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 금단 (139/210)


#139. 금단
2022.12.29.


문을 두드린 사람은 렘브란트였다.

레이나가 문을 열어 주자 그가 눈을 깜박이곤 미소로 인사했다.

렘브란트는 테일러에게 그곳으로 가 달라는 언질을 듣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별생각 없이 온 것이었다.

렘브란트가 집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주변에 제 개인 호위 기사들 데려와서 지키게 해 두었습니다. 이동해도 됩니다.”

렘브란트는 개선식을 신경 써야 하는 기사도 아니었고, 개인 호위나 하인을 자연스럽게 대동할 수 있는 데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펄 공작 부인이 줄리어스에 머물기 시작한 후 렘브란트는 공작 부인을 자주 방문하고 있었기에 렘브란트가 외출이 잦은 것을 저택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종종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 무슨 일 있나요?”

렘브란트는 아서와 레이나가 침묵하는 걸 보며 물었다.

* * *



“…….”

렘브란트는 심각한 얼굴로 자객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서를 향해 물었다.


“……공개적으로 조사하실 겁니까? 개선식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렘브란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황태자 전하에게만 따로…….”

아서는 거절했다.


“카일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

렘브란트가 고민하듯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연락해 주길 바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 보신다고…….”

“외람되지만 이런 일에선 황태자 전하보다 제가 낫습니다.”

“…….”

그건 맞는 말이었다.

황태자 카일은 포로로 잡힌 사람이고, 아서는 그런 카일을 구해온 사람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걸 효율적 표현이라고 해야 하는지 퍽이나 겸손한 표현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렘브란트 경께 그런 부탁을 드렸다면 마리아 황후 폐하를 염려한 이야기였을 겁니다. 전하께서 마음 써 주셨군요.”

“……그쪽에서 뭔가 유의미한 움직임이 포착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염려하신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따로 말씀드리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높은데 괜히 카일이 뭘 알아보려다 제게 무슨 일이 있다는 이야기만 역으로 흘러 들어가면 오히려 불편한 암시만 줄 겁니다.”

아서가 싱겁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났을 때 불편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곧 만날 테니 필요하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렘브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아서 경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수도로의 여정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서는 대답 없이 시선을 내리며 어깨만 으쓱했다.

조금도,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문제없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따로 도와줄 게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서의 일은 아서가 알아서 할 것이다.

렘브란트는 분위기를 환기하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님 약은 찾으셨습니까? 가지고 움직이면 될 것 같은데요.”

“아…….”

레이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나의 시선이 아서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

아서는 레이나를 보지 않은 채 렘브란트를 바라보며 그녀를 맡기는 통보를 했다.


“그럼 렘브란트 경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선식에 합류해야 해서 이만.”

“네.”

레이나의 표정이 흔들렸다.

하지만 레이나는 끝내 그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렘브란트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서가 개선식 준비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면, 보내 주어야 했다.

아서는 개선식의 주인공이며 거기에서 빠질 수 없다.

아서는 떠나기 전, 레이나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가 아닌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

아서가 미소 지었다.


“즐거웠습니다. 평안하시길.”

레이나는 그에게 처음 듣는 말에 동요했다.

레이나는 그것이 ‘작별 인사’임을 알았다.

그가 끝내 그동안 말해 주지 않았던 것.


「저 테일러랑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저희 여기까지만 해요.」

 
그 말에 비로소 돌아온 대답이었다.


“…….”

그가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레이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심장이 덜컥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가 입 맞춘 입술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나요?

내가 그런 걸 물으니 이제야 작별 인사를 해 주시는 건가요?

내가 뭔가 당신이 말해 주고 싶지 않은 걸 캐물으려 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어요?

왜 입 맞췄어요?

왜 지금…….


“…….”

하지만 레이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개선식.

아서가 떠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녀는 멍하니 그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아서가 손을 놓고 돌아섰다.

아까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며 입 맞추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아서는 렘브란트에게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레이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아서가 돌아오면 자신은 이곳에 없다.

레이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내 몸부림치던 심장이 멈춘 기분이었다.


 
꿈에서 본 모습이 다시 그의 뒷모습 위에 겹쳐졌다.

아서가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그가 어둠 속에서 눈을 가린 채 빛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 *



“아서 경은 언제 떠나세요? 수도로 가시는 일정이 정해졌나요?”

뒤늦게 다급해져 묻는 말에 렘브란트가 조금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모르셨군요. 개선식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개선군의 영지 순회가 줄리어스에서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레이나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렘브란트 경은……요? 공작 부인께서 아직 저희 집에 계시는데…….”

“아서 경은 개선군을 통솔하셔야 해서 공작 부인을 정식으로 에스코트하실 수 없으니까요. 개선군은 먼저 출발하고, 제가 따로 아그네스 님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마차만 타고 가면 되니 금방 갑니다. 더 늦게 출발해도 아서 경보다 먼저 도착할 겁니다.”

“…….”

레이나는 갑자기 발밑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 * *



“오래 걸렸네? 할머니 계속 열 있으셔. 왜 이렇게 늦었어?”

아그네스가 문을 열어 주며 걱정스러운 타박을 했다.

그들을 보살펴 주겠다던 아그네스는 생각보다 자주 레이나를 찾아오며 그들을 신경 써 주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나의 등 뒤에서 렘브란트가 빙긋 웃어 인사하는 걸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테일러 군이 렘브란트 경이 됐네?”

레이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테일러가 아버지를 만나서요.”

아그네스는 거기서 어느 정도 상황을 눈치챘다.


“……약초 가지러 갔다가?”

레이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서 좀…… 시간 걸릴 거 같아요.”

“저런. 분위기 안 좋던?”

“…….”

아그네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그네스는 레이나에게 적당한 북부 귀족을 소개해 주어 양녀로 입적시키고 그녀에게 안전한 준귀족 신분을 만들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줄리어스의 주치의였고, 아서와 대신 결혼한 레이나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다면 그의 아버지 입장에선 신분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레이나는 가져온 약초를 식탁 위에 풀어 놓았다.

그리고 멍하니 약초를 내려다보았다.

아그네스가 도와주려는 것인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약초에 손을 뻗었다.


“아, 이 약초는……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응?”

레이나는 자객 때문에 이 약초가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원래 괜찮은 핑계가 떠오르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레이나가 딱 입을 다물고 마는데 아그네스가 약초를 뚫어져라 보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니……. 이거……?”

“네?”

“해열제로 쓸 약초를 가져온다고 하지 않았니? 이건 해열제가 아니라…….”

레이나가 얼떨떨하게 그녀와 약초를 보고 반문했다.


“이게 뭔지 아세요?”

끼익.

문이 열렸다.

테일러가 돌아왔다.


“레이나.”

그의 시선이 그들 사이에 있는 약초로 떨어졌다.


“……?”

아버지와 이야기는 잘했냐고 물을 시간은 없었다.

약초를 본 테일러의 표정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레이나?”

“응?”

“그게 네가 말한 약초야?”

아그네스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건 약초가 아니야. 진통 효과가 있긴 하지만 중독성이 있어서 북부에선 쓰지 않는 독초란다. 북부에선 타민이라고 불러.”

레이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독초……요?”

아그네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오나 할머니가 그동안 이걸 드셨니? 독성이 강하진 않지만 이건 심하게 중독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데…….”

그러나 테일러가 레이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느낀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가 서서히 하얗게 질리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럴 리가……. 이걸 쓰면 할머니 상태가 항상 좋아졌었어요. 열이 나도 바로 가라앉았었는데……! 못 주무시다가도 이걸 내린 차를 드시면 편하게 주무셨단 말이에요……!”

“…….”

테일러가 굳은 얼굴로 레이나가 가져온 약재, 타민을 바라보았다.

이걸 약재로 쓰는 일이 있기는 했다.

어쨌든 급할 때 편하게 쓸 수 있는 진통제니까.

그것이 로렌슨의 약 창고에 독초가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그네스의 말대로, 이건 오랫동안 복용하면 기억 문제를 동반한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독초였다.

레이나는 이걸 해열 효과가 있는 약초라고 잘못 알고 있었고.


“…….”

이오나 할머니가 이 약초에 중독되어 있다면 일정 기간 섭취되지 않았을 때 할머니의 상태가 나빠지고 자주 열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몸이 스스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독’을 시도할 때 열이 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레이나도 한동안 복용했던 검붉은 물을 스스로 해독시키는 과정에서 자주 열이 있었다.

그리고 약초가 효과가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할머니의 병세가 의존하고 있는 약을 섭취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금단 증상이었다면.

어쩌면 이오나 할머니는 대부인 병이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

독성이 심각한 약초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의존성과 장기 섭취했을 때 올 수 있는 착란 증상이었다.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염증이 계속해서 재발하는 이오나 할머니의 증상이 떠올랐다.

전부 타민의 중독 부작용, 그리고 약이 끊겼을 때 일어나는 금단 증상과 연관이 있었다.

테일러는 일단 어쩔 줄 모르는 레이나를 진정시켰다.


“걱정 마. 많이 해로운 약초는 아냐. 대부분의 독초는 약초로 쓰는 경우도 있고, 이것도 그런 약초야. 진통제로 썼다고 생각하면 돼. 중독되었다면 천천히 해독하면 되니까.”

“…….”

테일러가 침착하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한테 이걸 약초라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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