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 그 사람이 아니야 (136/210)


#136. 그 사람이 아니야
2022.12.18.



“그럼 왜 내 하녀가 ‘아이 떼는 검붉은 물’을 찾을까?”

“……!”

비록 찔리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사고를 치고 하루 만에 아이가 생길 리는 없었다.

아가씨는 그걸 모르시는 건가?

지레 겁을 먹은 마리나가 허겁지겁 검붉은 물을 수소문한 것은 늦지 않게 그것을 구해다 마신다면 피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밤의 일은 실수였다.

마리나는 하룻밤의 실수로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해받는 것도 싫었다.

수치심보다 그 마음이 더 강했다.

마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직 아니에요…….”

마리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덜덜 떨며 말했다.


“가, 간밤의 일이었으니까, 빨리 검붉은 물을 구해서 마시면…… 임신은 되지 않을 거예요. 거, 검붉은 물에는 피, 피임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

마리나는 말을 뱉어 놓고서 수치스럽고도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고용주의 저택에서 하녀가…….

어느 저택에서든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너무 무섭고 정신이 없어 마리나는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그렇게 금방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알았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일도 없도록 빨리 검붉은 물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조마조마한 두려움 속에서 마리나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매일 자신을 불러 주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근래 크리스티나는 하녀들에게 재평가되고 있었고 인망이 좋았다.

비록 마리나는 여전히 크리스티나가 무서웠지만…….

원치 않게 임신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아가씨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제가 덜컥 아이를 배어 줄리어스 저택의 추문이 되길 원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아, 아가씨…….”

마리나는 다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아름다운 초록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동정을 구했다.


“……검붉은 물을…… 좀 구해 주실 수 없을까요?”

마리나는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부탁드릴게요. 이번 달 급여를 모두 돌려 드릴 테니까, 부족하다면 앞으로 몇 달 치의 봉급을 삭감하셔도 좋으니까, 검붉은 물을…….”

크리스티나가 동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마리나……. 소중한 축복인 아이한테 그래선 안 될 일이지.”

마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설마 실망했다며 너를 내칠까 봐 그러니? 소중한 내 시녀이자 차기 하녀장 후보인 너를?”

마리나는 흠칫하며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차기 하녀장?

마리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리나는 우수한 시중 하녀였기에 언젠가 하녀장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긴 했다.

그건 하녀로서 가장 출세하는 자리였으니까…….

마리나는 하녀장인 허스트 부인에게 시녀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손재주와 미적 감각이 좋아서 아가씨에게 시중 하녀로 자주 불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하녀들이 연차가 쌓이면 차기 하녀장 후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마리나에게 자리를 주겠다는 그 어떤 여지도 준 적 없었다.

마리나는 자기에게 하급 귀족의 신분조차 없기 때문에 가망이 없는 것 같다고 단념하고 거의 꿈을 포기하고 있었다.

대가문의 하녀장은 보통 준귀족이나 젠트리 정도의 신분은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남자가 책임을 안 지겠다고 하던?”

“예?”

마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녀장이 될 시녀라고 하면 기사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네……. 네?”

하지만 여전히 대화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 잡으렴.”

마리나는 당황했다.

그 남자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이름도 모른단 말이야.

하지만 마리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지금 이게 오해라고 해명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크리스티나의 작위적인 상냥함과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이 마리나에게 어떤 신호를 주고 있었다.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마리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하는 위험한 기회였다.

마리나가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아, 아이는 없는데요?”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다리를 꼬고 마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앞으로 네가 하기에 달린 것 아닐까?”

 

 

* * *

이웃 영지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앨빈 로렌슨은 영지 외성에 있는 자신의 약 창고에 짐을 풀고 조심스럽게 저택 근처를 기웃거리며 테일러를 찾았다.

처음엔 며칠 정도로만 예정되어 있었던 출장은 천천히 돌아오라는 테일러와 후작 부인의 편지로 훨씬 길어졌다.

이웃 영지의 맥더프 경은 늘 그에게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청하곤 했기에 그곳에서 더 머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당신이 아서를 만나는 게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 테일러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당신은 한동안 돌아오지 말고 동향을 살피라’라는 후작 부인의 편지는 뭔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앞뒤 정황을 생각해 보니 아서 경이 몰래 레이나와 쪽지를 주고받은 것을 눈치채고 불쾌감을 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크게 문제 될 건 없게 썼지만 기분 나쁠 일이 맞기는 했다.

후작가는 빨리 아서 경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그럼 내 아들도 위험한 것 아닌가?

테일러에게도 후작 내외에게서도 소식이 없었다.

후작가의 기밀인지라 다른 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레이나나 테일러가 어쩌고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하며 고민하던 앨빈 로렌슨은 황제가 아서를 불러들여 그가 곧 크리스티나와 함께 수도로 향할 거라는 소식을 접한 후 줄리어스로 돌아왔다.

수도로 떠난 후작 내외는 자신에게 신경 쓸 정신이 아닐 테고, 테일러의 안위는 자신이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의 분위기가 축제처럼 시끌벅적하고 아서와 아가씨에 대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걸 보니 일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로렌슨 선생은 방심하지 않고 저택 주변에서 하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이내 물건을 나르는 하인들을 만나 테일러가 아서 경의 신뢰를 얻어 자주 불려가며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알려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안 들어가세요? 주치의 선생님 오셨다고 전해 드릴까요?”

다행히 분위기를 보니 돌아왔노라고 말씀드리고 인사를 드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은 저택이 영 바빠 보여서……. 내가 내일 직접 가서 인사드리겠네.”

“예, 선생님. 아, 그런데 요새는 매일 이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서 경을 부르셔서 출발 준비가 한창이거든요.”

하인들이 자기 자랑처럼 너스레를 떨며 신난 모습을 보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테일러, 이 매정한 녀석 같으니……. 아비가 걱정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식새끼 키워 봐야…….’

하인들을 보내고 걸어가던 찰나, 아는 얼굴이 보여 앨빈 로렌슨은 멈추어 섰다.


“마리나?”

나무 밑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던 검은 머리의 하녀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로렌슨 선생님?”

“맞구나! 허허.”

마리나가 두 손을 모아 꾸벅 인사를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앨빈 로렌슨이 눈썹을 꺾어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지었다.


“방금 왔다, 방금.”

아들이 말한 게 누군지 궁금해 슬그머니 하인들의 옆구리를 찔러 얻어냈던 대답이 떠올랐다.

……이 애가 내 아들을 좋아한다지?

테일러가 말한 애가 이 애로구나.

테일러는 저 혼자 좋아하는 거라고 했지만, 아버지인 제가 보기에 하녀라는 것이 탐탁지 않을까 봐 감싸주려고 한 말일 게 뻔했다.

솔직히 썩 흡족하진 않았지만, 아들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마음 졸인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너희가 서로 좋다면 됐지, 하는 마음이었다.

테일러의 어머니인 그의 아내, 로라 로렌슨도 줄리어스의 하녀였다.

그녀와 오래 함께하지 못한 것은 슬펐지만, 함께했던 시간은 아직도 앨빈 로렌슨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테일러가 좋다면 되었다.

건강하고, 사람 괜찮고, 같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아내 생각을 하니 하녀라는 이유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맥더프 경의 집에서 만났던 곱고 사랑스럽던 그 집 영애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앨빈 로렌슨은 아들의 결혼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다스렸다.


“테일러는 잘 지내니?”

“…….”

마리나는 무언가 난처한 듯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테일러가 벌써 이야기를 한 건가?

아버지한테 인사드리자고…….


“…….”

내가 저를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겠구나.

에이그. 테일러도 없이 이렇게 맞닥뜨렸으니 내가 얼마나 어려울꼬.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20년이 훌쩍 넘은 일이지만 생생했다.

아내도 나의 부모님을 처음 만날 때 무척이나 어려워했었지.

지금은 두 분 다 안 계시지만…….

아내가 곁에 없다는 것이 새삼 쓸쓸했다.

그녀가 곁에 있었으면 이 애를 같이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반대했을까?

아니면 축복해 줬을까.

그래도 결국엔 아들의 행복을 빌어 주자고, 당신도 하녀랑 결혼했지 않느냐고 날 설득했겠지.

나를 만나 불행했느냐고…….

그럼 나는 결국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중한 아들이 행복하길 바라니까.

앨빈 로렌슨은 너무 앞서가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불쑥 말했다.


“어려워 말거라. 나는 반대 안 한다.”

“네?”

“네가 테일러랑 결혼하겠다면 반대하지 않겠단 말이다.”

“…….”

마리나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마리나의 눈에 눈물이 차는 것이 보였다.

마리나가 황급히 손을 들어 닦아내었다.

여전히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로렌슨 선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테일러는…… 저를, 안 좋아해요. 저는, 테일……러랑은…….”

“응?”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마리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가, 로렌슨 선생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를 발견한 듯 흠칫하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

앨빈은 어리둥절해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짐을 옮기는 하인들과 기사들 몇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 * *



“들어가 있어.”

“하지만, 테일러.”

“오해 없게 설명해 드릴게. 들어가.”

“…….”

 

 


“???”

앨빈 로렌슨은 테일러가 건물 안으로 밀어 넣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검은 머리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누구더라?

뭔가 익숙한 게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아들놈과 눈이 마주쳤다.

테일러가 침착하게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앨빈 로렌슨은 입이 떡 벌어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 누구라고? 레, 레이나?”

“아버지. 목소리 낮춰 주세요. 레이나가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 돼요.”

앨빈 로렌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새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

이내 그가 기함하며 그의 어깨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야, 야 이, 야 이 미친 녀석아!”

하녀여도 괜찮았다.

누굴 데려온대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아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야.

그런데 그가 염두에 두지 않은 단 한 사람.

레이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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