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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비밀 (152/210)


#152. 비밀
2023.02.12.


레이나가 그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아픈가요? 야위었네요. ……내가 당신 마음고생 하길 바라서 그런가.”

아서가 웃었다.


“……그래? 내가 당신 때문에 마음고생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네. 당신 조금 미워요.”

아서는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마른 게 당신 때문이었네. 당신 마음고생시켜서.”

레이나가 열에 달아오른 얼굴로 푸스스 웃었다.


“내가 당신한테…… 이런 말을 듣고 싶었구나…….”

작은 중얼거림 후, 그녀가 뒤척였다.

수마가 그녀를 더 깊은 꿈으로 끌어들이는 듯했다.

열 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눈이 점점 감겨가는데도, 눈을 감고 싶지 않은 듯 레이나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면 말해 주면 안 되나요?”

“뭘?”

“내가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

레이나의 표정이 어떤 때보다도 솔직하게 풀어져 있었다.


“……당신은 무슨 비밀을 감추어야 해서…… 나를 놓았어요……?”

“…….”

“당신은 왜 나를…….”

아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짐작 못 하는 건……. 당신도 말을 할 수가 없겠죠?”

“…….”

“꿈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

레이나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레이나는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듯 웅얼거렸다.


“……자객들이 나를 노리는 것 같더라고요.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고 생포하려는 거 같았어요…….”

“…….”

“그래서…… 사람들을 두고 나도 모르게 뛰어나갔는데…….”

“…….”

“달려가는 동안…….”

레이나의 표정이 멍해졌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날 잡으러 온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레이나의 눈이 감기며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깨면 당신 없겠죠.

나도 잊을게요.

아프지 마세요.

레이나가 반복해 속삭였다.

……아프지 마세요.

레이나가 눈을 감고 잠든 후.

아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잠든 듯, 조금 더 무겁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 * *

패트리시아의 별장.

올가 허스트를 위해 마련된 방.

끼익.

문을 열고 반쯤 들어서던 올가가 멈칫하고 티테이블 앞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녹색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불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돌려 올가를 바라보며 웃었다.

해사하면서도 차가운 얼굴이었다.


“어디 다녀와? 이 밤에.”

“…….”

올가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대답했다.


“대부인께 다녀왔습니다. 기다리셨습니까?”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올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뱃대에 입을 대었다.


“응.”

“…….”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입매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많은 이야길 하고 온 것 같네.”

“…….”

“할머니가 뭐래?”

“…….”

올가가 즉시 대답하지 않는다.

어지간해선 그런 일이 없는 올가 허스트가.

아마도 크리스티나가 무언가 조금 전의 이야기와 관련된 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일 터였다.


“하하.”

크리스티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갸웃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올가. 당신 생각보다 음흉한 사람이네.”

“…….”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충성스럽게도.”

크리스티나가 가만히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놓고 웃으며 올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

“난 당신이 전적으로 할머니의 뜻을 따르는 심복이라고 생각했거든. 내 아버지가 심하게 멍청한 짓으로 가문을 망치지 않게 하는, 할머니의 파수꾼이라고 말이야.”

“…….”

“그래서 할머니를 존중하는 의미로 그동안 당신이 하는 일을 묵인하고 선을 넘지 않았어. 당신 일 처리야 믿을 만하고, 아버지를 막을 만한 사람이 할머니 뿐이기도 하고……. 당신이나 할머니가 우리 가문에 해가 될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도 하니까.”

“…….”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 할머니는 모르는 모양이네?”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당신이 레이나의 할머니를 낫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알아.”

“…….”

“나는 그게, 레이나를 제거하느니 완벽하게 충성스럽게 만들어서 가문의 비밀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건 줄 알았어. 지금 우리 가문엔 당신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그 애를 좋아하기도 하고.”

“…….”

“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가 보네.”

크리스티나가 상대의 비밀을 속삭이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할머니 뜻이 아니지? 그거.”

“…….”

“할머니 뜻이 그러니 제거할 수는 없고, 입은 막아야겠고.”

“…….”

올가의 노고가 감동이라는 듯이, 크리스티나가 눈을 찌푸렸다.


“그동안은 어떻게 조용히 있어 주었지만, 레이나가 다시 줄리어스에 그런 식으로 얽혔으니. 그쪽 할머니가 계속 입 다물어 줄까 불안하다고 생각한 거야?”

“…….”

“착한 주인이 명령하지 않은 과잉 충성, 뭐 그런 건가?”

“…….”

크리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난 당신이 맘에 들어. 나한테도 딱 당신 같은 심복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당신은 나랑 더 잘 맞아. 안 그래?”

올가가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과분한 평가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제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하문하십시오.”

 

* * *

브로디는 조용히 테일러를 찾아갔다.

테일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검붉은 물을 구한다고?”

“응. 사정이 있는 사람한테 비밀리에 부탁을 받았어. 일단 누가 찾는 건지는 말하기 곤란한데……. 혹시 만들어 줄 수 있어? 약값은 충분히 낼 수 있어. 내가 보증해.”

검붉은 물을 찾는 사람들이 비밀을 요청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거의 매번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로 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재료가 없어서 만들 수가 없어. 수도에 가면 재료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독성이 있는 약재를 배합해서 만드는 약이고 재료도 흔하지 않았다.

환경을 많이 타는 약재들이라 바닷가에서는 보관이 불가능했다.

레이나에게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테일러는 약재를 따로 가져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이야?”

“응. 여기선 못 구할 거야. 습한 환경에선 독성이 강해져서 약재가 금방 변하거든. 급해? 얼마나 됐어?”

브로디는 초조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상황에 기간을 정확하게 말하면 마리나라는 것을 테일러가 눈치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리나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 듯 테일러에게 부탁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가능하면 비밀로 해 주고 싶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럼 일단, 수도에 가서 재료만 있으면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야?”

문득 상황을 깨달은 브로디가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아, 안 되는구나. 너 수도에 안 가지?”

“……음, 그게.”

테일러가 잠시 망설이다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계획이 바뀌어서……. 일단 수도로 같이 가기로 했어.”

“어? 정말?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레이나도?”

테일러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케이가 찾아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레이나 양이 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레이나 양도 눈치챈 것 같고요.」


「경호 인력을 어느 정도 붙이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아그네스 님이나 렘브란트 경과 함께 하시며 군의 보호를 받으세요.」

 


“…….”

“테일러?”

브로디의 물음에 테일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응. 그렇게 됐어. 방금 정해진 거라 레이나도 아직 몰라. 나으면 이야기해 봐야지.”

그리고 테일러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수도에 가서 약을 만들더라도 내가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으면 검붉은 물은 처방해 줄 수 없어. 비밀 유지는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데려와.”

브로디가 머뭇거렸다.


“……환자를 직접 만나야 해? 약만 전해 주는 건 안 될까?”

예전에는 그랬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약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충분히 알게 된 지금은 아니었다.

테일러가 고개를 젓고 차분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 필요한 약인지 이해해. 약의 부작용 따위가 문제가 아닌 상황도 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검붉은 물은 위험한 약이야. 환자 상태를 보고 얼마나 필요한지도 봐야 하고, 경과도 봐야 해. 내가 지은 약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식으로 약만 전해 줄 순 없어.”

 

* * *



“나가 주세요. 남편과 둘이 대화할 것이 있어요.”

크리스티나는 온화한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아서의 곁에서 기사들을 쫓아냈다.


“트리스탄 경, 당신도요.”

“…….”

아서가 눈짓으로 동의했다.

트리스탄은 마지못해 물러난 뒤, 닫힌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참을 만해.」

 
대체 어디가 참을 만하다는 거지.

결혼할 예정은커녕 전쟁 일으키기 직전의 정치가들처럼 마주 보고 있으면서.

케이가 트리스탄의 곁에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레이나 양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인 한, 아서 경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틀어지지 않을 겁니다.”

 

* * *

카일이 개인 전령의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적 소탕으로 처리…….

좋다. 좋은데…….

보고된 전투의 결과가 심상치 않았다.

아서 이 자식……. 오러 쓴 거 아냐?


“…….”

아서가 너무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객들한테 경고를 전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자신이 지켜야 하는 무방비한 레이디가 곁에 있다는 걸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무사해?”

“네. 아서 경이 전투를 하는 동안 군의 보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카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안 되었다.

아무래도 오러의 부작용을 없앨 방법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으니까.

카일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카일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저를 지키고 있는 근위병들을 쓱 훑어보았다.

* * *

그리고 개선군을 마주한 카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크리스티나는 조금 곤란한 듯이, 하지만 태연하게도 미소 지으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카일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입니다.”

카일은 그때까지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뭔가 장난을 치는 건가?


“……네? 어. 누구시라고요?”

크리스티나는 어색해하지도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크리스티나 폰 데어 줄리어스입니다. 아서 경의 아내요.”

“…….”

카일이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가 녹슨 양철 허수아비처럼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이 없는 아서를.

다음으로 복잡한 얼굴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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