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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카일의 분노 (153/210)


#153. 카일의 분노
2023.02.16.


카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졌다.

카일은 나란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서나 크리스티나 대신, 난처해하는 듯한 렘브란트를 향해 물었다.


“네가 설명해, 렘브란트.”

“……아, 네.”

렘브란트가 짧게 머뭇거리고,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며 최대한 중립적으로 설명했다.


“……이분이 그러니까, ‘진짜’ 후작 영애, 레이디 크리스티나입니다.”

카일이 바로 치고 들어와 물었다.


“전에 너와 내 앞에서 본인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라고 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잖아.”

“…….”

렘브란트는 카일로부터 레이나를 두둔하기 위해 조금 긴장했다.

이미 카일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무의미해졌다.

이제는 최대한 황실의 분노로부터 레이나를 지킬 수 있을 만한 말을 고민해야 했다.


“……그 사람은 사정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일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사정? 어떤 사정이면 황태자 앞에서 아서의 부인을 사칭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렘브란트는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게…….”

카일이 생각보다 화를 내고 있었다.

사람 좋고 유쾌한 인물이라, 일단 당황하더라도 천천히 사정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렘브란트는 일단 레이나를 변호했다.


“……5년 전에 아서 경과 결혼식을 치렀던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줄리어스의 개선식에 ‘레이디 크리스티나’로 나선 사람인 것도 맞고요.”

렘브란트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진짜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이분이십니다. ……아서 경께서는 후작 각하의 사과를 받아들이시고 적절한 피해 보상을 받으신 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

카일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서와 크리스티나는 그 앞에서 침묵하는 것으로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

그러나 아무리 렘브란트가 애써 ‘레이나’에게서 주의를 떨어뜨리려고 돌려 말해도, 이미 카일은 굳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래, 재미있어할 일이 아니라 화낼 일이 맞지.

내가 너무 태평했구나.

렘브란트는 속으로 초조하게 신을 찾았다.

……빨리 공작 부인과 테일러 씨에게 레이나를 챙겨서 꼭꼭 숨으라고 해야 하나.


“…….”

카일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카일은 일국의 황태자였고, 다소 무람없는 데가 있을망정 황족의 매너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난처해하는 레이디를 몰아붙여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일은 최대한 심한 말을 하지 않고 말문을 열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기가 막혀 헛숨을 내뱉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네, 황태자 전하.”

“이건 사기 결혼입니다.”

카일은 스스로의 말이 귀로 들어오자 다시 어이가 없는 듯, 재차 헛웃음을 지으며 분노를 참았다.


“제가 역사에 해박하지 않으나, 제가 아는 그 어떤 황제의 아들도 혼사에서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설령 사생아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일은 그로서는 드물 정도로 굳은 얼굴로 화를 내고 있었다.

소탈하고 장난스러운 편인 카일이 이런 식으로 화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카일이 입을 다물고 당혹감과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

카일은 아서에게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황실이 아서에게 해 준 것이라곤 이것뿐인데, 뭐라고?


“감히 어떻게 이런 일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죄송?”

카일은 반쯤 폭발했다.


“아서는 사실상 줄리어스에 전쟁 용병으로 기용된 겁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서는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그곳이 어떤 지옥이었는데!”

순간 카일이 멈칫하고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틀어쥐고 가만히 멈춰 선 카일의 목에 파리한 핏대가 섰다.


“아니……. 사지로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이런 짓을 벌인 거군요.”

“카일.”

아서의 부름에 카일이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차마 아서를 쳐다보지 못했다.

카일은 설마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도 묵인했을까 봐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

차마 아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카일 황태자는 가만히 굳은 채 크리스티나만 응시하며 서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아서가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렘브란트 경. 잠시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황태자 전하와 단둘이 얘기 좀 하겠습니다. 전하, 허락하십시오.”

“…….”

카일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 * *

탁.

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기척이 멀어졌다.


“…….”

카일이 소파에 앉아 몸을 숙이고 팔꿈치를 괴어 이마를 감쌌다.

……어떡하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우아하고 세련된 미인이었다.

자기의 잘못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서가 전장에 있는 동안 마음 썼고, 오 년 동안 돌아가겠다고 기다린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짧게 만났지만, 카일은 아서가 그 여자에게 마음 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나한테 왜 진작 말 안 했냐……?”

아서가 피식 웃으며 카일을 향해 눈짓했다.


“이렇게 화내실 것 같아서요.”

“…….”

카일이 꾹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이 자식아!”

카일이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지?”

“……묵비권의 뜻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카일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 머리를 헤집었다.


“……제발 오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곤 하지 마라. 내가 너무…… 널 볼 면목이 없으니까.”

“…….”

아서가 옅게 웃었다.

카일이 초조하게 할 말을 찾았다.


“그 여자는 어딨어?”

“모릅니다.”

“오케이. 대외적으로는 모른다. 접수. 그럼 실제로는?”

“찾지 마세요.”

“……뭐?”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저랑 상관없이 조용히, 평범하게.”

“…….”

카일은 묘한 표정으로 그의 진심을 가늠하려는 듯이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카일 건너편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참아 주십시오. 황후 폐하나 황제 폐하가 알게 되는 거 싫습니다. 저도 온 세상에 아서 줄리어스가 사기 결혼 당했노라고 소문나고 싶지 않습니다. 제 혼인이 문제 되면 참전한 병사들한테도 영향 있을 것 같고요.”

“……아서. 너.”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도 그럭저럭 지낼 만하고 후작도 잘해줍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너, 시력.”

카일이 아서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했다.


“악화됐지.”

“…….”

“거짓말할 생각 마. 내가 널 또 테스트하게 하지 마라. 부탁이다.”

“……큰 차이 없습니다. 실명하지 않았습니다.”

카일이 다시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네 전투 보고 받았어. 뭐야?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었잖아.”

“그냥 좀…… 스트레스 풀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기껏 전쟁도 끝났는데 왜 그래. 시력에 문제 생길 텐데.”

“…….”

카일이 멈칫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일이 고개를 들고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도 여기 있구나.”

“…….”

아서가 피식 웃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카일도 이래저래 운이 나빠 저평가된 면이 있지.

포로가 되었다거나 가볍다고 평가절하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아서가 조용히 말을 골랐다.


“모르는 척해 주십시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모릅니다. ……발각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지금 대모님 보호 하에 있습니다. 렘브란트 경이 도와주고 있고요. ……본인 원하는 대로 떠나서 살게 해 줄 생각입니다.”

카일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서, 내가 네 오러 부작용……. 그러니까, 시력을 잃는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다 알게 된 게 있어.”

“…….”

아서는 카일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의 깍지 낀 손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

순간 아서가 검을 뽑고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카일의 어깨 뒤에서 검이 맞부딪쳤다.

카일이 빠르게 일어나 돌아서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젠장. 뭐야?”

아서에게 공격당한 자객이 빠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자세를 낮추었다.

아서가 차분하게 말했다.


“자객입니다. 뒤를 부탁합니다.”

챙!

자객이 억눌린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켜고 아서의 검을 막았다.

거의 동시에 카일은 확 뒤로 몸을 돌리며 칼을 들어 뒤쪽에서 달려든 두 번째 자객과 검을 맞댔다.

채챙!

두 쌍의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경비……!”

아서가 빠르게 입을 열어 카일을 막았다.


“부르지 마세요. 일 커진다고 케이가 도적 소탕으로 처리했습니다.”

“제기랄. 생포해?”

“아뇨. 죽이세요.”

아서가 맞대고 있던 칼을 순식간에 흘리며 자객의 목과 어깨 사이의 급소를 베고 지나갔다.


“끄윽……!”

“붙잡혀도 자백하지 않습니다.”

아서가 치명상을 입은 자객을 뒤에서 몰아붙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마리아 황후의 자객이 아니니 당황하지 마시고요.”

“…….”

카일이 헛웃음을 지으며 자객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래, 알려줘서 고오맙다.”

 

* * *

질질.

죽은 자객들의 발을 잡아끌어다 옆에 나란히 정리하며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어떻게 알았냐? 어머니가 보낸 자객이 아닌 거.”

“황후가 보냈으면 당신을 공격했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그럼 이 자객들은 뭔데.”

카일이 자객들의 복면을 끌어 내려 얼굴을 확인했다.

아서가 답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아마…….”

말을 멈추며 아서의 표정이 변했다.


“……?”

카일이 고개를 돌리다 그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아서의 검의 그립에 묶은 손수건이 피에 젖어 있었다.

아래로 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아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고 먼 데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여기 마무리 부탁합니다.”

아서가 순간 방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검에 묶인 흰 손수건은 피투성이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벗어나질 못해서.

더 빨리 풀어주질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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