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 꿈에 (151/210)


#151. 꿈에
2023.02.09.


아서가 미소 지었다.


“금방 다시 뵙게 되었군요. 결국 이렇게 모시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함께 출발했으면 좋았을 것을요.”

아서는 평소와 똑같이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아그네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오러가 맞나? 상태가 왜 저렇지?

은빛 오러가 아닌 어둡고 붉은 기운이 아서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오러는 기본적으로 빛이다.

그 밝기나 색이나 형태가 달라진 적은 있어도 빛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서의 오러는 빛이라기보단 어둠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공기 중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침식하며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오러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어두운 늪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그네스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그가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고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듯한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아니……. 아니다. 그랬다면 너무 황실과의 혈연을 과시하는 걸로 보였을 거야. 그래서 따로 가기로 한 거기도 하고.”

아그네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지금은 같이 가도 괜찮게 된 것 같구나……. 내가 널 번거롭게 했어. 예상치도 않게 도적 소탕까지 하게 돼 피곤하겠다.”

아서는 개의치 않고 옅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대모님. 괜찮으시다면 바로 저희가 모시고 싶은데요. 지금 출발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아그네스가 놀랐다.


“바로?”

트리스탄은 눈을 움직여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시선이 테일러 로렌슨에게 조금 더 길게 머물고 있었다.


“…….”

이곳에는 이오나와 레이나가 머물고 있다.

다른 곳에 몸을 숨길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눈치채선 안 되었다.

그래서 아서는 빨리 그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겠니? 병사들에게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개선식에 참석하라는 황명도 있고요.”

하지만 트리스탄은 빨리 떠나야 한다는 말에 차마 동의하지 못한 채 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숲에 매복한 자객들을 무서운 속도로 처리했다.

오러를 썼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일반적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과 속도로 자객을 찾아내고 죽였기 때문이었다.

말릴 틈은 없었다.

그가 정리한 자객의 수는 황태자가 보낸 서신 속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았다.

그 결과, 지금 아서의 시력 상태는 트리스탄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

더 심각한 것은 자객이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서가 이 이상 오러를 쓰게 두어서는 안 됐다.

더 무리한다면 빛조차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

다행히 아그네스가 그를 말렸다.


“개선식 때문이라면 폐하가 일정을 늦춰 주셔서 괜찮단다. 수도에도 우리가 도적을 만난 이야기가 전해져서……. 폐하께서도 네가 나한테 올 걸 짐작하셨는지 아서는 일주일 정도 늦는 걸로 생각하면 되겠냐고, 시간이 더 필요하면 편히 이야기하라고 전언을 보내셨다. 네가 도적들을 소탕한 걸 흡족하게 여기신 모양이야.”

“!”

트리스탄은 순간 안심이 되어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패트리시아와 대화하던 크리스티나가 옆에서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조금 머물고 정비한 뒤에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할머니가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수도에 더러워진 마차를 타고 들어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

개선군은 도적 잔당을 소탕할 때까지 잠시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 * *

패트리시아의 별장 저택에 찾아올 때마다 사용하는 자신의 방에서, 크리스티나는 시가를 태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

테일러 로렌슨이 아서에게 생각보다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외면하는 듯한…….


“…….”

이곳에, 레이나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크리스티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시가를 끈 뒤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는 드레스를 입고 촛대를 든 채 방을 나섰다.

패트리시아가 마틸다의 ‘하녀 장부’에서 지워진 하녀들을 남몰래 거두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방문한다는 소식 없이 훌쩍 여길 찾아왔을 때, ‘제거된’ 것으로 알고 있던 하녀 두엇이 황급히 숨는 걸 본 적 있으니까.

올가가 할머니의 명령을 받았군, 생각하고 묵인했었다.


“…….”

패트리시아는 크리스티나가 아주 어렸을 때 집을 나갔다.

대외적으론 장성한 아들을 혼인시킨 패트리시아가 건강 문제로 요양을 하러 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주가 된 자신의 아들, 안토니오와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간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패트리시아와 오랫동안 함께 산 적은 없었지만, 종종 할머니를 찾아와 별장에 며칠씩 머물기도 하고, 가문의 일이나 부모님의 싸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패트리시아는 크리스티나에게 사교계의 이야기를 해 주었고, 종종 도덕적으로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크리스티나는 패트리시아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역량으로 지금의 줄리어스를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할머니를 존중했다.

한 가문을 이끄는 안주인으로서 배울 점이 있는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도 사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패트리시아의 방식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존경하지는 않았다.

패트리시아는 비효율적으로 구는 데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촛대를 들고 조용한 밤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

레이나가 이곳에…….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줄리어스에서 일하다가 위험에 처한 하녀들을 수집하는 할머니의 착한 취미의 연장.

어머니도 올가도 할머니의 관리 아래로 들어간 하녀들에게는 관여하지 않으니까.

레이나나 테일러가 그걸 알고 여기 의탁하러 왔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할머니가 레이나를 관리해 준다면 자신에게도 썩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가 관여했으려나.

글쎄.

할머니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애가 여기 있는지 확인하고…….

크리스티나는 바닷바람에 삭아버린 저택 바닥이 삐걱거리는 것이 거슬려 발소리를 죽이고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패트리시아의 침실 앞에 도달한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침실에 이미 선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 대부인 병이라던데. 건강이 안 좋다고 자네가 말하긴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패트리시아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마님. 굳이 소식을 듣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

하녀장 올가 허스트였다.

패트리시아가 이마를 괴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굳이 전하지 말라 했지.”

그리고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나를 못 알아보더구나. 기분이 이상했어.”

패트리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이오나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크리스티나가 문밖에 멈추어 섰다.

* * *

아픈 레이나와 그 곁을 지키는 이오나, 브로디에게 패트리시아의 하녀들이 다가와서 귀띔해 주었다.


“줄리어스의 사람들이 저택에 와 있으니 한동안 나가지 마세요. 큰마님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암묵적으로 관여하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마주치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당신들도 줄리어스 저택에서 달아난 거 맞죠?”

이오나가 조용히 레이나의 곁을 지키고, 브로디는 하녀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마리나는 초조하게 서성이다가, 자신이 기다리던 하녀가 밖으로 나오자 두 손으로 붙들었다.


“엄마야!”

“쉿!”

마리나가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붙잡힌 사람은 브로디였다.

브로디가 눈을 크게 뜨고 반가워하며 마리나의 손을 잡았다.


“마리나, 이야기 들었어! 축하해!”

하지만 마리나는 좋은 남자를 만난 기쁨을 표현하거나 멋쩍어하는 대신 창백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브로디의 손을 잡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초조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짐을 받듯 말했다.


“브로디, 너, 완전히 줄리어스 등지고 나온 거 맞지?”

“으, 응?”

브로디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마리나가 애타는 기색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 줄리어스랑 상관없는 거 아니야? 내가 부탁하면 크리스티나 아가씨 귀에 안 들어가는 거 맞냐구!”

“어? 어……. 어? 그, 그렇지?”

브로디의 대답에, 마리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숨 가쁘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 검붉은 물이 필요해. 아가씨에겐 비밀로 해 줘. 너한테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테일러한테 부탁해도 괜찮으니까…….”

“뭐?!”

브로디는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곤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너 그분이랑 결혼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하녀들이 너 팔자 폈다고, 기사님이랑 결혼하고 하녀장 될 거라고 얘기하던데…….”

마리나가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그래 보려고 했는데…….”

마리나가 눈물을 훔치더니 마구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어……. 아무리 잘해 보려고 해 봐도 우리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뿐이야. 아가씨가 날 이용하고 나 때문에 기사들이 다 곤란해하고 있으니까 볼튼 경도 내가 계획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어느 정도는 사실이 돼 가고 있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애를 낳고 결혼을 해?”

마리나가 울면서 말했다.


“못 해. 못 하겠어. 나 하녀장 안 해도 괜찮아. 나 그냥 여기서 그만둘래.”

아가씨는 쉽게 그만두게 해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가 없다면 볼튼 경이 날 버려 줄 것이다.

* * *

레이나는 꿈을 꾸었다.

아서가 그녀를 찾아온 꿈이었다.

열이 오른 채 침대에 누워 있던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거 꿈이군요.

아서 경은 크리스티나 아가씨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던데

눈이 마주치고도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당신을 찾아내면 안 되니까.

어디 가지 않는지 지켜봐야 해서.

그런데 많이 보고 싶어서

그냥 왔어.

레이나가 슬프게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

말이나 못 하면.

아서가 피식 웃었다.

누가 할 소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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