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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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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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저 사람은……?
2023.01.19.
놀란 하녀들이 달려가서 그녀를 일으켜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쳤어요?”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여자의 후드 아래로 피투성이 금발이 쏟아져 흔들렸다.
대부인, 패트리시아는 그녀에게 위험해 보이는 수상한 점이 없는지를 빠르게 눈으로 훑어 확인했다.
지금은 70살이 넘은 노부인이지만, 패트리시아는 젊은 시절 귀족 사교계의 한가운데서 온갖 일을 다 겪은 사람이었기에 상대를 확인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여자는 다급하게 하녀를 붙들고 부탁하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가족들이, 일행들이 있어요. 부탁드려요. 사례할게요! 숲속에 제 가족이 남아 있어요!”
하녀에게 사정하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패트리시아는 곧바로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하녀 하나가 후다닥 몸을 돌려 별장에서 사람들을 더 불러오기 위해 달려갔다.
패트리시아에게 안겨 있던 고양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내려가더니 바구니로 들어가 고개만 내밀었다.
하녀들이 여자의 몸을 털어주고 피와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적을 만났어요? 쫓기고 있어요?”
여자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마차가 습격을 당했어요.”
“다친 것 같은데 일단 따뜻한 곳으로…….”
“아니에요, 저는 안 다쳤어요. 여기 있을게요. 그보다 제 일행들이…….”
“아. 이, 일단 이거 덮어요.”
하녀들이 여자의 몸에 모포를 둘러 주었다.
곧 하녀가 저택의 경비병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패트리시아의 지시를 받은 경비병들이 숲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민이라는 걸 알아본 패트리시아가 걱정스럽게 그녀와 그녀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숲길을 지나다가 도적들에게 마차 강도를 당한 건가?’
일단 지금은 위험에 처해 있는 듯한 그녀의 일행들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숲에서 습격을 당했는데 이 사람만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면, 다른 일행들은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패트리시아는 굳은 얼굴로 숲 쪽을 바라보았다.
“…….”
하녀들은 안타까워하며 여자를 보살펴 주었다.
처음엔 하녀들 모두가 그녀를 평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억양과 익숙한 몸가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일행이었던 호위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고 패트리시아 일행에게 감사를 표하자 하녀들은 당황했다.
그녀의 일행들은 평범한 무사나 용병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된 수준 높은 기사들이었다.
한 손으로 말을 이끌며 칼을 든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여자의 안전을 확인한 뒤, 패트리시아가 보낸 호위 무사들과 빠르게 섞이며 협력해 함께 숲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귀족인가?’
이 정도의 기사들을 호위로 대동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상당한 재력가이거나 귀족일 텐데…….
수도의 데뷔탕트에 가는 사람들?
“…….”
한때 사교계의 중심에 있긴 했지만, 그런 사교 행사에 나가지 않은 지도 20년이 넘은 패트리시아로서는 젊은 귀족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무 명이 넘는 실력 좋은 호위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드는 것을 보고 패트리시아는 일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집안 사람이지?’
새삼스럽게 하녀들이 수건으로 닦아 준 금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핏기없이 창백함에도 드러난 젊은 여자의 얼굴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디서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는 사람의 친지일지도 모르겠는데.
바스락.
“……?”
그때, 숲속에서 호위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한 귀부인이 나타났다.
놀란 패트리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않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며 그녀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그네스 공주님!”
오랜만에 옛날의 이름을 불린 아그네스는 조금 놀라 시선을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패트리시아가 숨을 들이켜며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자수정이라고 칭송받던 눈. 비단 같은 흑발.
오랜만에 본 것이지만 틀림없었다.
30년 전.
패트리시아가 줄리어스 가문의 본가 저택을 관리하며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황제가 결혼하기 전까지 모든 황실 행사에서 황제의 곁을 지키던 황제의 누이, 아그네스 루사익이었다.
아그네스는 순간적으로 패트리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그녀 역시 10대의 젊은 시절의 기억 속에서 당시 로널드 줄리어스의 부인이었던 사교계의 유명인사를 떠올리고 그녀의 옛 이름을 불렀다.
“……줄리어스 후작 부인?”
애타게 자기 가족을 찾던 레이나가 뒤에서 그 이름을 듣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패트리시아는 놀라워하면서도 절제된 표정으로 아그네스의 앞으로 나서서 완벽한 예법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네, 공주님.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네요. 오랜만인데도 알아봐 주시니 황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아그네스 공주님이란 소리에 하녀들이 놀란 얼굴로 자세를 바로 고치며 퍼뜩 섰다.
아그네스라면 북부의 안주인인 펄 공작 부인이 아닌가?
그들은 후작 대부인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높은 귀족은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그네스가 대부인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세상에, 부인. 일어서세요. 정말 오랜만이군요. 우리를 도와주어서 고마워요. 아, 내가 호칭을 실수했군요. 이미 후작 대부인이 되신 지 한참일 텐데…….”
“별말씀을요. 오랜만에 젊은 시절의 이름으로 불리니 좋네요.”
패트리시아가 빠르게 말했다.
“한데 이게 다 무슨 소동인가요?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분은요?”
“아, 일단. 우리 일행들 안전을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때, 숲 쪽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레이나!”
그녀의 가족인 듯한 젊은 남자와 노파가 나타나자 여자는 뛰쳐나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녀가 무사히 가족을 찾았다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나……. 레이나.”
달려온 남자가 걱정하다 못해 속이 다 탄 얼굴로 그녀의 안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호위로 보이는 기사들이 뒤이어 가까이 가서 서로의 안전을 확인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네, 없어요. 여러분들은…….”
“다 괜찮습니다. 전부 가벼운 상처예요. 하지만 레이디. 레이디께서 제일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저흴 위해서 그러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서 떨어지지 않으시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자가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뛰어나가면 어떡해!”
“미안해……. 나 괜찮아. 정말이야.”
그리고 패트리시아는 뒤에서 굳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레이나……라고?’
패트리시아는 뒤늦게 앨빈 로렌슨의 아들, 테일러 로렌슨을 알아보았다.
패트리시아의 가장 가까운 측근 하녀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하녀가 당황한 듯 살짝 패트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패트리시아는 내색하지 않은 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 하녀도 얼른 모르는 척을 했다.
패트리시아의 앞에 서 있던 아그네스가 레이나를 향해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저의 대녀입니다. 신의 가호가 있어 저 아이가 대부인을 만났네요.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
그러나 말을 잃은 후작 대부인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패트리시아의 눈은 레이나의 뒤에 있는 노파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녀들이 가져다준 모포를 후드처럼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노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에 쓴 모포 아래로 약간 드러난 입매와,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의 십자 흉터가 패트리시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후작 대부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오나.’
네가 어떻게.
평생의 연적이자, 동병상련의 동료이자, 그녀에게 뼈 아픈 패배감과 비겁한 승리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던 상대.
패트리시아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같은 나이임에도 자신보다 20년은 더 늙은 듯한 그녀의 멍한 눈빛은 패트리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 * *
모든 일행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하녀들은 일행들 가운데 클라인 공자, 렘브란트 경이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렘브란트가 대부인에게 예를 표했다.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대부인.”
대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요. 많이 다친 사람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입니다. 그대가 카를 클라인 공의 아들이군요.”
“저희 아버님을 아십니까?”
아그네스가 웃으며 슬쩍 끼어들었다.
“세월이 흐른 걸 이렇게 실감하는군요. 젊은 귀족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사교계에서 마흔이 넘은 귀족 중 줄리어스 후작 대부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교계의 보석이었죠.”
패트리시아가 민망해하며 겸양했다.
“이젠 그저 나이 든 노부인일 뿐입니다.”
아그네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에서 존경받는 귀족 노부인에 대한 존중이 묻어났다.
후작 대부인이 사교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인물이었고, ‘상인’으로 무시당하며 귀족 취급을 받지 못하던 줄리어스 후작가를 ‘귀족’ 가문의 반열에 올렸다는 평판은 렘브란트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패트리시아는 큰 소동을 겪은 이들을 위해 말을 마무리해 주었다.
“두 분 모두 놀라셨을 텐데, 오늘은 푹 쉬세요. 누추하지만 제 별장에서 마음을 놓고 쉬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는 조금 더 쉰 다음으로 미루지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대부인.”
렘브란트와 아그네스가 미소 지었다.
* * *
테일러가 아버지의 은인인 그녀에게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패트리시아는 의사인 그는 부상자들을 돌보아야 하니 나중에 보자며 배려하여 돌려보냈다.
레이나 역시, 인사는 나중에 나누어도 되니 지금은 푹 쉬라는 말을 해 주었다.
레이나는 거듭 부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대부인은 익숙한 미소로 침착하게 감정을 숨겼다.
* * *
패트리시아는 레이나와 펄 공작 부인 일행에게 자신의 별장에 거처를 내주었다.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의 별장은 여느 귀족의 본가 저택보다도 거대해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었다.
파티도 열지 않고 한가로이 지낼 뿐인 그들의 별장에 이런 귀빈과 많은 손님들이 몰려온 일은 처음이라 하녀들은 긴장했지만, 그들은 노부인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의 침착한 지시와 안내를 실수 없이 수행했다.
* * *
클라인 공자 렘브란트와 황제의 누이 펄 공작 부인이 수도로 향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당해 가까운 줄리어스 대부인의 별장 저택에서 잠시 머물며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소문은 수도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고 아서의 군이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