움찔 떨렸다.

지혈하려는 것인 듯, 무언가를 뒤에서 힘껏 묶었다.

앞으로 돌아온 레이나의 떨리는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서가 그녀에게 물었다.


“……다쳤어?”

레이나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조용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

아서가 숨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와 주변 상황에 감각을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후.

레이나가 이제 위험 요소가 지나갔다고 알려주듯 다소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아서는 주변의 위험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온통 어둠뿐.

파도와 바람 소리가 커서 청각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러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를 포착하기 어려운 환경은 적으로부터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지만, 시력 대신 청각 의존도가 높은 아서를 그 이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서는 레이나가 있을 방향을 잠시 바라보았다.


“…….”

어둠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레이나가 보였다.

레이나는 숨죽인 채 옷을 벗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과 아서의 피가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의 옷을 찢어 그를 어떻게든 감싸려고, 지혈이라는 걸 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

어떻게 해야 감각이 돌아오는지 짐작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면, 이 여자를 지켜내려면 오러가 필요하다.

좀 미친놈으로 보이겠지만 상관없었다.

아서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쌌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고개를 든 레이나를 향해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거부당하겠지만 아서는 거칠어질 각오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이나가 숨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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