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 작별 인사 (129/210)


#129. 작별 인사
2022.11.24.


둘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나가 조금 어색해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로렌슨 선생님께선 안 좋아하실 거야.”

테일러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까진 네가 생각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테일러가 고개를 들며 위층을 보았다.


“할머니 뵙고 갈까?”

레이나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아직 할머니의 방에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할머니 주무시게 두자. 오늘 괜찮으셨으니까……. 내일.”

 

* * *

테일러는 좀 더 오랫동안 있고 싶어 했지만, 밤이 깊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상처 보여 주고 가. 붕대 가는 거 도와달라며.”

“그냥 기사분들이나 저택 하인한테 부탁할게. 별거 아닌 상처라 금방 끝날 거야.”

“오늘은 기사님들 안 계시는 날이야. 내가 해 줄게. 하인보다는 나을 거야.”

레이나는 그의 팔을 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테일러가 난처해하며 찡그리듯 웃었다.


“저기……. 이상한 뜻으로 들리게 하고 싶지 않은데, 벗어야 해.”

“괜찮아. 벗어.”

“…….”

테일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네가 썩 도움이 될 것 같지 않…….”

레이나는 무시하고 그를 당겼다.


“의사라고 생각하세요, 의사 선생님.”

“…….”

그러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입은 옷을 툭 툭 벗기기 시작했다.


“…….”

테일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레이나는 적당히 매너 있는 태도로 건조하게 손을 움직였다.


“…….”

시중드는 일이라면 너무 익숙했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상대의 몸을 터치하는 일쯤이야.

어릴 때부터 보아 온 테일러는 레이나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긴 해도 새삼스럽게 자신과 다른 몸과 달라진 골격이 눈에 들어와 레이나는 최대한 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젊은 남자의 맨몸은 레이나에게도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테일러가 왜 어색해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레이나는 그의 어색함에 전염되지 않기 위해 간병인 같은 태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마침내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하자, 어깨와 팔꿈치 근처에 짐승 발톱이 할퀸 듯한 상처가 보였다.


“어쩌다 이런 거야?”

테일러가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하며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가 할퀴었어. 둥지 근처를 잘못 지나쳤는지 화가 나서 덤비더라고. 괜찮아. 그냥 긁힌 거야.”

긁힌 것보다는 깊은 상처였다.

새라니. 사소한 것처럼 말했지만 상처를 보니 위협적인 숲의 맹금을 만난 모양이었다.

솜씨 좋게 처리는 잘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걱정되었다.


“동물 발톱은 감염 위험한 거 아냐?”

“처리 잘했어. 약도 먹었고. 걱정 마.”

“……손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레이나가 상처 소독을 시작했다.

손목에 묶은 손수건이 테일러의 상처에 스칠 것 같았다.

환자를 돌보는 데는 불편한 물건이었다.

레이나는 그것을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스륵. 스륵.

피가 묻은 붕대를 바닥에 풀어내고, 레이나는 테일러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며 소독과 약 처리를 한 뒤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레이나의 처치가 믿음직하지 못할 거라며 사양했던 것에 비해, 테일러는 레이나가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더 세게 묶어? 아니면…… 조금 느슨하게 풀까?”

“……아니. 지금 괜찮아.”

테일러는 그냥 그녀에게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 *

레이나는 아서가 돌아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테일러를 배웅해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자 시간은 금방 갔다.

그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서도 한참 후에야, 비로소 레이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삐걱……. 삐걱.

오래된 나무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게 되었다.

그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

그는 항상 레이나를 긴장하게 했다.

신문 너머의 그는 그저 딴 세상의 왕자님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언제나 레이나를 목이 타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

달칵.

레이나는 방문을 밀어 열었다.

끼익…….

레이나는 손에 든 램프를 방 안으로 들였다.

불빛이 한 번 파르르 흔들렸다 바로 서며 어두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방은 레이나가 아까 봤을 때와 똑같았다.


“…….”

아무도 없는 방을 보자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레이나는 아서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가 있었던 공기를 들이쉬었다.


“…….”

들었을까.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들었든…… 듣지 못했든.

상관없다.

반년 후엔 그가 이곳에 없을 거라는 게 중요했다.

반년 후엔 내가 그의 삶에 없을 거라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나의 삶에도 당신이, 부디.


“…….”

아서 경은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리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테일러는 정말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예쁜 가정을 만들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랑 조용한 바닷가에서 작은 집을 구해서, 내 마지막 가족일 할머니와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고…….

그 후에 한동안 실컷 울고.

다시 새 시작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

레이나는 물끄러미 할머니의 얼굴에 일렁이는 불빛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레이나는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던 오 년 전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

할머니와 살던 집에 불이 났던 오 년 전.

연기에 질식해 쓰러졌던 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쓰러진 레이나에게 달려오며 ‘아가, 아가!’ 하고 비명을 지르던 할머니의 목소리와.

불을 헤치고 달려와 무서운 힘으로 레이나를 끌어당기던 손.

아무리 잡아끌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들쳐업고 다급하게 움직이던 할머니의 뜨거운 등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 큰 손녀를 업는 일이 육십 대 할머니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죽음의 공포와 탈출해야 한다는 절실함, 손녀를 구해야 한다는 본능은 할머니에게 괴물 같은 힘을 주었던 듯했다.

그럼에도 레이나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의식을 잃기 직전, 떨어지는 불붙은 나무 기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이나는 큰 상처 없이 깨어났다.

하지만 심한 화상을 입은 할머니는 의식을 잃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할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레이나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레이나를 평생 만날 일 없었을 사람의 곁으로 데려다 놓았다.


“…….”

할머니. 혼내지 마세요.

나는 그 사람을 알게 된 게 싫지 않았어요.

레이나는 천천히 할머니에게 이불을 고쳐 덮어 드리고 일어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테일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를 보내주기 위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지금의 기분으론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런 약속이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기약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레이나 자신에게도 아서를 떠나보낼 계기가 필요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이미 결혼한 사람 같고.

그 사람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고.

그 사람이 내 사람 같은 착각에서 이젠 그만 헤어나와야 했다.

혹시라도 내가 그 사람을 끝내 잊지 못하면.


“…….”

그냥 그렇게 라이언 달튼처럼 떠돌아다니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야 탈영한 왕자님은 아니지만.

달칵.

문을 밀고 습관처럼 방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탁.

강한 힘에 잡아당겨진 왼손이 휙 안으로 딸려갔다.

레이나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몸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딸려 들어가며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쿵.

벽에 등을 부딪치고 기대서자 어둠이 눈을 덮었다.

누군가 그녀를 팔 사이에 가두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아 낮게 울렸다.


“안녕, 부인.”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레이나를 덮쳐왔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 * *



“…….”

레이나는 숨을 멈춘 채 어둠 속에서 아서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그의 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눈높이에 있는 아서의 목에만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서가 웃었다.

어떻게 몰랐을까.

레이나는 거의 항상 그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는 언제나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웃으며 그를 맞았다.

이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이 멎은 레이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아서에게 조금 비틀린 즐거움을 선사했다.

내가 당신을 느끼듯이, 당신이 내가 온 걸 느낀다.

당신은 나와 이어져 있다.

우스웠다.

언제까지 나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을까?

당신이 테일러 로렌슨과 연인이 되고 내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남편이 되어도, 우리가 이렇게 이어져 있을까?

언제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고, 허탈하면서도 화가 났다.

오 년 동안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쩌라는 거야.


“…….”

레이나가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레이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서가 웃으며 반문했다.


“내가 온 걸 어떻게 안 거야?”

“…….”

레이나는 숨이 막히는 듯 가쁘게 숨 쉬며 작게 떨었다.

아서는 떠는 레이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내 부인을 만날 수 있나……. 궁금했는데.”

“…….”

“기척을 숨기니 당신을 만날 수 있네.”

“…….”

아서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린 채 레이나의 왼손을 에스코트하듯 잡았다.


“반지도 하지 않았고.”

“…….”

다음엔 다시 손목.


“손수건도 하지 않았고.”

“…….”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하는데.”

“…….”

레이나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긴장해 밭은 숨을 쉬는 그녀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계약은…… 종료라고 생각했어요.”

“…….”

레이나가 시선을 들어 올려 아서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하게 마무리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면 죄송해요.”

“…….”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만 작별 인사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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