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보호
(154/210)
154. 보호
(154/210)
#154. 보호
2023.02.19.
침대에 앉은 레이나는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쥔 채 멍하니 컵에서 오르는 흰 수증기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며칠 만에 몸이 좋아져 깨어나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편한 침대에서 잠들었던 덕분인지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레이나는 테일러가 해 주었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아서 경의 개선군이 밖에 와 있어.」
「도적에게 습격을 당한 일 때문에 개선군이 아그네스 님을 모시고 가기로 해서, 한동안 여기에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도 행선지를 바꾸기로 했어. ……수도로 갈 거야.」
「며칠 후에 함께 출발하기로 했어.」
“…….”
「우리를 습격한 사람들의 정체가 아직 불분명해서, 한동안 우리도 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대.」
「케이 경의 의견이고 나와 아그네스 님도 같은 생각이야.」
「그래서 수도까지 함께 가야 할 것 같아.」
「수도는 다양한 약재를 구하기 쉬우니까, 가서 할머니를 좀 더 평안하게 치료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렘브란트 경 쪽에 합류해서 조심하면 줄리어스 쪽이랑 접점은 없을 수 있을 거야. 기사 분들이랑 브로디도 도와줄 수도 있을 거고.」
「지금은 자객한테 습격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군 보호를 받는 게 나을 것 같아.」
“…….”
……수도로…… 간다고.
그 사람이 여기 와 있다고.
“…….”
혹시 그게 꿈이 아니었나.
아니면, 무의식중에 그 사람이 가까이 온 걸 알아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레이나는 조용히 마른세수를 했다.
「……레이나.」
「우리 습격당했을 때…….」
「혹시 널 쫓는 것 같아서 우리한테서 떨어졌던 거야?」
“…….”
아니라고 해야 했을까.
톡.
창가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부딪치는 기척.
레이나는 문득 창의 덧문을 바라보았다.
“…….”
숨죽여 보았지만 다른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레이나는 조용히 옆에 컵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레이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창가로 걸어갔다.
“…….”
그러나 창문 앞에 선 레이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뻗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해.
달각.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레이나는 흠칫하며 반걸음 물러서고 숨을 죽였다.
루칸 경이 주었던 단검.
그것을 검집에서 뽑을 때 저런 소리가 났던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덧문 틈새로,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칼날이 천천히 들어왔다.
“……!”
어둠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용이하도록 비반사 처리된 칼날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한 채 창문을 보고 있던 레이나의 눈엔 움직이는 칼이 보였다.
칼이 아래서 위로 움직이며, 창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걸쇠를 조용히 들어 올렸다.
“!”
레이나는 소리 없이 뒷걸음치며 거리를 벌리다가,
삐걱, 자신의 발밑에서 마루 밟는 소리가 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뒤로 돌아 달렸다.
확.
달아나는 소리를 눈치챈 자객이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쾅!
레이나는 다급하게 문을 닫고 달려가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도움을 청하러 갈 수 있는 곳을 떠올렸다.
할머니한텐 안 돼.
브로디도 안 돼.
테일러도 안 돼.
아그네스 님도, 패트리시아 대부인도 안 돼!
어디로 가야 하지?
무기를 가진 사람!
기사들이나 경비병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개선군이 밖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곳엔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있다!
훅.
자신이 닫고 나온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는 재빨리 코너를 돌아 달려갔다.
코너를 돌자 양옆으로 뻗어 있는 어둑한 복도가 나타났다.
레이나는 아무 방향이나 선택해 달렸다.
레이나가 망설임 없이 몸을 피하자마자 벽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레이나는 겁에 질리는 대신 멈추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렘브란트 경!
렘브란트 경에게 가면 경비병과 호위 기사들이 있을 거야……!
하지만 혼자 있다면?
내가 가면 다 위험에 빠지게 될 텐데.
다시 갈림길이었다.
“!”
그리고, 확!
허리를 당기는 손길에 몸이 훅 딸려갔다.
눈앞이 어두워지며 뭔가에 덮쳐진 느낌이 들었다.
챙!
칼을 쳐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복도 옆에 비수가 떨어져 굴러갔다.
“……!”
레이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서늘한 바람 속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아서가 자신의 가슴에 레이나의 머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고개 들지 마.”
아서가 칼을 휘둘렀다.
챙!
다시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두 개의 비수가 구석에 팽개쳐졌다.
“하아, 하아…….”
레이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두려움으로 손이 떨렸지만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 잘했어.”
꽉 안아주는 그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침착했다.
하지만 자신만큼이나 급하게 달려온 듯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
레이나는 아서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그의 말을 들었다.
* * *
카일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객이 들었어. 나와 아서가 있던 방에 시신 셋. 그리고 아서가 갑자기 뒤를 부탁하고 사라졌는데 레이디 크리스티나한테 간 것 같아.”
즉시 누구한테 갔다는 말인지 알아들은 루칸과 트리스탄, 리오넬이 몸을 돌려 달려갔다.
케이가 교묘하게 군의 정찰 위치를 변경하는 명령을 전달했다.
군은 움직이지 않은 채, 레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아서의 최측근 기사들만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고모님!”
“카일!”
카일은 창백한 아그네스의 얼굴을 보고 아서가 남긴 말들을 빠르게 떠올렸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모르고,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고모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지.
……아니 젠장 이름이라도 알려주지, 헷갈리게!
“대부인과 함께 계십시오. 나오지 마세요. 보호하고 계신 여자가 위험에 처했고, 아서가 따라갔습니다. 가능하다면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시선을 끌어 주십시오.”
“……! 그래, 알았다.”
아그네스가 카일의 말을 알아듣고 표정이 변해 다른 곳으로 서둘러 갔다.
군에 명령을 전달한 케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카일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자객 뭐야, 누구야? 아서 말로는 마리아 황후가 아닐 거래. 날 공격했어.”
케이가 찌푸렸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직 누군지 모릅니다. 여러 곳에서 오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카일이 놀라지도 않는 케이의 반응을 보고 욕을 씹어 뱉었다.
“젠장, 이런 일이 잦았어?”
“꾸준히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고 또 누구?”
“…….”
“추측, 누구!”
케이가 오래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적국의 반(反) 종전 세력, 그리고…… 줄리어스 후작이나 후작 부인일 가능성도 보고 있습니다.”
카일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뭐가 어째?”
* * *
쾅!
루칸과 트리스탄이 레이나가 머물고 있던 침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창문이 열려 있는 빈방만이 서늘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트리스탄이 창백해졌다.
순간적으로 납치 인질극이 벌어지는 상황이 떠올랐다.
‘안 돼……. 안 된다.’
루칸이 빠르게 침대와 창가를 확인했다.
“끌려간 저항 흔적은 없습니다.”
“약으로 기절시켜 데려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침대 흔적을 보면 자기 발로 일어나서 움직인 것 같아요. 이불 걷힌 모양도 그렇고, 슬리퍼가 없습니다.”
“……!”
“창문으로 자객이 들어오는 걸 발견하고 저택 안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자객을 발견했다고?”
레이나 양이?
그러는 게 가능할까?
순간 트리스탄의 머릿속에 레이나의 스크랩북이 떠올랐다.
“안쪽입니다!”
리오넬이 빠르게 달려와 알렸다.
“저쪽에 추격전을 벌이며 달아났던 흔적이 있습니다. 벽에 비수 흔적이 남아있어요.”
루칸과 트리스탄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 * *
“마님.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저희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
올가가 패트리시아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
패트리시아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올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올가가 패트리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 * *
“큭……!”
억눌린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객이 가슴에 꽂힌 칼을 쥐고 절명했다.
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객의 손에서 검을 뽑아내며 다섯 번째 자객의 몸을 발로 밀어 떨어뜨렸다.
“…….”
지끈.
날카로운 통증이 눈을 찔렀다.
감각이…….
한계까지 오러를 사용하고 있는 아서는 눈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습관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아있는 자객은 둘.
“…….”
계속해서 덤벼드는 자객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감각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
하지만 남은 놈들을 처리하는 데는 충분했다.
무뎌진 감각이어도 남은 자객의 수를 헤아리고 달려오는 부하들을 느끼는 데는 충분했으니까.
루칸, 트리스탄, 리오넬이 남겨 둔 흔적을 발견했고 적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그들이 자신들에게 도착할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충분히 버틸 수 있고, 얼마든지 다 처리할 수도 있었다.
괜찮아.
아서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가 있던 자리로 여섯 번째 자객의 칼이 스쳐 지나갔다.
아서는 레이나를 자객의 반대 방향으로 둔 채 자객 쪽으로 몸을 돌려 자객의 배를 무릎으로 가격하고 발로 걷어찼다.
“컥.”
뒤이어 몸을 숙이고 웅크린 자객의 위로 칼을 휘둘렀다.
죽기 살기로 바닥을 굴러 몸을 뺀 자객이 비틀거리며 팔을 휘둘렀다.
아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날아오는 비수들을 쳐냈다.
그사이 다른 자객이 그의 뒤를 잡았다.
아서는 예상한 듯이 레이나를 안전한 사각으로 밀어 넣으며 막아냈다.
전투가 이어졌다.
아서는 레이나를 지키면서도 침착하게 자객들에게 치명상을 입혀가고 있었다.
보호하고 있는 여자를 공격해 약점을 노출 시키려는 시도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게 차단당했다.
아서에게는 여자 한 명을 보호하면서 세 명의 자객을 상대하는 것이 너무나 간단해 보였다.
마음을 읽히는 것 같은 전투였다.
자객들은 셋이 하나를 몰아붙이면서도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큭……!”
그 순간 다리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자객이 숨을 몰아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서가 멈칫했다.
자객의 손에서 비정상적인 열기가 느껴졌다.
치치치칙!
레이나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그를 확 당겼다.
“아서 경! 폭탄이에요!”
자객이 그것을 그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알 수 없는 외국어 외침이 들렸다.
“!”
젠장.
챙!
아서는 강하게 칼을 밀어내 자객과 거리를 벌린 뒤 레이나를 품에 집어넣고 고개 숙여 감쌌다.
콰아앙!
큰 소리와 함께 별장의 저택에서 폭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