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손에 닿지 않는 (133/210)


#133. 손에 닿지 않는
2022.12.08.



“왜 거절했어?”

테일러가 물었다.

레이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자신이 널던 빨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무슨 화가야.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네 그림, 정말 재능 있어 보이고.”

“그 정도 아니야. 너야 내가 워낙 잘 아는 얼굴이니까 잘 그릴 수 있었던 거지. 다른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면 금방 실력이 들통날걸.”

팡. 팡.

레이나가 빨래를 털었다.


“…….”

클라인의 차기 가주인 렘브란트 경이 그렇게 안목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뭐 어때. 한 번쯤 새로운 경험도 해 볼 만 하지 않아? 아니다 싶으면 그때 관둬도 되고. 취미로만 남아도 나쁠 거 없잖아.”

“취미로는 지금도 충분해. 교육씩이나 받을 필요 없어.”

테일러가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그림 그리는 취미는 비싸니까.’ 그런 생각 하고 있지?”

레이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솔직히 좀 그렇기도 하고.”

레이나의 말이 이어졌다.


“재능 없으면 괜히 돈 낭비에 시간 낭비, 비싼 취미만 생기는 거고, 설령 잘 돼도 괴로움이나 될 거잖아. 싫어.”

테일러가 반문했다.


“잘 돼도 괴로움이라니?”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귀족이잖아. 그분들은 그림 그린 사람이 누군지도 관심 있어 할 텐데. 날 드러낼 수 있겠어? 게다가 클라인 일가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라면 사교계 한가운데 있게 될 텐데. 줄리어스, 아니면 아서 경이랑 접점이 생길 가능성도 너무 높아. 렘브란트 경에게도 너에게도 폐가 될 거야. 나도 마음 졸이기 싫고.”

팡.

레이나가 주름진 베갯잇을 펼쳐 빨랫줄에 걸었다.


“재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재능이 있으면 있는 대로 문제야. 마음껏 하고 싶은데 못 하면 아쉬워질 거 아냐. 그런 괴로움을 알게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저 막연한 거절이 아닌 대답에 테일러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발을 돋워 빨래를 빨랫줄에 집게로 고정했다.


“괜히 손 닿을 수도 없는 다른 세계를 알게 되면 괴롭기만 해. 안 좋아.”

“…….”

빨랫줄에 고정된 젖은 천이 자신을 흔드는 바람을 잠깐 품으며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레이나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너는 내가 계속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가 갑자기 헛바람 들어 그림을 배우겠다면서 밖으로 돌면 너는 손해 아냐?”

테일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널 모르겠어?”

“응?”

“너 나한테 짐 안 되려고 아등바등 애쓸 거잖아. 난 네가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네 생각이 어떤지는 알아. 넌 최소한 너 자신이 나랑 어떤 면에서든 수준이 맞는다고 생각해야 불편하지 않은 마음이 될 거잖아.”

“…….”

“그래서 난 렘브란트 경 제안이 반갑고, 좋았어. 그걸 하면 네가 스스로를 좀 더 발견하게 되고 행복해질 것 같아서. 네가 진심으로 자기 일에 열중하게 되면 그때는, 좀 더 편하게 날 생각해 줄 것 같아서.”

“…….”

테일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은 아니잖아. 상황이 널 떠밀고 있지. 나야 그 기회를 잡은 입장이지만.”

“…….”

테일러가 미소 지었다.

테일러가 레이나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빨래 위에 집게를 집어 빨래를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림 배워 봐, 레이나. 너 재능 있어 보여.”

“…….”

레이나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마음은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너랑 같이 갈 거야. 다른 데 쓸 시간은 없어. 할머니가 언제까지 계실지도 모르는데. 할머니랑 시간 많이 보내고 싶어.”

“…….”

레이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림은 나중에도 배울 수 있지만, 할머니는 지금뿐이야.”

팡.

레이나는 다시 젖은 침구를 털었다.


 

* * *

제 방으로 돌아온 레이나는 그림을 몇 장 더 그려 보았다.

할머니. 테일러. 케이 경. 펄 공작 부인.

그리고 주변을 지켜 주는 분들을 떠올려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루칸 경. 리오넬 경. 트리스탄 경. 렘브란트 경.


“…….”

공작가의 후원을 받아 화가가 되거나 그림을 배우는 일은 꺼려졌지만, 초상화로 삯일을 해 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좀 즐거울 것도 같고.

운이 좋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신세 지지 않고 내 생계는 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가씨와 아서 경이 수도로 떠난 후에…….

루칸 경에게 부탁해서 평민이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알아보고…….


“…….”

레이나는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얼굴도 그려 보았다.

후작님도, 후작 부인도, 브로디와 마리나도.

아서만 빼고 전부.


“…….”

레이나는 더 이상 아서를 그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노트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날 이후로 레이나는 당황스럽고 후회되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자물쇠로 잠가 버린 후 침대 밑에 감추어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그림을 봤는지, 보지 못한 건지.

봤어도 의미 없다 생각했거나 모른 척해 준 건지.

신경 쓰였지만 그 사람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딜런은 상태가 어떻습니까?”

루칸이 밖에서 테일러에게 묻는 소리가 창을 통해 들어왔다.


“재활을 잘 견디고 계십니다. 기사 분들을 위해 여러 일을 맡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인 후 딜런 경이 회복에 의지가 강해져서요.”

“확실히 걸을 수 있긴 한 겁니까?”

“네. 다행히 걸을 수 없게 된 상태는 아니더군요. 다리 끝까지 가늘게나마 힘이 닿고 있습니다. 약해진 다리가 힘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완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와는 달라서 희망이 보입니다.”

루칸이 조금 기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한 달 안에 걸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빨리는 어렵습니다.”

루칸이 테일러 앞에서 툴툴거렸다.


“……진작 치료를 받게 할걸. 어떻게든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수도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력은 어때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확실하게 눈을 진찰할 수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그것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레이나는 몸을 일으켜 바람이 들이치는 창을 닫고 돌아섰다.

그녀는 테일러가 케이와 협력하며 아서와 딜런을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상태였다.

루칸 경이 테일러에게 종종 딜런 경의 상태를 물었고, 테일러는 그를 위해 재활 운동 기구를 설계하거나 연구하고 있었으며, 자주 해독과 시력 회복에 대한 책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레이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 * *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스크랩북을 알아채지 못하고 아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토리가 흩날리는 금가루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 왔다.

「……앞이 안 보여.」

어리둥절해서 도토리를 주워 들고 몸을 일으키니 벽을 꽉 채운 거대한 혼인 계약서가 바람에 팔락거렸다.

바닥엔 레이나가 첩보를 적어 접어놓은 쪽지들이 수백 개나 쌓여 있었다.

거기 무릎까지 파묻힌 아서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편지를 쓰고 있었다.

「최혜국 대우 잊지 말아요.

추신. 당신 때문에 늦잠을 잤어.」

……아서 경?

그가 레이나 쪽을 돌아보더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보고 싶어서.」

·
·
·



“헉.”

레이나는 흠칫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

꿈에서 스쳐 간 맥락 없는 장면들이 한데 뒤섞여 레이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레이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눌렀다.


“…….”

뭐야…….

무슨 꿈이 이래?

하지만 생생한 꿈이 그렇듯, 레이나는 한동안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헤아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가 드레스를 골라 줬던 날이 떠올랐다.

화장을 지워 주었던 것도.

사생활이니 일기는 보지 않겠다던 말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같이 혼인 계약서도 썼는데.

그 사람은 명사수로 유명한데.

후작님이랑 사냥도 갔잖아.

가끔 다트를 하는 것도 봤는데, 백발백중이었는걸.


“…….”

……우리는 정말로 눈이 마주쳤었나?

같은 글씨를 같이 본 게 맞나?

문득 카일 황태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독버섯 먹고 고생한 적이 있어서.」

 


“…….”

독……?

레이나는 눈을 꽉 눌러 발목을 잡는 위화감을 떨쳐냈다.

딜런 오스본 경이 음독한 이후 시력을 잃어 테일러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있어서도 안 될 일이고.

그에게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설령 그렇대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다.

부스럭. 부스럭.


“……?”

레이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방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할머니?

* * *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가 방 안의 모든 서랍과 옷장을 열어 옷과 짐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헤매고 있었다.

할머니는 짐 틈새에서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할머니.”

레이나는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고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할머니는 옷의 주머니를 뒤지고, 이불 사이를 들추고, 바닥에 내려 놓은 옷을 헤치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레이나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물었다.


“할머니. 뭐 찾아요?”

레이나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 아가. 내. 내…… 내…….”

“응. 할머니.”

“내…….”

그러나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레이나는 웃으며 할머니의 손등에 자신의 손등을 겹치고 달랬다.


“같이 찾아요.”

할머니가 울먹이는 눈으로 레이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가…….”

“응. 할머니.”

레이나는 슬픈 기분을 견뎠다.

할머니가 나갈 수 없도록 문을 닫아두기 시작한 이후.

근래 할머니는 이럴 때가 많았다.

뭘 찾는지 물어도 말해 주지 않고.

할머니 자신도 뭘 찾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집을 나가 늦가을의 산을 헤매며 밤이슬을 맞는 것보다 나아서, 레이나는 아무 불만 없이 옷장에 옷을 채워 두고 할머니가 어질러 둔 짐을 끝없이 정리했다.


“…….”

테일러는 이게 귀족들 사이에서 종종 ‘대부인 병’이라고 불리는 증세와 비슷하다고 알려주었다.

나이가 많은 대부인들이 종종 걸리는 망각병인데, 아마도 연세 때문인 것 같다고.

평민들이나 남자들은 비교적 그 나이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드물기에 잘 발견되지 않고, 주로 연로한 귀족 대부인에게 많이 발병된다고 대부인 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였다.

정신이 가끔 돌아올 때도 있을 테지만, 점점 잊는 날이 많아질 거라고.

노환이라, 치료하는 방법은 없다고…….

펄 공작 부인은 대부인 병에 걸린 어르신을 모시는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봐 주겠다는 말도 해 주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많이 나이 들어서 생긴 일이라는 걸 마음속에선 납득하고 있었다.

레이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웃으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같이 찾아요. 같이. 찾는 게 뭔지…….”

 

* * *



“…….”

아서는 물끄러미 손에 든 반지를 바라보았다.

·
·
·



「먹고 떨어져!」

 
툭.

아서의 몸에 맞고 조그만 금속 물체가 아래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테일러 로렌슨에게 무척이나 상냥하고 부드러우셨던 것과 달리.

레이나와 혼인했노라 저를 소개하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아서에게 몹시도 매섭게 돌변했다.

테일러 로렌슨과 레이나와 함께 있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딴사람이었다.

평소에 비축해둔 힘을 아서를 쫓아내기 위해 다 쓰는 것 같았다.

테일러 로렌슨을 기억하는 데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더니, 할머니는 아서를 한 번에 기억했다.


「내 아가한테 접근하지 마! 이 사기꾼 같은 귀족 놈!」

 

 


「…….」

 
엄밀히 따지자면 사기를 당한 건 접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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