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보답받지 못해도
(140/210)
140. 보답받지 못해도
(140/210)
#140. 보답받지 못해도
2023.01.01.
이상하다.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테일러는 하녀장 올가 허스트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녀장은 선하다곤 하기 어려웠지만, 후작의 횡포가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도록 한 번씩 중간에서 막아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하인들과 하녀들을 보살펴 주는 일을 하는 앨빈 로렌슨과 테일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을 전부 거절하는 대쪽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면 후작은 진작에 하녀장을 내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일은 유능하게 다 처리해 주면서 정말로 심한 일에만 합당한 이유를 들며 제동을 거는 정도였기에 후작도 후작 부인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신뢰하며 많은 일을 맡기고 있었다.
그것이 집사장 짐이나 로렌슨 선생보다 하녀장이 후작가의 많은 비밀에 관여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하녀장이 때로 ‘선하지 않은 일’을 수행하는 것도 ‘정말 심한 일’이 있을 때 막기 위해 그러는 것이리라고 테일러는 내심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은 것으로 느껴졌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테일러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자, 테이블 앞에서 이마를 짚고 앉아 있는 그의 아버지 앨빈 로렌슨이 보였다.
“…….”
앨빈 로렌슨은 순식간에 20년은 늙은 것으로 보였다.
앨빈 로렌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애랑 꼭 얽혀야겠니? 아비가 이렇게 부탁해도?”
그의 눈은 붉어져 있었고 이마와 눈가에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버지.”
앨빈 로렌슨이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데려온 사람을 반대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녀를 데려온대도 감싸주고 싶었다. ……나는 네가 데려온 아이를……, 행복하게 맞아주고 싶었다.”
그의 목울대가 일렁이고, 마지막 목소리가 갈라지며 소리치듯 힘이 들어가는 것에서 그의 끓는 마음이 드러났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잖니.”
“…….”
이미 앨빈 로렌슨은 그의 인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독한 말을 다 했다.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 것 같니.’
‘네가 그 애랑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니?’
‘그 애가 불쌍해서 그러니? 불쌍하다고 네 인생을 적선할 거니?’
‘네가 뭐가 모자라서. 어떻게 그런 애를.’
“…….”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도 레이나한테 그런 일이 있길 바라지 않았어요. 그 애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에요. 반대로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포기하셨을 수 있으세요?”
앨빈 로렌슨의 얼굴에 불덩이 같은 노기가 떠올랐다.
“이 몹쓸 자식이 어디서 그런 예를 들어!”
“…….”
“끔찍한 소리 마라! 설령, 내가 당사자였어도 난 상대 남자 입장을 생각했을 거다!”
“아버지, 레이나도 그런 사람이에요.”
앨빈 로렌슨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네가 그 염치없는 애를 감싸주려고 드는구나! 거짓말하지 말거라!”
“정말이에요. 어머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사실 레이나는 아버지가 하신 모든 말을 똑같이 다 했어요. 저를 몇 번이나 거절했고, 정을 떼는 잔인한 말도 했고, 미안하다며 울었고, 아버지가 한 그 모든 말을 하면서 저에게 유예를 줬어요. 다시 생각해 보고, 제발 달아나라면서요.”
앨빈 로렌슨이 벌게진 얼굴로 씨근덕거렸다.
“그럼 너는 왜 멍청하게 이러고 있어!”
“전 이미 레이나를 저에게서 분리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오래됐어요. 동정심으로 생긴 마음도 아니고, 아플 걸 알아도 이미 어떻게 그 상처를 보듬어야 할까를 생각하지, 거둘 수는 없는 마음이 돼 버렸어요.”
테일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줄리어스를 떠날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지만, 아버지가 받아들일 수 없으시면 전 받아들이겠습니다.”
“…….”
테일러는 자신의 작위와 하사받은 영지를 증명하는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나 앨빈 로렌슨은 그것을 보는 대신 테일러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 떠나? 나를 두고…… 여길, 줄리어스를 떠나?”
“…….”
앨빈 로렌슨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테일러는 묵묵히 아버지를 마주 보다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더 반대하실 것 같아서 이 말을 안 하고 싶지만, 레이나는 아직도 절 안 받아주고 있어요. 그 애는 내내 절 거절했어요.”
테일러는 잠시 틈을 두고 시선을 내렸다.
“지금 레이나가 저를 반쯤이나마 받아준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제가 그냥 이대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에요. 제가 내내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릴 거라는 걸 알아서요.”
그리고 테일러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도망갈 시간이라면서 반년 유예를 주더라구요. 자기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 후에도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약속하라고요.”
“…….”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버지. 전 제가 상처받을 게 두렵지 않아요.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게 두렵고, 끝내 그 애가 받아주지 않고 절 거절할 게 두렵죠.”
앨빈 로렌슨이 애통해하며 가슴을 쳤다.
“내가…… 내가 너를 너무 순진하게 키웠다는 게 후회가 되는구나. 차라리 여러 사람들을 사귀어도 보고, 만나도 보게 했어야 하는 것을.”
“…….”
그가 간곡히 말했다.
“테일러, 아들아. 젊은 날의 열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결정은 네 평생을 좌우할 거다. 너는 그 애 하나 때문에 평생 곱씹을 상처를 감내하고, 평생을 뿌리내리고 살아온 곳까지 떠나서,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니? 그 애를 선택해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여길 떠나서?”
테일러는 물끄러미 앨빈 로렌슨을 보다가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하고의 추억은 저도 소중해요. 하지만 어머니도 아닌 ‘어머니하고의 추억이 있는 곳’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
“저는 오히려 반대예요. 그 추억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이만 떠나서 저희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
“아버지. 저는 줄리어스에 매여서 살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도 그걸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평생 후회할 길은 레이나를 선택하는 데에 있지 않아요. 그 반대에 있어요.”
테일러가 정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최선을 다하게 해 주세요.”
* * *
레이나는 눈이 붉어진 채로 아그네스의 앞에서 한동안 울었다.
“제가 너무 바보 같아요.”
“…….”
아그네스가 우는 레이나를 묵묵히 토닥여주었다.
레이나는 한동안 울음을 삼키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이렇게 부인께 위로를 받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자책하지 말렴. 그리고 대모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잖니.”
아그네스는 그녀에게 양부모를 알아봐 주겠다고 하며 자신이 레이나의 대모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아서에게 해 준 것과 비슷한 호의를 베풀겠다는 의미였다.
아서와는 실제로 혈연이 있었으니 대모가 되어 준 것이고, 레이나는 처지가 딱해 동정심으로 해 주는 것일 테니 그 이유는 달랐지만, 레이나로선 무척 과분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아그네스가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해 주었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꾸나. ‘대부인 병’은 불치병이야. 하지만 중독 때문이라면 너희 할머니는 회복하실 수도 있어. 그러니 오히려 희망이 있는 거 아니니.”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먹였다.
“……약을 너무 오래 드셔서 걱정돼요.”
“괜찮다, 레이나. 나으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테일러 군이 유능한 의사잖니. 닥터 로렌슨의 해독제는 북부에서도 유명해. 그 사람 해독에 일가견이 있잖니. 테일러 군도 그 가르침을 받은 의사인데다 무척 할머니를 아끼니까 잘 치료해 드릴 수 있을 거야.”
섣불리 희망을 가졌다가 실망하면 크게 마음 아플 거라는 걸 알면서도 레이나는 마음속으로 작은 희망을 느꼈다.
할머니와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작은 희망보다 레이나가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자책감과 원망, 배신감이었다.
마음이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레이나는 후작 부인이 계속 간병인과 치료비를 보내주는 것을 두고, 편찮으신 할머니를 계속 신경 써 주신다고 생각하며 오래도록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오히려 할머니를 낫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후작가였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괴로웠다.
후회와 무력감으로 레이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화가 나니 눈물이 났다.
“……후작가를 믿은 제가 너무 바보 같아요.”
“작정하고 속이는 사람을 무슨 수로 당하니.”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그네스는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도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레이나의 오러가 이상했다.
언제나 눈부시게 레이나의 몸에서 쏟아지던 오러가 불안하게 일렁이며 어두운 기운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
괜찮은 걸까, 레이나는.
그리고 아서는…….
아그네스는 레이나를 계속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와 지속적으로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
왠지 아서에게 레이나가 필요한 일이 반드시 한 번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서 때문에 레이나를 지켜보기 시작했고, 아서 때문에 레이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아그네스는 어느새 진심으로 레이나와 그녀의 할머니를 염려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줄리어스를 고발하고 합당한 벌을 줄 수 없어서.”
레이나는 눈물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아니에요. 저도 바라지 않아요. 이제 아서 경이 줄리어스의 주인이 되실 테니까……. 그럼 그런 일이 없겠죠. 그냥 할머니만 나으시면 돼요.”
그리고 아그네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대모님.”
아그네스는 묵묵히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레이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모님께서 이렇게 다정하신 분일 줄 몰랐어요. ……다들 엄격하고 냉철하신 분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거든요.”
“…….”
역시 소식지는 다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이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내심 레이나의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
사실 레이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정하거나 의지가 되어 주는 어른이 아니었다.
요사이 많이 드는 생각이었다.
‘아서에게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 주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이나가 문득 그녀를 불렀다.
“저, 대모님.”
“응?”
레이나가 짧게 머뭇거리다가 어딘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아서 경 건강에 대해서…… 들으신 거 있으신가요?”
아그네스가 멈칫하며 굳어졌다.
“……뭐?”
이 애가…… 왜 그런 걸 묻지?
아그네스 역시 내내 의심하고 있었지만, 아그네스는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아서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알았다. 정말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대모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오러에 문제가 있지 않냐고까지 물었지만, 아서는 무리하여 쓰지 않기 위해 자제하는 것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설령 문제가 있어도, 오러의 이상은 둘이 헤어지려는 중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짐작하고 받아들이던 상태였다.
실제로 아그네스는 아서에게서 특별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나는 초조해하며 스스로의 손끝을 만졌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색하게 둘러대며,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수도로 가시는데…… 혹시라도 아프시면 안 되니까요. 선황제 폐하께서도 건강이 안 좋으셨으니까……. 혹시나 해서요. 아서 경의 대모님이시니까…….”
레이나가 불안한 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얼굴이었다.
“……저한텐 말씀을 안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