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가능성
(125/210)
125. 가능성
(125/210)
#125. 가능성
2022.11.10.
아서를 찾아온 아그네스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그 애가 후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던데.”
아서가 그녀에게 의자를 빼 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그네스가 눈을 치떴다.
“아니니?”
“하녀들이 옮기고 있는 소문이라면 낭설입니다.”
“……그래?”
아그네스는 아서에게 당황하는 기색이 없는지 뚫어져라 아서를 바라 보았지만 그에게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서는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보다 의자 등받이에 손을 대며 싱긋 웃었다.
아그네스가 아서에게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렘브란트 경에게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만.”
“그러셨습니까.”
아서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아마 브로디라는 하녀가 옮긴 이야기일 겁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더군요. 아랫사람에게 적합한 미덕은 아니지만.”
아서가 예사로이 웃으며 덧붙였다.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닐 겁니다. 자극적인 이야기이다 보니 헛소문이 빨리 퍼지는 듯합니다.”
솔직히 아그네스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에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시 침묵했다.
아서는 자신의 자리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애 짐에서 줄리어스 후작의 인장 반지가 나왔다던데? 본 하녀들이 여럿이라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돌고 있다더구나. 혼외자 상속권 배제 소송이 접수된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고.”
아서가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는 듯이 의자 바깥에 잠시 선 채 있다가 미소 지으며 단정하게 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아닐 겁니다. 뭔가 오해가 있을 듯하네요.”
“…….”
아그네스는 새삼스럽게 아서를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로 옅게 미소 지으며 한 손을 허리 뒤에 두고 있는 절제된 모습이 고상하기 그지없었다.
잘 조각된 상아 같았다.
황태자 카일과는 정반대…….
마리아 황후가 카일을 아마도 저런 사내로 만들고 싶어 그토록 노력한 것일 텐데 되지 않았지.
“…….”
위험하게도…….
저토록 황후에게 신경 쓰일 모습으로 자라다니.
아서가 아그네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후작은 사기 결혼 건이 혹시라도 문제가 될 경우를 대비하고 싶어 했었습니다. 아마 그녀를 사생아로 꾸며 둔다면 만일의 사태에 사기죄는 감경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준비한 것이겠죠. 하지만 일이 꼬인 것 같습니다. 설마 정말 자기 사생아인데도 모르고 그렇게 일을 처리하진 않았을 테니.”
“…….”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후작의 사생아라면 아서가 쉽게 그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뭔가 알게 되면 내게도 알려주렴. 그건 그렇다 치고, 아서.”
아그네스가 햇살 사이를 떠도는 은빛 오러 너머로 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테일러 로렌슨은 왜 만나고 있니?”
아서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깍지끼며 미소 지었다.
“제 아끼는 부관 중 하나가 그에게 진료받고 있습니다. 좋은 의사더군요.”
“딜런 오스본?”
“예. 재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아그네스는 아서가 숨기는 기색이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아서는 평온해 보였고, 그에게선 자신이 알아본 정보와 일치하는 합리적인 이야기만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아그네스가 아서의 건강을 의심할만한 정보는 그가 선황제와 같은 수준의 오러 사용자라는 것, 아서가 테일러를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것, 그리고 아서가 그날 밤부터 단 한 번도 멀리까지 뻗는 오러를 쓰지 않고 가까운 범위에만 오러를 쓰기 시작했다는 점뿐이었다.
“…….”
아서의 모습은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었고 건강이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서는 연기를 잘한다.
그가 배우인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걸 아그네스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그네스는 아서의 속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딜런 오스본은 널 찾아오면서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다던데. 그건 왜 그러니? 존경받는 기사라던데 좀 더 당당해도 좋으련만.”
아서가 답했다.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고 있는 사람이어서요. 이래저래 스트레스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상이군인 재단에서도 책임자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는데 어디가 안 좋은지 너무 자세히 공개되지 않는 편이 임명에 좋기도 하고요. 휠체어를 타는 것이야 숨길 수 없지만요.”
아그네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딜런 오스본에 대해 물어본 건 혹시 아서에게 건강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해서 떠본 것이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니 크리스티나와의 신경전으로 인한 곤란이 있나 싶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재단 이사장직을 요구했다지. 알력 다툼이 있나?’
아그네스가 물었다.
“혹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네가 하겠다는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거니? 임명권에 간섭하겠다고 요구한다면 곤란하다. 네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면 안 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그 애는 아직 속을 알 수 없어. 천천히 두고 봐야 해.”
아서는 크리스티나를 두고 나쁘지 않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아그네스는 크리스티나가 믿어선 안 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그네스는 크리스티나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루모스 상단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그네스조차 아서에게 정부가 있다고 순간 감쪽같이 속았기 때문이었다.
혼인에 있어서는 크리스티나 역시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아서를 오해받게 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이야기를 은근히 흘리고 있다면, 크리스티나는 믿을 만한 여자가 아니다.
지금은 지은 죄가 있으니 숨죽이고 있다지만 어떤 공작을 하는지 경계해야 했다.
“…….”
사기 결혼을 두고 너한테 정부가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흘리는 것 같더라 하는 이야기를 언질해 두고 싶었지만, 아그네스는 혹시라도 젊은 두 부부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될까 봐 직접적인 말은 삼키고 원론적인 말만 했다.
“너는 데릴사위야. 여기서 자리 잡으려면 아내나 후작에게 좌우되지 않는 너의 고유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해. 전쟁으로 얻은 권력은 전쟁이 끝나면 빛이 바래게 된다. 지금 세우는 재단이 네 진짜 힘이 될 거야. 대외적으로 우호적 협력 관계로 비치는 것은 좋지만, 재단의 권한이 후작이나 네 아내에게 종속되면 곤란하다.”
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결국 아서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부부가 되어 살아야 한다면 실컷 서로를 의심하고 사이가 벌어진 후 평생의 뒷감당은 아서가 해야 하니까.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일단 그쪽의 자금 개입은 보류하고 조율 중입니다. 이 일이 다 정리되기 전까지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어서요.”
아서가 대비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답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서도 크리스티나에 대해선 내가 파악한 만큼은 파악하고 있겠지…….
아그네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황제와 교황이 증인이 된 혼인이었는데.
아서의 결혼이 어쩌다 이런 살얼음판이 되었을까.
“……몸에는 문제없니?”
“문제요?”
아그네스는 끝내 걱정을 참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보며 심리적 경계 너머로 한 발을 내디뎠다.
“……나도 루사익이다. 너나 카일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오러를 느낄 수 있어. 네 오러에 문제가 생긴 걸 안다.”
아서가 미소 지었다.
“그러셨군요.”
아서가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끝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혹시나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것인가……. ”
“…….”
아그네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짐작했나 보구나.”
“예. 지난번에, 대모님께서 편찮으셨을 때.”
아서가 아그네스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아그네스도 그때 아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굳이 이곳, 루모스 호텔에 머문 이유가 있다는 걸 네가 짐작할지도 모르겠구나. 만일 그렇다면, 네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실에서는 대모님께 오러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요.”
“…….”
아서는 미소 지은 채 아그네스를 향해 예를 표하듯, 시선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말했다.
“전쟁도 끝났고, 오러에 의존하는 버릇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사용을 자제하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무리해 사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없습니다. 사용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예.”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정말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대모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아그네스가 웃었다.
“그래. 아, 혹시 시력은 많이 나빠지지 않았고?”
아서가 무난하게 답했다.
“예. 썩 좋은 시력은 아닙니다만 활 한 번 당겨서 두 마리까지는 가능한 정도의 시력은 됩니다.”
웃음기를 담은 그의 회색 눈동자는 아무런 문제 없이 아그네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서가 농담을 한다 생각한 아그네스는 피식 웃었다.
“……레이나는, 만나볼 생각 없니?”
아서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웃었다.
“대모님.”
그렇게 불리자 아그네스는 순간적으로 무안한 생각이 들었다.
교인이자 혼인의 수호자로서 부적절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
아서는 그녀를 탓하는 대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그네스를 응시한 채 옅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제가 흔들린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대모님께서 노하지 않으셨던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
“대모님을 압니다. 충실하신 분이시죠. 결혼 서약의 증인으로 서시기에 가장 적합하신 분이시고요.”
“…….”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으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 자꾸 그녀를 인지시키시는 이유가.”
“…….”
아서가 미소 지은 채 물었다.
“제 오러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연관 있기 때문입니까?”
“…….”
아그네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아서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아그네스를 ‘보았다.’
오러로 그녀의 얼굴과 시선의 방향을 파악하고, 눈을 마주치듯이 시선을 바로 맞추며.
그녀가 자신이 시력을 잃은 것을 알 수 없도록.
시력이 회복되었던 이유.
원인이 사원이 아니라면.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레이나.
레이나 아스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