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남자를 다시 믿다니
(146/210)
146. 남자를 다시 믿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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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남자를 다시 믿다니
2023.01.22.
“마님…….”
시중 하녀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가득이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듯했다.
패트리시아는 지친 빛으로 턱을 괸 채 빙그레 웃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라니. 조용히 살겠다고 이 별장에 틀어박혔는데 클라인 공자에 아그네스 님에…….”
“…….”
하녀가 슬프게 웃으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만 괜찮은 척 말하려던 의욕이 사라진 패트리시아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 입단속 해 주렴. 미워도 내 아들인데. 가문에 먹칠을 할 순 없잖니.”
“네, 물론이죠…….”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단속하겠다면서 덧붙이던 하녀가 이내 입을 다물고 조용한 침묵으로 패트리시아를 위로했다.
패트리시아는 담담하게 스스로를 추스르고 물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전해 주렴. 그래도 다들 내 저택에 방문한 손님들인데.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구나.”
“네, 마님.”
하녀는 패트리시아에게 이오나가 대부인 병에 걸려 기억이 성치 않다는 테일러의 말을 전해 주었다.
“…….”
그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정말?
“…….”
나라면 절대 잊지 못할 텐데.
패트리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님?”
“보러 가야겠구나.”
“그 사람들을요?”
“그래.”
하녀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패트리시아는 담담하게 하녀를 마주 보았다.
“펄 공작 부인도, 렘브란트 경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집주인으로서 만났다. 더욱이 테일러는 앨빈의 아들인데 그들만 계속 만나지 않으면 피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거야. 더욱이 대부인 병에 걸린 노파라는데.”
패트리시아가 피식 웃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구나. 어떻게 안 만나 볼 수 있겠니. 만나는 편이 자연스럽다.”
“……네, 마님!”
시중 하녀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기묘한 각오로 불탔다.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패트리시아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얼이 빠져 있다가,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 *
정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나를 위해 모르는 척해 주는 건 아닐까.
그 이오나가 대부인 병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는 건 아닐까.
펄 공작 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
하녀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대부인 패트리시아는 복도 저편에서 사람의 인영을 발견하고 멈칫 멈추어 섰다.
릴리?
패트리시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패트리시아는 릴리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저기 서 있는 아가씨는 그 애의 딸이며, 자신의 평생을 옭아맨 연적은 그 옆에 있는 나이 든 노파라는 것을 깨달았다.
“…….”
패트리시아는 급격히 세월을 실감했다.
문득 부채를 쥔 손등의 주름과 검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했다.
패트리시아는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 * *
젊은 날의 로널드 줄리어스는 제법 반반한 머저리였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 눈은 이국 전설에 나오는 아름다운 미소년 나르키소스 같았고, 다혈질적인 성격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열정을 간직한 청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단 몇 마디 만에 돈 자랑을 시작하고 마는 놀라운 인성과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나는 얄팍한 교양은, 과연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입을 열 때마다 망언 리스트를 갱신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가 새 망언을 할 때마다 극소수의 피해 당사자를 제외한 사교계 사람들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부채로 입을 가리고 킥킥 비웃으며 즐거워했고, 패트리시아 역시 그런 그가 웃겼다.
당연하게도 귀족들은 아무도 그런 천박한 멍청이를 원하지 않았다.
주제에 눈은 높아서 늘 거절만 당하면서도, 줄리어스의 젊은 가주 로널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며 분노해 더욱 돈 자랑에만 열을 올리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쯤 되니 좀 안 됐고, 멍청하긴 하지만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성공적으로 데뷔탕트를 치른 교양 있는 레이디 패트리시아는 결혼 시장에서 손에 꼽히게 인기가 있는 귀족 영애였고, 역시 사교계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는 남자와의 혼인이 결정되었다.
품위 있고 매너가 넘치는, 좋은 가문의 번듯한 남자였다.
패트리시아는 괜찮은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눈에 사랑에 빠진 여자와 결혼하게 된 기쁨을 표현하며 패트리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그러나 상대는 껍데기만 멀쩡한 가식덩어리였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들켰다.
결혼식장에 난입하여 결혼을 깽판 놓은 만삭의 내연녀로 패트리시아의 결혼은 식장에서 무효가 되었다.
신랑의 실체는 낱낱이 까발려졌고, 패트리시아는 사교계의 다이아몬드이면서도 남자 보는 눈이 없어 최악의 결혼 실패를 겪었다는 낙인을 찍혔다.
부당한 평가와 뜨거운 가십의 주인공이 되었음에도 레이디 패트리시아는 그녀의 부모 이상으로 의연하게 대처해냈다.
사교계는 그녀의 품위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며 남자를 욕하고 패트리시아를 칭찬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패트리시아의 결혼 시장에서의 가치는 ‘파혼한 여자’로 재편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번듯한 남자’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패트리시아는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다.
또다시 기막힌 망언으로 그녀를 오랜만에 웃기는 머저리 같은 남자를 보며, ‘저런 남자’라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리라 믿고, 심지어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오. 당신만 해도 아무한테나 혼인 신청을 하고, 혼인 거절을 밥 먹듯이 당하면서도 나한테는 청혼하지 않잖아요?」
대충 그런 반농담조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자신 없는 태도로 그녀를 보지도 않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데, 당신 같은 여자가 나랑 결혼해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투덜대는 말이, 상처받은 패트리시아의 가슴을 두드린 것이었다.
* * *
사랑은 눈을 멀게 만들었다.
교양쯤이야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교양이 없고, 나에겐 교양이 있으니 괜찮지 않은가.
대신 그는 가르치는 걸로 어찌 되지 않는 훌륭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찍 부모가 돌아가셔서 덜컥 어린 나이에 후작이 된데다 챙겨 줄 친척 어른도 없어 품위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
부모가 남겨 준 사업과 영지를 악착같이 건사하기 위해 그런 재수 없고 왈패 같은 성격이 된 것이 가엾기도 했다.
돈 버는 감각만은 기가 막힌 것은 기특하게도 느껴졌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으니 바람은 피우지 않을 것이다.
과분한 결혼을 한 그는 나에게 감사하고, 나의 사랑에 보답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 * *
가끔 너무 재수가 없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이 있었다.
멀쩡하게 입 다물고 파티장에 서 있게만 해도 ‘레이디 패트리시아를 만나더니 저 망나니가 몰라보게 변했다.’, ‘사람이 되었다.’, ‘제법 신사 태가 나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괜찮았나?’ 하는 평가가 돌아왔다.
쌓아 놓은 평판이랄 게 없어서 일구는 족족 성과가 되는 것도, 매섭게 단속하고 교육해 사람들 앞에 그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놀란 얼굴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여자의 평판이 결혼에 귀속되고 가문과 남편의 평판이 아내의 평판이 된다면, 내가 내 남편을 끌어올리면 된다.
결국 혼인 실패로 ‘저런’ 상대와 결혼했다고 동정을 산다면, ‘번듯한’ 남편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만이다.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쌓여 있는 역량을 믿었다.
사교계가 진심으로 패트리시아 줄리어스를 존중하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 실패의 추문과 가십을 딛고, 직접 그런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하더니 그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어 ‘귀족 가문’으로 일으켜 세운 레이디.
그녀는 ‘로널드 줄리어스’를 인간으로 만들고, ‘줄리어스’를 진정한 귀족의 출발선상에 세운 공을 인정받으며 사교계 최고의 명사가 되었다.
패트리시아는 훌륭하게 해낸 듯했다.
* * *
처음에는 ‘순진한 내 남편’을 믿었다.
멍청하긴 해도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가식을 모르고, 그런 걸 숨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몇몇 증거가 나온 다음에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말도 안 되는 여자가 내 남편을 유혹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데 어떤 남자가 버틸 수 있겠는가 하는 망상도 했다.
저런 외모에, 재력에, 내가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인성에.
너무 매력적인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남편에겐 자기를 추앙해 주는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었을 텐데.
내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자책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사실들과 끼워 맞추며 받아들이려 애썼다.
귀족이 정부를 두는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는 내게 미안하니까 차마 말을 못 해서 숨긴 것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아내가 아니니까.
그를 번듯한 귀족으로 만들어 내고, 아들을 낳아 주었고, 가문을 ‘귀족 가문’으로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아내니까.
차마 말을 못한 거다.
그 여자에겐 미안하고 불쌍하니까 마음 주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지.
합리화하려 애썼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패트리시아는 자기 자신과 가문의 평판을 생각해 그 모든 사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입들을 단속시켰다.
지난 파혼의 경험으로, 그녀는 ‘실패한 결혼 추문’이 개인과 가문의 평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죄가 없어도, 내가 아무리 개인으로써 유능하고 교양이 넘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여도.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녀는 사교계에서 재기 불가능하다.
한 번 속으면 실수지만 두 번 속으면 멍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를 실제로 만난 다음에는 세상이 저를 놀리는 것 같았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로널드 줄리어스를 빼닮은 그녀의 딸 릴리가, 자신의 아들 안토니오보다 나이가 많았다.
“…….”
내가 두 번째야?
이 내가?
패트리시아 줄리어스가 세컨드라고?
천박하고 돈을 밝히는 뱀 같은 여자와 우격다짐을 해야 할 거라는 각오와 달리, 작은 체구에 청순하고 수수한 인상의 ‘이오나’는 어린 딸을 안은 채 차분하게 패트리시아를 응시하며 침묵했다.
마치 그쪽이 본처인 것처럼.
다만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자신이 배신당한 증거를 내밀 뿐이었다.
“…….”
증거를 확인한 패트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보다 먼저 ‘결혼했다.’
단지, 혼인성사를 사제가 정식으로 주관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것뿐이었다.
조용히 그녀의 말이 시작되었다.
“……제가 남편이라 믿었던 사내에게 버림받았고, 당신이 그의 정실부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뭔가……. 권리를 주장하러 온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에게도 나름대로 속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음을 헤아려 주세요.”
“…….”
연하늘색 눈동자가 담담하게 가라앉은 채 패트리시아의 흔들리는 눈을 마주 보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아이가 아픕니다. 돈이 필요해서 왔어요.”
“…….”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전부예요. 돈을 받아야겠어요. 그를 만나게 해 주세요.”
자신보다 먼저 결혼했고, 아이까지 있으면서.
얼마든지 이 추문을 공개해 그를 빼앗고 나를 진창에 빠뜨릴 수 있으면서.
그 차분한 태도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담담한 말이, 아직 채 상처를 수습하지 못한 패트리시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패배감을 선사했다.
그녀가 첫 번째였다고?
저쪽이 아니라 내가 바람 상대라고?
세상이 핑핑 돌았다.
용납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배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 패트리시아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분하게도 아직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패트리시아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가문과, 당신의 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전 제 딸만 살릴 수 있으면 돼요.”
그녀가 로널드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이성이 끊겼다.
패트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오나의 뺨을 쳤다.
“거짓말하지 마! 그런다고 내 남편을 만나게 해 줄 것 같아?!”
그녀를 진창으로 끌어내리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 * *
그들은 같은 배신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뼈아픈 자존심의 상처와 분노는 그것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가슴으로 인정하게 되는 데에 수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