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전문가들 (124/210)


#124. 전문가들
2022.11.06.


테일러가 딜런과 아서를 함께 만나는 날이었다.

딜런은 다리는 안 될 거라며 우선 시력 문제에만 상담을 원했지만, 꾸준히 치료를 하면 걸을 수 있을 것 같고 시기를 더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테일러의 권유로 재활 치료도 시작했다.

테일러는 그에게 적절한 운동 치료를 처방하고, 딜런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섬세하게 살펴 재활 운동을 위한 보조 기구를 만들어주었다.

딜런은 힘들어하면서도 재활 치료를 잘 견뎠고, 그 후에는 꼭 아서의 곁으로 와서 함께 시력 문제를 상담받았다.

고통스러운 재활 치료를 마치고 와서 지친 낯으로 시력 상담을 받아야겠다 주장하는 딜런을 아서는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딜런은 다리 재활을 시작했고, 아서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척하는 딜런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력 상담을 시작했다.


“제가 엄청 독실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사원에 갔을 때 눈 상태가 좋아졌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사원과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음……. 글쎄요. 줄리어스 사원의 권위를 존중합니다만, 지금은 사실상 치료술로서의 신성 마법은 사라졌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저도 유의미한 사례는 알지 못합니다. 치료술로서 신성 마법이 존재하던 시절에도 눈은 신성력으로 회복이 안 되는 신체 기관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그 후로 몇 번 더 사원을 가봤습니다만, 좋아진다고 느껴지지 않긴 했습니다.”

테일러가 진료 노트에 그의 말을 기록하며 답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볼 정도로 좋아지셨다는 걸 느끼셨다는 의미일 테니 그런 사례가 있는지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 줄리어스 사원의 성수는 여러 가지 약초가 들어 있어 독의 정화 효능을 인정받고 있는데,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혹시 사원에 방문하셨을 때 성수를 사용하셨습니까?”

“아, 성수……! 는 아뇨. 쓰지 않았습니다.”

딜런은 아서의 떨떠름한 분위기로부터 그가 사원에서 성수를 쓰지 않았다는 걸 빠르게 깨닫고 부정했다.

테일러는 그것도 노트에 적은 뒤 질문을 바꾸었다.


“꼭 사원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좋아졌던 것일 수 있는데, 짐작이 가는 다른 원인이 없으십니까?”

아서는 묵묵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

딜런이 아서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음……. 제가 무리하게 집중력을 쓰고나서, 피로하면 시력이 나빠진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근래는 휴식하면서 좋아진 건가 싶기도 했고요. 이런 경우도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영향이 있으니 과로하지 마시고 푹 쉬시는 게 좋습니다.”

테일러는 진료 기록을 하며 다리 때문에 훈련을 할 수도 없고, 시력을 잃어 글을 읽지도 못하는 딜런이 집중력을 쓸 만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에 생각이 미쳐 물어보았다.


“혹시 재활 치료 후에 힘들어서 악화된다고 느끼신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좀 더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정해야 하니 말씀해 주십시오.”

“으음…….”

아서의 시력에 대해 상담하고 싶은 것이 본심인 딜런은 선글라스 뒤편에서 그를 곁눈질하며 초조해했다.

아서의 시력은 재활 치료나 독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자꾸 딜런의 상황으로 집중하게 되며 화제가 비껴갔다.


‘정작 실명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각하인데…….’

딜런의 시력은 거의 회복이 된 상태였다.

해독제를 먹으며 운동을 시작하고 땀을 뺐더니 몸을 손상시켰던 독 기운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고, 시야도 밝아졌다.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며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대니 몸도 확실히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딜런 자신보단 아서의 증상을 상담받고 싶은데, 이 쓸데없이 성실한 의사는 자꾸 딜런의 케이스에 꼼꼼히 맞추어 독으로 인한 시력 상실이나 회복에 관해서 증상을 묻고 조사해 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수록 아서의 증상에선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의사들이랑 다를 거라곤 생각을 못 했는데…….’

그냥 의사를 만나면 으레 하는 평범한 진료나 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나 물어보고 그가 알고 있는 경험적인 대답을 들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테일러 로렌슨은 원인에 따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다르다며 섬세하게 증상을 확인하고 같이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그를 유능한 의사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의사라면 정말 치료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능력이 있는 의사라는 생각이 드니 더 아까웠다.

아서를 제대로 상담시키고 싶었다.

그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묻고 진료를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서류를 보지 못한다는 건 가문을 두고 후작과 경쟁하기엔 너무 치명적인 약점이다 보니 함부로 드러낼 수도 없어 답답하고 초조했다.


‘역시 재활 치료보다는 눈을 봐 달라고 해야…….’

아서가 소파 등받이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끼어들었다.


“엄살이니까 재활 치료 강도는 그대로 진행해. 높여도 되고.”

“!”

재활은 진짜 힘들었기에 강도를 높이라는 소리에 딜런이 휠체어 팔걸이를 쥐고 깜짝 놀랐다.


“각하.”

아서가 웃으며 딜런을 놀렸다.


 


“재활이 힘들어서 시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는 한 적 없잖아. 오히려 좋아지는 것 같다며.”

“…….”

딜런이 끙 소리를 내며 피하고 싶어 했고, 테일러도 딜런을 보며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거든요.”

“…….”

딜런은 어쩐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제 치료를 미끼 삼아 성공적으로 딜런을 성실한 재활의 늪에 밀어 넣은 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난 변호사랑 약속이 있어서.”

“……변호사를 자주 만나시네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쉰 딜런이 지나가듯 묻는 말에 아서가 대답했다.


“검토할 게 많아서.”

 

* * *

혼인 계약서와 재단 관련 서류를 앞에 두고 아서와 변호사가 면담했다.

약간 긴장한 기색의 변호사가 금빛 표지로 덮여 있는 서류를 내밀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운을 떼었다.


“주신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해 보면,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교단에서 ‘혼인성사’를 한 사람이 누구냐와 관련한 이의제기와 분쟁이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귀족의 혼인이고 증인으로 서명을 하신 분의 권위가 높으니 혼인 계약서가 가장 우위에 있게 되고요.”

“영주 권위에 휘둘리는 지방 법원이라면 케이스에 따라 말장난처럼 해석해 황당한 결론이 내려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혼인의 경우는 증인으로 사인하신 분들의 권위가 워낙 높으니 함부로 말장난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섣불리 그랬다간 그분들을 농락하는 것이 되어서 황실 모독죄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실 모독죄는 최대 사형인데 사기 결혼을 잡으려다 황실 모독을 건드리게 된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되겠죠.”

“이건 여지없이 상식적으로 해석하게 될 겁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그것을 믿고 있을 거고요. 그러니 본인의 여론적 지지가 높고 자기를 위해 증언해 줄 사람들이 있다면 뒤집기 어렵지요. 법은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니까요. 약간의 망신은 있겠지만 해프닝 식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처벌은 후작만 받게 될 겁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각하와 유효한 혼인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호사가 은색 표지로 덮여 있는 두 번째 서류를 짚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케이스의 경우는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일반 혼인의 경우 제국법도 여전히 사원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중혼*의 경우 혼인성사를 먼저 하신 쪽을 정식 혼인으로 인정합니다. 나머지는 다 혼인 무효가 됩니다. 실제로 어떻게 살았든 혼인성사를 먼저 하고 교단에 부부로서 이름이 오른 배우자가 ‘법적 아내’, 다른 쪽은 법적으로 내연관계 혹은 그냥 동거가 되는 것이죠. 이 경우도 그런 케이스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 결혼을 했는데도 혼인성사를 저쪽이 먼저 했다는 이유로 이쪽은 인정받지 못한 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시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물러나신 건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어찌 되었든 한쪽이 속아서 성립된 결혼의 경우 사기 결혼으로 보아 법에서는 피해자를 구제합니다. 혼인 사기로 피해자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면 피해자는 혼인으로 약속된 권리를 어느 정도라도 가질 수 있도록 법에서 최대한 균형을 맞추어 주지요. 아시다시피 사원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고 이때는 사제들을 대동하고 혼인성사를 할 수 있는 부부가 많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법원이 혼인신고를 받아주던 때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혼인성사 없이 결혼의 형식을 갖추고 살았던 실제 부부들도 법적 혼인을 한 것으로 뒤늦게 소급해서 인정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더더욱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경우, 아시겠지만, 권력의 입김에 따라 결과가 좌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모여 있는 사안이라면 판사도 여론을 의식하고 제국법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견제가 될 수도 있긴 하지만요. 관습법과 상식을 따른 결과를 이끌어내고 싶다면 일단 정식으로 제소해야 하고 사람들이 많이 알아야 합니다. 논란이 크게 될수록 법원은 신중하게 몸을 사리고 판결을 내릴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서가 물었다.


“계승권 분쟁과 연관된 사안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없습니까?”

“네. 계승권 분쟁에 대해선 없습니다. 피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 판결에 불리하게 작용한 사례가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데, 이건 몇 년 정도 된 사안입니까?”

아서가 답했다.


“오십 년 정도.”

“알겠습니다.”

몇 가지 문답이 더 이어졌다.

변호사는 꼼꼼하고 성실하게 답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일해 주시는 걸 보니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돼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연락드리죠.”

긴장하고 있던 변호사가 펜을 꽂아 넣고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를 받았다.


“기다리겠습니다. 아서 경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참고로 줄리어스 저택에서 온 ‘그 서류’는 반려되었습니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네, 들었습니다.”

변호사가 그를 배웅하며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물었다.


“다른 변호사들도 있는데 굳이 절 선택해주신 이유가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서가 답했다.


“추천해 주신 숍이 마음에 들어서요.”

이유를 말해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변호사가 예의 있게 물러났다.


“아……. 다행이네요.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아서가 매력적인 얼굴로 콧잔등을 찡그려 웃었다.


“네. 좋았습니다. 할머님께도 잘 어울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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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혼: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이중으로 혼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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