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 반지와 여자와 남자 (128/210)


#128. 반지와 여자와 남자
2022.11.20.


인장 반지는 쉽게 나올 수 있는 증거물이 아니다.

귀족의 인장 반지는 황실이나 법원에 전부 서류가 보관되는 데다 법적인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원은 보관 중인 서류와 귀족의 인장을 대조하여 귀족이 직접 서명을 했음을 입증했다.

그렇기에 모든 귀족들은 계약서에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인장 반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인장 반지가 분실이나 파괴 등의 이유로 바뀔 때마다 서류를 다시 내서 공증을 받았기 때문에 그건 법적으로 인정 받는 가문의 증거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귀족 가주가 혼인 전에 연인에게 자신의 인장 반지를 주었다면 그건 반드시 당신을 내 배우자로 맞겠다는 약속이 되었고, 사생아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를 반드시 자신의 아이로 인정한다는 증거물로도 작용했다.

법원에서도 그 인장 반지가 대조 결과 실제로 쓰였던 진짜 인장 반지라고 판명 난다면 그것을 실질적인 혈육이나 혼약의 증거로 인정한다는 판례가 수차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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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줄리어스의 인장 반지에 대해서 말한 거였어요.”

렘브란트의 말에 레이나는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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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장…… 반지요? 저, 저는, 다른 반지 이야기하신 줄 알았어요. 줄리어스의 인장 반지에 대해선 몰라요. 제 소지품에서 그런 게 나왔다구요?”

렘브란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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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녀들이 당신 자리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지금 후작 저택에선 당신이 후작의 숨겨둔 사생아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래서 전 당신한테 물어보려고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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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가 이상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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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저는…….”

레이나의 말소리가 잦아들며 표정이 이상하게 심각해졌다.

그리고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움직여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털실을 발밑에 떨어뜨린 채 햇살을 받으며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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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그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떨어진 털실을 집어 들고 말없이 잠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렘브란트는 신중하게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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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짚이는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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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가 팔꿈치를 괴고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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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버지를 모르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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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가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의 말이 작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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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제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릴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께서는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없으세요. 그냥 네 아빠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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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든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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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빠 이야기를 하면 항상 할머니가 좋아하지 않으셔서. ……언제부턴가 묻지 않았어요. 저도 아주 어릴 때 말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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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 새끼를 책임감 있게 돌보는 좋은 부모만 있는 건 아니다. 너는 운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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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언젠가 할머니가 했던 말과 자신이 아는 후작님을 비교해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저으며 어색한 얼굴로 렘브란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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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도 그게, 후작님이 제 아버지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랬다면 제가 후작 저택 하녀가 되었을 때 할머니께서 알려주셨거나 말리셨을 것 같아요. 후작님이나 후작 부인께서 절 모르셨다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요. 그 반지라는 게 오해일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나는 계속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이상한 표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레이나는 스스로에게 해명하듯 렘브란트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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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게 사실이면 끝까지 숨기려고 하지, 제가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반지를 이제 와서 주실 리가 없잖아요? 괜히 후작가에 문제만 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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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는 물끄러미 잠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께선 대답해 주시기 어려울까요?”

레이나는 할머니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잠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끔 대화할 만큼 상태가 좋으실 때도 있긴 한데, 아마…….”

테일러가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후로 할머니는 부쩍 건강해졌고 표정도 좋아졌지만, 할머니는 상태가 좋은 날에도 쉽고 일차원적인 질문에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 *

렘브란트가 돌아가고 할머니를 방으로 모신 후.

레이나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노트 사이에 끼워 둔 ‘혼인 계약서’를 펼쳐 보았다.


“…….”

첫 페이지에 붙여 놓아 노트를 펼칠 때마다 보곤 했던 농담 같은 혼인 계약서가 아닌, 진짜 아서와 줄리어스 후작의 혼인 계약서.

아서가 언젠가 그녀에게 자신의 재산 내역이라며 건네주었던 혼인 계약서의 사본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망쳐 놓은 아서의 결혼을 돌아보는 것 같아 차마 펼쳐 보지 못했던 그 계약서를, 레이나는 처음으로 열어 찬찬히 읽어 보았다.

혼인 계약서에는 ‘줄리어스 후작 가문 가주’와 ‘데릴사위 아서’, 그리고 그 혼인 계약의 이행을 보증하는 ‘황실 루사익’이 계약의 세 당사자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혼인으로 아서가 해야 할 의무와 그가 받게 될 보상이 계약서의 본문 내용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구와 혼인하게 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마지막에.

아서가 결혼하게 될 사람이 적혀 있었다.

‘줄리어스 후작의 딸.’


“…….”

쿵.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참 후.

레이나는 그것을 내려놓고 침울해했다.

설령 내 친부가 후작님이면…….

……뭘 어쩌게?

대체 뭘 욕심내게.


“…….”

후작님의 적녀(嫡女)와 결혼한 줄 알았지만, 사실 사생아와 결혼한 아서.

세상에 그런 기막힌 가십도 없다.

사생아끼리 잘도 이어주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레이나는 신문과 소식지에서 가십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잘 알았다.

아서 경이 이룬 업적보다 이게 더 크게 회자되겠지.

줄리어스는 풍비박산 나고, 아서 경도 기사들도 재단도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사교계에서 귀족의 평판이라는 게 또 얼마나 무서운데.

아서 경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어머니 얼굴도, 아버지도 모른 채 평생 하녀 일만 해 온 엉뚱한 사생아와 완벽한 사교계의 다이아몬드로 군림하는 크리스티나 아가씨라니.

레이나는 어이가 없어서 자조했다.

아서 경은 완벽하게 ‘고생 끝에 낙이 온’ 자수성가형 영웅이다.

그 완벽한 그림 옆에 누굴 세워야 하는지, 꼭 자문해 봐야 아나?

내가 비집고 들어가면 줄리어스 후작가는 엄청난 명예의 실추를 감당해야 하고, 아서 경이 가진 권위와 권력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곁에 있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추락할 거다.

내가 설령 후작님의 사생아여도 아서 경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후작님이 사기 결혼에 대한 벌은 훨씬 약하게 받게 된다는 것밖에는…….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레이나는 멈칫했다.


“…….”

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누가 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후작님이구나.

어차피 그분은 딸인 아가씨를 아끼지도 않으니까.

실행을 누가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오 년 전의 혼인을 포함해, 저택의 모든 비밀스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단 한 사람.

하녀장 허스트 부인.


“…….”

레이나는 허탈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꽉 눌러 감쌌다.

……나는 사생아 같은 것도 아닌 거야.

설령 내 존재가 문제 되어도 후작님은 자신의 딸과 결혼한 게 맞다고 주장할 수 있고, 나는 실종되었으니 적당히 안타깝게 행방불명이나 죽은 걸로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맞아떨어진다.


“…….”

레이나는 멍하니 혼인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그려 준 할머니와 자신의 그림을 그 혼인 계약서 위에 올려두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조그만 창으로 발그스름한 노을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노을이 올 때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나곤 했다.

한동안, 꽤 오랫동안 그럴 것 같았다.

* * *



“테일러.”

저택의 일을 마친 테일러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문가에서 미소 짓는 레이나를 보더니 다시 팬을 올린 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 돼.”

테일러의 목소리는 유쾌하고 친절하게 들렸다.

레이나는 뒤에서 서글프게 웃었다.


“…….”

넌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

나 같은 거보다 훨씬 가진 거 많은 사람도, 구김살 없는 사람도 만날 수 있으면서.

레이나는 평소처럼 내가 하겠다며 테일러를 말리지 않은 채 묵묵히 테일러의 뒷모습을 기다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이나는 처음으로 아무 군소리 없이 테이블에 단둘이 앉아 테일러가 해 준 요리를 다 먹었다.

레이나가 스푼을 든 채 빈 그릇을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맛있다.”

테일러가 피식 웃고는 다시 앞치마를 하고 일어났다.


“정리하게 일어나. 할머니는 오늘 어떠셨어? 왔더니 주무시고 계셔서 확인 못 했는데.”

레이나는 스푼을 든 채 물끄러미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테일러가 고백 비슷한 것을 하며 기다리겠다고 한 이후 한동안은 그보다 더 그가 불편할 수 없었는데.

할머니가 실종되었다가 테일러가 할머니를 찾아 업고 돌아와 주었던 그날 이후, 레이나는 점점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계속 레이나의 삶에 들어오고 있었다.

가족.

가족…….


“…….”

그와 있으면 편안했다. 안심이 됐다.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하지 않게, 평온하게 지내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나한테도 이런 평범하고 과분한 행복이 일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양심 없게 느껴졌지만 할머니를 업고 온 순간부터 레이나는 계속 테일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서의 곁에 서는 자신은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는데.

테일러의 곁에 있으면 자신이 어린 시절 꿈꾸었던 과분한 행복과 소박한 미래가 보였다.

어릴 때 당연한 미래일 것이라고 꿈꾸었던 것이 쉽지 않은 행복이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좀 서글펐다.

레이나는 입을 열었다.


“테일러, 너…….”

레이나는 순간 멈칫했다.


“……?”

레이나가 그의 팔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만 테일러.”

“응?”

“나 좀 봐.”

레이나가 일어나서 그를 돌려세웠다.

테일러의 움직임이 조금 평소와 달라 보였다.


“다쳤어? 왜 그래?”

“어? 아, 별거 아냐.”

테일러가 약간 난처한 듯 물러났다.

그러나 레이나는 빠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움직임이 불편해 보이는 팔을 걷어보았다.

테일러가 불편한 듯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

테일러가 집을 나간 할머니를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날 테일러의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테일러의 옷에는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다친 곳이 없었다.

뒤늦게 물어보니 외상 환자가 있어 보고 왔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 그날 다쳤구나.”

“아니야.”

테일러가 웃었다.


“오늘 다친 거야.”

레이나가 속상해서 소리쳤다.


“왜 말을 안 해!”

테일러는 웃으며 말했다.


“말하려고 했어. 그리고 어차피 제가 의사예요. 레이나 아스타린 씨.”

그리고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이따 붕대 가는 거 도와줄래?”

“…….”

레이나는 안타까워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 이따가 나랑 얘기 좀 해…….”

레이나는 그릇을 정리하려고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익숙한 바람이 느껴졌다.

아서였다.

보이지 않아도 그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레이나는 잠시 굳은 듯 서 있다가,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 얘기하자.”

테일러는 조금 긴장해서 레이나의 안색을 살폈다.


“……왜? 무슨 얘긴데?”

레이나가 그를 향해 돌아서며 고개를 들었다.


“테일러. 나랑 약속 하나 할래?”

“응?”

레이나가 눈을 들어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반년.”

테일러가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반년이야. 내가 반년 안에……. 다음 봄까지 그 사람을 잊지 못하면 너도 그만둬 줘.”

시선이 교차했다.

레이나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너같이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거 알아. 너한테도 다시 잘 생각해 보고 도망갈 시간…… 반년 주는 거야.”

“…….”

레이나가 다시 고개를 들고 테일러를 마주 보았다.


“대신 나 너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노력할게. 그 전에 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그만둬도 좋아.”

“…….”

“하지만 반년 후에도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으면……. 그때는 너도 나를 더 기다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고 약속해 줘.”

“…….”

레이나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그때도 내가 계속 이러고 있으면 너를 보내줄게. 그땐 그만 널…….”

레이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테일러가 다가와서 레이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

테일러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레이나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기쁘다.”

테일러의 품은 따뜻했다.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테일러를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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