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 황후 마리아 (143/210)


#143. 황후 마리아
2023.01.12.


수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줄리어스로 찾아오던 사람들과, 수도의 사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황제의 초대를 받고 모여 있는 평범한 귀족들은 같지 않았다.


“…….”

후작과 후작 부인, 안토니오와 마틸다 줄리어스는 종교 행사를 명목으로 열린 연회장에 앉은 채 조용히 와인을 마시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사교 모임 금지는 사실상 곧 끝나는 상태였다.

신년제에 참여하기 위해 수도에 모인 귀족들은 서서히 교류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 년 동안 귀족 혼인이 금지되었던 것은 실수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기에, 황실도 그들의 사교 활동이 시작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녀를 데려와 소개하거나, 서로 인사 올리고 싶다는 다른 귀족들을 데려와 지인에게 소개하는 등 일상적인 교류를 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어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

비록 그들이 아서의 개선식 전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며 타운하우스의 문을 걸어 닫긴 했지만, 이렇게 나와 있으면 눈치껏 우리에게도 다가올 법하지 않나?

줄리어스에서 뜨거운 관심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다가 수도에 와서 예상치 못한 무관심 속에 앉아있자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곧 열릴 개선식과 신년제의 주인공이 줄리어스인데.

줄리어스가 선제후가 된 걸 저들도 모두 알 텐데 어째서?

지나가는 귀족들을 붙들고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 묻고 싶었다.

우리가 저 체면 차리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기엔 너무 콧대를 세운 건가?

방문을 막지 말 걸 그랬나?

그들의 자리는 연회장의 상석에 해당하는 선제후 석에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육 년 전 참여했던 사교 행사 때보다 줄리어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수는 적어졌다.

안부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소개 받고 싶어 하는 귀족이 있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오거나 교류하고 싶어 하는 듯한 사람들은 없었다.

예전에는 안면이 있었던 귀족들도 오랜만에 뵙는다, 많은 경사가 있으신 것 축하드린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다며 몇 마디만 나누고 떠났다.

마틸다와 안토니오는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이 어색해서 그들이 떠날 때마다 말을 걸어 잡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애썼다.

상인처럼 보이지 않는 고위 귀족의 태도에 대한 집사장의 꼼꼼한 가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 내외는 아슬아슬하게 벽의 꽃 신세가 될 듯 말 듯 한 분위기 속에서 어색함을 견디었다.


‘텃세 부리는 건가? 상업에 열 올리는 고고하지 못한 귀족이 선제후가 됐다고…….’

너무 격이 높아져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거라기엔, 반대편에 있는 그들의 경쟁자 마이어스 대공은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소개 제안과 방문을 받고 있었다.

마틸다와 안토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불편한 분위기에서 주인 내외의 속내를 눈치챈 집사장이 슬쩍 목소리를 낮추어 조언했다.


“두 분께 이제 미혼 자녀가 없으시니까요.”

“응?”

집사장이 속삭였다.


“대부분 데뷔탕트에 참석하라고 초대받은 귀족들입니다. 사교 시즌은 자녀들의 혼인 상대를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류도 그걸 중심으로 흘러가고요. 오 년 동안 그게 막혔으니……. 부모들이 다급할 겁니다. 아시지요?”

“아.”

안토니오가 심각한 얼굴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크리스티나가 ‘전쟁에 나간 약혼자만 있는’ 미혼의 레이디로 알려졌을 때는 확실히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었다.

제국 제일 대부호의 외동딸이며 외모는 동시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기의 신부였으니까.

크리스티나를 두고 상사병에 걸려 앓아누웠다는 귀족가의 영식들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이제 크리스티나는 전 제국에 결혼한 여성으로 알려진 것이다.

집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두 분에게는 이제 귀족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미혼 자녀가 없으십니다. ……사업상의 교류만 가능한 상대이니 혼인 상대로 가능성이 있는 다른 귀족들보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합니다. 그냥 다가오기에는 너무 격이 높아지셔서 함부로 다른 귀족을 소개하기엔 부담이 되는 면도 있고요.”

“음…….”

집사장의 합리적인 설명을 이해하고 나자 자존심이 상했던 마음은 나아졌다.

대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크리스티나의 혼인으로 가문이 무척 큰 이득을 보았기에 안토니오는 더더욱 자신에게 미혼 자녀가 하나뿐이라는 점이 아쉬워졌다.


“두 분께서 그렇게 다가가기 힘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다가올 겁니다. 특히, 아서 경이 도착해서 개선식을 하면 달라지겠죠. 지금은 분위기를 모르니 눈치들을 보는 것 같네요.”

“음.”

“지금은 다들 자녀의 데뷔탕트 파트너나 혼인 상대를 물색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과연 그렇겠군.”

안토니오와 마틸다는 함께 집사장 짐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와 중요한 집안 이야기를 나누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 줄 시간이 없는 척했다.

그걸 알고 집사장도 일부러 더 길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주인어른이나 마님께 누구를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도 생길 겁니다. 물론 감히 그런 사사로운 부탁을 후작님께 해도 되나 같은 걸 신중히 고민하겠지만요.”

후작의 표정에 여유로운 미소가 돌아왔다.


“우리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닌데, 허허. 사람들이 줄리어스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나 보군.”

눈치 있는 집사장은 그들이 듣고 싶지 않을 이야기에는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어련히 두 분도 알고 있겠지?

그동안 후작님이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미혼인 척, 곧 약혼자가 전사할 테니 사윗감을 다시 구할 예정인 척 흘리고 다녔던 것이 귀족들에게 얼마나 괘씸하게 보였을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마리아 황후가 시녀를 보내 그들과 따로 인사를 나누고 싶다며 안토니오와 마틸다를 부른 것이었다.

그들은 반색을 하고 일어나면서도 바짝 긴장했다.

마리아 황후는 정치적으로 아서를 견제하리라 생각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 *

마리아 황후는 인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 인망은 황제의 바람기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황제의 무능을 보조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판에서 왔다.

지금의 황제인 그레이엄은 존경 받던 선황제, 알렉산더 루사익 2세의 아들이라는 후광으로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여자가 관련된 여러 추문과, 외교, 군사 문제에서 보여준 무능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결정적으로 마리아 황후의 만삭 때 터진 황제의 사생아 스캔들로, 알렉산더 루사익 2세의 후광에서 비롯된 제국민의 사랑은 황제에게서 마리아 황후와 카일 황태자에게로 옮겨갔다.

루사익의 인망은 전무후무한 영웅인 선황제의 후광으로 유지되는 면이 강했고, 무능한 지금의 황제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제 결정권이 선제후에게 있는 제국에서 그것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이 마리아 황후였고, 결과적으로 제국민들은 황제는 몰라도 마리아 황후와 카일 황태자만은 좋아하게 되었다.


 
추문의 주인공으로 존재감 없이 사교계에서 멸시당하던 황제의 사생아, 아서가 전쟁 영웅으로 급부상하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후작 내외가 들어서자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금발의 황후가 웃으며 그것을 덮고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후작, 후작 부인.”

일어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서류에 붙어 있던 눈이 그녀가 얼마나 바쁜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칼같이 서류를 덮고 일어선 순간부터 그녀는 시선을 그들에게로 향하며 외교적이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예를 올렸다.


“황후 폐하. 이리 불러 주시니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남도 아닌데. 수도에 계시는 동안 자주 뵈면 좋겠군요.”

마리아 황후가 웃으며 손을 마주치고 그들을 환영해 주었다.


“집무실로 불러서 미안해요. 내가 이제 그대들을 편하고 가깝게 여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폐하.”

빙긋 웃은 황후가 존중이 느껴지는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편히 앉으세요.”

틀어 올린 머리에서 가느다란 목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 몇 가닥이 위엄있는 황후를 자연스럽고 청순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직접 제 손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소탈하게 행동하는 황후는 그녀에 대한 모든 어두운 소문들이 음해로 느껴질 정도로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다과가 나오고, 황후와의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수도로 오는 여정은 괜찮았는지, 선제후 회의는 즐거웠는지, 날이 부쩍 추워졌는데 잘 지내는지 같은 안부 대화가 오갔다.

그레이엄 황제와 함께 만났을 때도 나눈 인사치레였지만 황후가 사석으로 따로 불러 묻는 안부는 공적 만남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줄리어스 영지는 근래 어떤지, 렘브란트가 그려 주기로 한 선제후 초상화는 어찌 되었는지, 크리스티나와 아서는 어떤지.

얼마간 여러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자 황후가 소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좀 늦은 이야깁니다만, 황실과의 혼인에는 만족하고 있나요? 계약 때문에 곤란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안토니오와 마틸다가 깜짝 놀라며 얼른 입매를 한껏 끌어올려 가식적으로 웃었다.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어찌 감히 만족을 따지겠습니까.”

황후가 조금 사이를 두고 웃었다.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물러나 있었습니다만, 저도 근래 뒤늦게나마 계약서를 보았습니다. 후작으로서는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아서 경이 그렇게 잘 해낼 거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흠칫할 정도로 핵심을 짚는 말이었지만, 직전에 능숙하게 쌓아 둔 부드러운 분위기로 인해 그건 산뜻한 사위 칭찬 같기도 했고, 사정을 아는 사람의 솔직한 위로 같기도 했다.

마틸다는 그 말에서 황후가 무언가를 던져두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안토니오의 대답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하하……. 아닙니다. 잘 되었으니 다행이지요.”

황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분쟁이 있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아서와 여러 가지로 분쟁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게 아니어도 그 계약서를 제안한 건 황실이었고 후작이 직접 거기에 사인했다.

그러니 감히 황후에게 계약서 때문에 분쟁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황후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실과의 계약이라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게 있을까 봐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운 조항들도 있는 듯해서. 줄리어스 후작 입장에서는요.”

자연히 ‘전쟁에서 현저한 공을 세울 경우 후계자가 가주와 동등한 가문의 공동 지배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떠올랐다.

당연히 후계자와 가주 사이에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조항이었다.

황후는 그것이 괜찮은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아서가 전사할 경우 혼인은 없던 걸로 하고 지참금은 전액 반환한다’는 뻔뻔한 조항에 대응하는 항목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불리한 조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덜컥 받아들인 것으로 느껴져 후작은 뒤늦게 속이 쓰렸다.

그러나 황후는 대답을 꼭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던 듯, 그저 빙그레 웃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아 기쁘네요. 수도의 귀족들이 살갑지 못한 데가 있죠? 루사익도 그 시기를 거쳤습니다. 앞으로 종종 이렇게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군요.”

 

* * *

그들이 떠난 후.

시녀들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황후가 물었다.


“개선군은 어디까지 왔어?”

“출발한 지 일주일 되었습니다. 12월 중순과 말 사이에 무리 없이 도착할 듯합니다.”

“렘브란트 경과 아그네스 님은?”

“막 출발하셨습니다. 여자 쪽 일행과 함께요.”

“아 그래?”

툭.

황후가 걸쳤던 두꺼운 드레스를 떨어뜨리고 다른 옷으로 옮겨가는 사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네.”

똑똑.

밖에서 시녀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후가 웃으며 머리를 풀고 한쪽으로 모아 내리며 새 옷을 걸쳤다.


“응,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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