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할 줄 아는 것
(132/210)
132. 할 줄 아는 것
(132/210)
#132. 할 줄 아는 것
2022.12.04.
“…….”
레이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를 위해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을 놓고 있다니.
“아, 죄송해요.”
당황한 레이나의 얼굴이 붉은 한편으로 창백했다.
“잠깐 집중하지 못했어요. 무슨 말씀 하고 계셨나요?”
레이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만요. 아그네스 님.”
렘브란트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꾸며 레이나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줄 수 있는 흐름을 만들었다.
케이는 프랜시스에게 눈짓해 잠깐 따로 이야기하자며 옆방으로 갔고, 렘브란트는 펄 공작 부인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쉬고 오겠다며 그녀를 에스코트해 나갔다.
레이나는 테일러와 둘만 남았다.
“…….”
레이나가 피로한 듯 눈을 누르며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감쌌다.
테일러가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레이나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안 좋아?”
“…….”
레이나는 가만히 그를 마주하고 자신의 이마를 짚어주는 테일러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밀어냈다.
레이나는 민망한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안 좋은 데 없어. 미안해, 집중 못 해서.”
테일러가 걱정스럽게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렸다.
레이나는 자주 열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체온이 약간 높은 것 같긴 하지만…….
한동안 지속적으로 마신 검붉은 물이 그녀의 건강에 영향을 주었을까 염려되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심란하겠지.
평생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 갑작스럽게 바뀌게 될 이름과 생각해 보지 않았을 가짜 신분, 사실상 신변의 안전을 위해 결혼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미래 등이 마음의 준비와 상관없이 닥쳐오고 있으니.
“…….”
테일러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테이블 위에 팔을 댄 채 팔짱을 꼈다.
그녀가 심란하다면 말해 주길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레이나가 웃으며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한가 봐. 이젠 여긴 다시 못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까…….”
적당한 핑계였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레이나는 줄리어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줄리어스에는 레이나만 아는 장소, 레이나가 산딸기를 따던 숲, 건너던 강, 조금 더 젊었던 할머니와 손을 잡고 시장을 다니던 길, 엎드려 잠을 자던 엄마의 무덤, 자라나는 키를 기록하던 담장이 전부 있었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들이었다.
내 모든 뿌리가 이곳에 있는데.
여길 떠나서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산다면, 내가 다시 그런 추억을 쌓아 다른 곳을 고향처럼 느끼게 될 수 있을까.
테일러가 있는 곳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할머니와 함께하던 추억이 있고, 엄마의 무덤이 있고, 어린 시절 전부를 보냈고, 아서를 만난 곳과 같을 수 있을까…….
레이나는 미안한 듯 웃다 만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괜찮아?”
“응? 뭐가?”
“로렌슨 선생님은 줄리어스에 애착이 있으시잖아. 너도 그렇고…….”
저명한 의사인 앨빈 로렌슨에게 여러 제안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줄리어스를 떠나지 않았다.
테일러도 마찬가지였다.
테일러는 하사받은 작위와 영지가 있는 데도 자신의 책임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현지의 대리인에게 영지 업무를 맡기고 항상 줄리어스로 돌아왔다.
그건 줄리어스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 같았다.
테일러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줄리어스에 애착이 있는 건 어머니 때문이야. 줄리어스 저택이 어머니를 만난 곳이고 어머니는 이제 안 계시니까. 어머니하고의 추억이 전부 이곳에 있거든.”
“…….”
레이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후작 대부인이 계시던 시절, 아마도 거의 삼십 년 전. 주치의 로렌슨 선생님은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하지만 그분은 테일러가 채 열 살이 되지 않았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레이나가 십 대 초반쯤. 막 줄리어스 저택에 들어왔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테일러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일하기 시작했을 때 주치의 선생님과 그 아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 걸 접한 기억이 있었다.
“…….”
레이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 슬픈 줄도 몰랐지만.
테일러에게는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었을 테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많이 슬펐겠지.
테일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한테는 이 장소 자체가 애착이 있고 중요하지는 않아.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다면 널 만난 곳이어서 중요할 순 있겠지만. 너에게 좋은 곳이 아니면 나한테도 의미 없어. 너랑 만났고, 살아온 곳보다는 앞으로 너하고 살아갈 곳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
레이나는 새삼스럽게 어른이 된 그를 바라보았다.
……너나 나나. 처음 만났을 땐 참 어렸는데.
레이나의 시선에 테일러가 머쓱해하며 팔짱을 풀고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미안. 좀 앞서 나갔지.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어.”
아버지는 의사면서도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고 저도 의사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고집부리던 테일러가 떠올랐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고, 어엿한 의사가 된 눈앞의 테일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내가 미안.”
“…….”
테일러가 헛기침을 하곤 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도 손을 깍지 껴 왔다.
“…….”
그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널 보내주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로렌슨 선생님께 죄송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려서 레이나와 테일러는 얼른 손을 놓았다.
케이가 들어와 테일러를 눈짓으로 부르더니 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레이나는 덩그러니 테이블에 혼자 남았다.
어차피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녀 일뿐인데다, 신분과 관련된 문서 작업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그녀가 논의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의견을 말해 봤자 발목이나 잡게 되겠지.
그냥 권유를 따르는 게 가장 덜 폐가 될 것이다.
“…….”
테일러의 영지에 가면 내가 할머니를 돌보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녀 일을 하겠다고 하면 오기로나 받아들여지겠지.
테일러가 하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그냥…… 얹혀살게 되는 건가.
“…….”
케이 경이 보안비 명목으로 돈을 준다고 했지만…….
아서 경이나 케이 경에게 돈을 받든, 테일러에게 그냥 얹혀살든.
어떻게든 누군가의 짐짝인 인생처럼 느껴졌다.
가짜 신분. 가짜 이름.
남의 돈. 괜한 오기.
“…….”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위해 사람들과 의논하고 있는 테일러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내내 그 사람만 그렸던 것이 미안했다.
“…….”
레이나는 빈 종이와 연필을 들어 테일러를 그리기 시작했다.
렘브란트가 그려 주었던 할머니와의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아, 이렇게 그리면 연필만으로도 이렇게 생생하고 따뜻하고 입체적인 느낌이 나는구나.’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레이나는 연필을 움직였다.
* * *
그림을 받아 든 테일러는 놀라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몹시 감동한 얼굴로 손에 든 그림을 한참을 보다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목소리에 벅차고 놀란 느낌이 담겨 있었다.
레이나는 좀 당황했다.
그렇게까지 감격할 일인가?
너무 감동하니 당황스러웠다.
나도 렘브란트 경에게 그림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뻤지만.
그건 할머니하고 같이 있는 그림을 누가 그려 준 게 처음이고, 렘브란트 경이 굉장히 저명한 화가니까 그런 건데…….
“그…… 그냥 잠깐 심심해서 손 풀기로……. 엉성한데…….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 나중에 제대로 그려 줄게.”
레이나가 손을 뻗었지만 테일러는 빼앗기지 않았다.
“아니야.”
테일러가 활짝 웃으며 레이나를 보았다.
“난 이 그림이 좋아.”
그가 그림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자 그가 받은 감동이 더욱 선명해졌다.
테일러는 그림을 위로 들어 다시 들여다보았다.
잠깐 시간이 남아서 저를 그렸다는 말에, 테일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얼굴을 했다.
“너,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 그게 아니어도……. 네가 날 생각하면서 그려줬다는 게 너무 기뻐.”
“…….”
레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얼굴을 붉힌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를 생각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게…….
기뻐?
“…….”
이상했다.
그 사람은…… 그림에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린 그림을 보지 못한 걸까?
“음?”
돌아온 렘브란트가 테일러의 어깨너머로 레이나의 그림을 보았다.
“!”
레이나의 얼굴이 벌게졌다.
“자, 잠깐……!”
레이나가 손을 뻗어 그림을 빼앗고 싶어 했지만, 이미 그림을 확인한 렘브란트는 “오…….”하고 턱을 만지더니 레이나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이 그린 건가요?”
테일러는 뒤늦게 렘브란트가 그림을 봤다는 걸 알아채고 그림을 내렸지만, 그러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그려 주었다는 것은 기쁜 기색이었다.
렘브란트가 물었다.
“좀 봐도 될까요?”
“…….”
테일러가 보기에도 레이나의 그림은 배우지도 않고 그린 것이라기엔 수준이 상당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저명한 화가였다.
이렇게나 잘 그렸는데.
전문가로서 그의 평가를 들어 보고 싶었다.
테일러는 레이나에게 눈빛으로 그에게 보여줘도 괜찮은지 물었다.
레이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그림을 보이고 만지라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반쯤 승낙하는 의미로 고개를 푹 숙였다.
레이나가 그린 테일러의 그림이 그의 손에서 렘브란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
렘브란트는 잠시 그림을 살펴보더니 레이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림을 배워 본 적 있나요?”
“예? 아뇨…….”
렘브란트는 다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렘브란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감각이 있네요.”
렘브란트가 고개를 들고 레이나를 보았다.
“당신 혹시, 그림을 배워 보지 않으실래요?”
“네?”
레이나가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 혼자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에요. 렘브란트 경께서 그려 주셨던 그림 보고 어설프게 따라 한 거예요.”
“……?”
그걸 보고 따라 했다고?
렘브란트가 그녀에게 그림을 내보였다.
“따라한 부분이라는 건, 여긴가요?”
“네, 네…….”
레이나가 민망해하며 빛의 방향에 따라 명암을 표현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부분…….”
테일러도 함께 그림을 바라보았다.
뺨과 눈꺼풀, 머리카락 위에 따뜻한 온기가 만져질 것 같이 표현되고 있었다.
그림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연필로 그린 흑백 그림인데도 햇살과 색이 느껴졌다.
“…….”
렘브란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건 따라 하려고 한다고 이렇게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려 준 그림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표현의 원리를 파악하고 소화해 응용하고 있었다.
레이나의 재능이 그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
그걸 본인만 몰랐다.
그녀에게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게 바로 재능이었다.
렘브란트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클라인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예술가들을 길러내는 학교가 몇 군데 있어요. 그림을 좋아하는 평민들한테 취미로 가르치기도 하고, 재능이 있으면 화가로 발탁될 수 있도록 후원해서 데뷔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요.”
레이나의 눈이 얼떨떨해졌다.
공작 부인이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던 케이와 프랜시스도 차례로 시선을 들어 그들을 쳐다보았다.
“당신한테 다른 계획이 없다면 권해 보고 싶은데요.”
레이나는 당황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계획?
아무 계획도 없었다.
할머니를 돌볼 거라는 것 외에는.
자신이 하녀 일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도록, 어디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테일러의 그늘 아래서 보호받으며, 무엇을 할 때마다 케이 경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적으로 테일러를 보니,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건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클라인’의 명예를 걸고 진심입니다.”
“…….”
제국 제일의 예술 명문가, ‘클라인’의 차기 주인이 말했다.
“당신, 클라인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