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늦은 후회
(147/210)
147. 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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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늦은 후회
2023.01.26.
패트리시아는 로널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여자는 앞으로 내가 직접 만나요. 당신이 만나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요. 그게 이 일을 덮어 주는 내 마지막 조건이에요.”
로널드가 거부하면 어쩌지.
이 남자가 그 알량한 불륜에 미쳐서 나를 저버리면 어쩌지.
나는 내 인생과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당신이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면 나랑 살 의향이 없는 걸로 알겠어요.”
차라리 거부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주장해.
한 번만 그 여자를, 네 딸을 보게 해 달라며 애원해.
네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그러나 로널드 줄리어스는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용서해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개자식.’
패트리시아는 이미 로널드가 자신과 결혼한 후 자신을 속이고 이오나를 만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이오나의 뺨을 쳤을 때, 로널드가 달려가서 그 여자를 감쌌더라면.
비참했을망정 저 남자가 이렇게까지 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그의 진정한 사랑은 내가 아니었다며 실컷 울고 떨쳐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용서해 줘서 고맙다며 저에겐 나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음으로 추해 보였다.
나는 인간도 아닌 것을 사랑했구나.
이미 패트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이건 어떤 대답이든 패배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순진한 내 남편’은 자신이 씌워놓은 환상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패트리시아는 제가 보길 바라는 모습으로 로널드를 보아 왔던 것이었다.
* * *
면전에 돈도 뿌려 보았고, 찻물도 끼얹어 보았고, 모멸감을 느낄 만큼의 폭언과 함께 으리으리한 집도 주어 보았다.
하지만 이오나는 릴리의 치료비 이상의 돈은 받지 않았다.
이오나는 묵묵히 딸을 치료하고, 자신이 영위했던 삶과 똑같은 수준의 삶을 이어갔다.
로널드 줄리어스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지 않겠다는 듯이.
당연히 패트리시아에겐 굳이 가서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안겨줄 이유가 없었다.
멍청한 것.
고생해 보라지.
네가 그런다고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줄 알아?
패트리시아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자들을 붙여 그들을 감시했다.
* * *
패트리시아는 이를 악물고 사이 좋은 귀족 부부를 연기했다.
완벽하게 사교계의 평판을 관리하고, 이전과 똑같이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웃으며 저택을 통솔하고 자식을 교육했다.
자신의 삶을 저런 인간 때문에 진창에 처박을 수는 없었다.
사교계는 물론이고 자식에게마저 철저하게 숨겼다.
내 자식에게 정통성의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소한의 하녀들에게만 도움을 받았으며, 철저하게 이오나를 감추었다.
높은 주급을 주며 입이 무겁고 품위 있는 하녀만을 고용하도록 하여 저택의 품격을 높였고, 그러면서도 진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으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패트리시아의 평판은 지켜졌다.
줄리어스는 패트리시아가 일군 대로 괜찮은 귀족 가문이라는 인식을 얻었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은 지옥 같았지만, 겉보기에 패트리시아의 삶은 나쁘지 않게 유지되었다.
패트리시아의 핍박과 경멸과 억압을 감당하면서도 이오나는 약속을 지켰다.
이오나는 그 누구에게도 줄리어스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 릴리에게마저도.
그것이 패트리시아가 아픈 릴리를 치료해 주는 조건이었다.
몇 번이고 하인이나 해결사들을 위장시켜 함정수사를 하고 이오나의 속내를 떠보았지만.
이오나는 정말로 로널드를 만나려 들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릴리의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오나는 정말로 철저하게 입을 닫아 패트리시아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녀를 어찌할 그 어떤 핑계도 찾을 수 없게.
이오나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고 그녀를 시험하고 의심하며, 패트리시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이오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고개 숙인 이오나의 고고한 자존심과 독하도록 무거운 입은 패트리시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패트리시아에게 정작 가장 큰 두려움을 준 것은 그녀의 딸이었다.
릴리.
내 남편의 사생아.
아니, 차라리 온전히 사생아였으면 이렇게 그녀를 미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을.
사생아에게는 상속권이 없었다.
그것은 정실부인과 적자들이 사생아와 피의 다툼을 벌이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지켜지는 규칙이었다.
그러나 릴리가 혼외자라는 건 패트리시아만의 주장일 수 있었다.
이오나는 결혼을 했으니까.
사제가 참관하지 않으면 귀족의 혼인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누가 먼저 결혼했느냐’의 문제는 사제의 참관보다 더 강한 정통성의 증거로 여겨질 수 있었다.
패트리시아는 절대 릴리와 안토니오를 두고 그런 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오나는 릴리에게도 아버지를 밝히지 않고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지만, 릴리가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을 진창에 주저앉힐 수 있다는 것은 패트리시아를 무시무시한 스트레스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릴리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렇게 될 것이었다.
릴리가 자라날수록 패트리시아는 그 아이를 두려워하며 미워했다.
그 아이가 안토니오의 것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누군가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아내고 자신을 ‘두 번이나 세컨드 레이디’라는 비웃음거리로 전락시킬까 봐.
내 인생을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릴까 봐.
릴리를 죽여야겠다는 충동마저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패트리시아는 반쯤 미친 채 올가를 부르는 데까지 갔다가.
끝내 그녀를 붙들고 무너져 울면서 그만두었다.
올가.
내가 미쳐서 기어이 그 애를 죽이라 명령하거든.
너는 이 모든 증거를 가지고 가서 나를 고발해.
나중에 내 명령이 변하더라도, 넌 지금의 이 명령만 기억해.
난 그깟 남자 때문에 괴물이 되진 않을 거야.
그깟 배신 때문에 완전히 망가지지 않을 거야.
이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 * *
이오나가 그렇게 고고하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내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완벽한 패배였다.
사랑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패트리시아는 이오나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지고 싶지 않았다.
* * *
채 그를 다 미워하지 못했는데.
로널드가 죽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미워했는데도 일말의 애증이 남은 것일까.
이렇게 빨리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좀 더 죗값을 치러 주길 바랐다.
이렇게 허무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랑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장례식에 가며 패트리시아는 이오나와 릴리를 막으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오나도 릴리도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패트리시아는 감시자들을 불러들여 이오나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장례식에 가기는커녕 추모용 촛불 하나 켜지 않았고,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
정말 이오나가 한때는 로널드를 사랑했을까?
나는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나는 로널드가 죽고도 이렇게나 너와 네 딸에게 집착하고 있는데.
이오나는 정말로 감정 따위 없는 사람 같았다.
* * *
처음으로 이오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건 릴리가 아비 없는 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이오나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듯 보였다.
릴리.
내가 너에게 보여준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패트리시아는 이오나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때 패트리시아는 비로소 이오나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
저들을 향해 온갖 저주를 다 했는데…….
하나도 통쾌하지 않았다.
* * *
그리고 릴리가 죽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녀장 올가를 통해 처음으로 들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앨빈 로렌슨과 짐을 통해 두 번 세 번 확인하고서도 패트리시아는 믿지 못했다.
패트리시아의 안에서 릴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릴리가 정말 죽었다는 것을, 패트리시아는 완전히 무너진 이오나의 모습을 보고서야 받아들였다.
패트리시아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
「아이는 제 전부예요.」
이오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 애를 미워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 애를 저주해서 릴리가 죽은 것 같았다.
릴리가 무슨 죄가 있었을까.
그 애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 * *
로널드가 죽은 후 이오나와 나누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너 정말 독하다. 그래도 친부 장례식인데. 딸은 와 봐야 하지 않았어?」
「애들 눈치가 얼마나 귀신 같은데 거길 데려가요.」
「안 오는 게 더 수상했을걸? 내가 남편을 떠나보냈다는데 가 보지도 않냐고 묻지 않아?」
「릴리가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아요.」
「…….」
「……자식새끼 키우는 게 정말 마음 같지 않네요.」
「그걸 이제 알았니? 나보다 오래 애를 키웠으면서도 나을 게 없구나.」
「…….」
「차 맛이 쓰레기 같아. 일부러 이딴 식으로 떫게 내리는 건가?」
「그걸 이제 아셨어요? 눈치채셨으면 우리 집 차 좀 그만 축내세요. 댁에 차가 없으셔서 여기까지 오시는 것도 아닐 텐데.」
「…….」
이오나와 패트리시아는 거지 같은 세상과 빌어먹을 로널드, 망할 자식새끼들을 욕하는 말 외에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둘은 안부를 묻지도 않는 사이였고, 대놓고 까칠하게 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로 미운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 * *
“할머니. 바람이 차요.”
이오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방 안으로 데려가려던 레이나가 패트리시아를 발견했다.
그 아이가 너무 릴리를 닮아서 패트리시아는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숨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레이나가 얼른 할머니의 옷깃을 여며주고는 패트리시아 앞으로 나와서 손을 모은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대부인.”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제대로 인사를 올리지 못했어요.”
공손하게 앞으로 손을 모으고 있지만 긴장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
하필이면 살자고 달려온 곳에서 나를 딱 만났으니 긴장이 되기도 하겠다.
영지에서 납치 실종돼 안토니오가 이 애를 찾고 있었다지.
아니면 혹시, 나와 이오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래서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
패트리시아는 무표정하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묻고 싶었다.
너, 나를 아니?
이오나가 너에게, 나에 대해 말했니?
내가 네 할머니를 무척이나 괴롭혔단다.
네 어머니도 말이야.
너 그걸…… 알고 있니?
“……아, 저, 저희 할머니세요. 할머니, 인사드려요……. 후작 대부인이세요.”
허둥지둥하며 이오나를 제게 인사시키려는 레이나의 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모르는구나.
그래. 이오나가 독한 줄을 내가 익히 알지.
이오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구나.
로널드가 죽고. 릴리가 죽은 후에조차.
패트리시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렴. 아프신 거 안다.”
“아, 네. 대부인.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패트리시아는 잠시 이오나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시선을 돌려 릴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릴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패트리시아에게 레이나는 릴리의 망령으로 느껴졌다.
“…….”
패트리시아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마주 보며 그 애를 낳은 여자아이를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 릴리는 아직도 소녀일 뿐인데.
그 애가 자라서 아이를 낳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소녀가 낳은 아이는 이만큼 컸고,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 붙들려 있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