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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말하지 않은 것 (138/210)


#138. 말하지 않은 것
2022.12.25.


아서는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약하게 웃었다.


“……알아야 하는 일?”

“…….”

아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대답은 어딘지 좀 허탈해 보였다.

레이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

그의 회색빛 눈은 공허하고, 순간적으로 대답할 듯이 열렸다가, 작은 미소만 스치고 다시 다물리는 입술에는 하지 못한 말이 수백 가지나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웃으며 돌아온 대답은 단정했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일은 없어.”

“…….”

거짓말이야.

레이나는 반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서는 능숙하게 미소 지으며 문 앞에서 레이나를 밀어냈다.

레이나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아서가 나직이 막아서듯 말했다.


“할머니와 당신이 평화롭길 바란다면.”

“…….”

레이나는 멍하니 서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레이나의 앞에서 그가 그녀를 막아서는 모든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레이나를 막아서자 레이나는 그가 말해 주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있다.

본능적으로 그걸 몰라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열면 돌이킬 수 없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나와 할머니의 평안.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였다.


“당신이 하지 않아도 기사들이 와서 조사할 거요.”

“…….”

아서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음만 고맙게 받지.”

“…….”

레이나는 그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침묵으로 그의 대답을 읽었다.

그동안, 일부러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 자신이 떠올랐다.

그래선 안 됐다.

적어도 지금 레이나는 도저히 물러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

떨리는 레이나의 입에선 그녀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제가, 어떻게 그동안 아서 경이 오시는 걸 알 수 있었던 거예요?”

“…….”

레이나가 차가워진 손으로 치맛자락을 틀어쥐었다.


“기척……, 왜 숨기시는 거예요? 절 지켜보시면서도 제가 알 수 없게 하고 계시잖아요.”

“…….”

레이나가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얼마나 자주 오셨던 거예요?”

“…….”

아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 처음으로 다른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신하곤 상관없잖아.”

레이나가 울컥하며 대답했다.


“보내 달라고 했잖아요. 이건 절 ‘보내 주신’ 게 아니에요. 제 일이잖아요!”

“…….”

레이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할머니가 안전하길 바라지만, 모든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면서,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숨어만 있을 테니 지켜달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

숨을 몰아쉬는 레이나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당신, 고생하셨잖아요.”

“…….”

“개선식이 코앞이에요. 지난 5년 동안 사지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곤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동료들을 잃어가면서 보내신 시간에 보상을 받는 순간이라구요. 평생 외면하던 아버지한테 이제야 인정받는 거잖아요.”

“…….”

“당신이 그렇게 고생해서 저는 여기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

레이나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감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당신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어도 당신한테 어떤 식으로 폐 끼치고 있는지는 알게 해 주세요. 뭐라도 하게 해 주세요. 최소한 그건 하게 해…….”

아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레이나를 벽에 밀치고 입술을 겹쳤다.

그의 대답이 그랬듯, 레이나의 저항도 그에게 말과 다른 대답이 되어 주었다.


 


“……!”

레이나가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서는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레이나가 밀어내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입술을 맞물어 열었다.

입맞춤이 깊어졌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인가.

황제가 부르고 나니 허무해서인가.

목표를 잃어버린 것 같아.

황제의 부름을 받으며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쉽다고?’

지난 오 년이 쉬웠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은데도.

오히려 어려운 건.

레이나가 주먹으로 그를 밀며 때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가 밀면 쉽게 밀려나 주었던 것과 달리, 아서는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서가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내가 제정신인지 잘 모르겠어.

똑바로 생각하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힘들어.

상관없지 않나.

카일 황태자도, 라이언 달튼도 그렇다는데.

몇 번이나 가슴과 어깨에 주먹질을 당하고서야 그녀를 놓아주고 조금 물러난 아서가 웃었다.


“……당신도 별로 날 보낸 걸로 보이진 않아.”

낯선 얼굴이었다.

레이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화가 나서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잔뜩 도사린 그녀의 화가 난 얼굴을 마주하며, 아서는 피식 미소 지었다.

저런 얼굴에서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게 무척 아쉬울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화내는 얼굴을 더 선명하게 보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당신이 동요하는지.

알아?

당신이 날 점점 이상하게 만들어.

라이언 달튼 얘기 때문인가.


“얼버무리지 마세요. 저, 다 들을 거예요.”

레이나가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그의 등 뒤의 방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방 안에 있는 것도 확인할 거예요.”

“…….”

그러든 말든.

아서는 하던 말을 잊은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레이나만 보고 있었다.


“…….”

레이나는 그를 피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기분만 나빠질 텐데.”

레이나가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꽤 오래 악몽을 꿀 거야. 기사들도 조사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레이나는 긴장된 마른침을 삼켰다.


“모르죠, 그건. 어차피 기사분들도 단서는 못 찾으셨다면, 저 같은 일반인의 시각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아서가 가만히 레이나를 보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반인이 뭘 알아낼 수 있을 정도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격 미달이야.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런 일을 해. 붙잡히면 자결하지. 그런 사람들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남기지 않아. 당신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

레이나는 그의 말에서 아서가 이미 여러 번 자객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이 자결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도.

아서에게도 자객이 오고 있고, 나에게도 자객이 오고 있다.

그 둘은 별개의 일인가, 아니면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인가.

나에게만 자객이 오고 있다면 아서 경은 나를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서 경에게 자객이 온 것이 먼저다.

내가 있을 때는 자객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시기는 내가 저택을 떠난 이후부터.

나에게 자객이 붙기 시작한 건 그다음의 일.

그럼 가능성이 있는 건…….


“…….”

레이나는 내내 입을 가리고 있던 손등을 내리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저를 노리다가 목숨을 건 사람의 정체도 모르고 밤마다 잠을 설치느니, 그냥 확인하고 악몽을 꿀래요.”

“…….”

레이나는 진지했는데 아서는 뭐가 웃긴지 웃어버렸다.

레이나는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찾는 약이 어차피 이 방 안에 있어요. 들어가야 해요.”

아서는 좀 가벼워진 태도로 물었다.


“약이 꼭 여기에만 있으란 법은 없잖아. 자객이 들었는데 당신이 찾는 약이 무사하리란 보장도 없고. 다른 데서 찾는 게 좋지 않나? 약초 이름이 뭔데.”

“…….”

약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나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사실 이름을 몰라요. 그동안 아는 줄 알았는데, 부탁해서 받았더니 제가 아는 약초랑 다르더라구요. 이름을 잘못 알았나 봐요.”

테일러에게 이미 말했지만 약초를 구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래도 제가 보면 아니까 직접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서가 말했다.


“그래, 그럼. 약은 찾고, 그걸 쓰진 마.”

레이나는 끄덕였다.


“……네. 찾아서 테일러에게 보여 주고 어떤 약인지, 같은 약을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레이나는 아서와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사정만 배려받고 있고, 아서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며 아서가 대답을 회피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나는 자객을 확인하고, 그의 기척을 어떻게 나만 아는 것인지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아서는 레이나의 말을 듣고 뭔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건 확실해?”

“네? 아, 약이요? 네. 가끔 여기서 구했었어요.”

“…….”

아서가 레이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된 약이지?”

“하녀장 허스트 부인에게서요. 열에 좋은 약초라고 한 번 받았는데, 잘 듣더라구요. 그때부터 쭉 썼어요. 할머니에게는 검증된 약이에요.”

“…….”

레이나는 그만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제는 방에 들어가서 자객을 보고, 당신이 감춘 다른 이야기를 마저 듣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서는 자객의 시신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

“네. 고맙습니다.”

레이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아서의 뒤를 따라갔다.

아서는 문을 열고서도 조금 망설이다가 뒤를 향해 말했다.


“한 명 아니야.”

“……네. 몇 명인가요?”

“셋.”

“…….”

레이나는 다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서는 다시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았다.


“정리할 시간 좀 줘.”

“정리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는 잠시 후 아서가 문을 열어 주자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자객은 바닥에 누워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었고,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자객의 뒷목에 있던 칼도 사라져 있었다.


“…….”

조금 떨어진 곳에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이 두 사람 더 누워있었다.


“자세히 보지 마.”

레이나는 생각보다 침착할 수 있었다.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혹시 아는 얼굴일 수도 있으니까요.”

“…….”

아서는 막지 않았다.

천을 들추고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기는 했지만, 레이나는 침착하게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는 앉아 있던 자객이 눈을 감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서가 눈을 감겨 주었는지, 죽은 자객들은 모두 잠든 것처럼 바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

레이나는 자객의 얼굴에서 고개를 들어, 아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레이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

레이나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똑똑.

현관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가 흠칫하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갈랐다.


“계십니까? 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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