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눈속임 뒤편의 진실
(123/210)
123. 눈속임 뒤편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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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눈속임 뒤편의 진실
2022.11.03.
황궁 하녀들은 렘브란트의 심부름을 한다는 명목으로 꾸준히 줄리어스 저택과 아그네스가 머무는 호텔을 오가고 있었다.
렘브란트 경이 펄 공작 부인에게 서신을 전한다는데 감히 그 하녀들에게 저택 안의 소문에 대한 입단속을 시도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안주인인 마틸다가 있던 때에도 그들은 터치할 수 없었던 하녀들이었다.
지금은 주인 내외가 수도로 떠나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으니 하녀들은 더욱 편하게 공작 부인을 찾아갔다.
아그네스는 렘브란트의 서신을 들고 자신의 호텔을 찾아온 그들에게 언제나 차를 내어주며 안부를 나누고 저택 안의 소식을 들었다.
하녀들은 친히 마음 써주는 공작 부인에게 무척 감사해하며 눈치 빠르게 저택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들은 근래 딜런 오스본이 자주 찾아오며 아서와 테일러를 함께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오스본? 그 이름은 귀에 익구나. 기사 가문이었지?”
“네. 딜런 오스본 경께선 상이군인이신데, 다리가 불편하신지 휠체어를 쓰시더라고요. 아서 경이 그분을 무척 신경 써 주시는지 함께 꾸준히 줄리어스 가문 주치의를 만나고 있어요. 딜런 경을 직접 챙겨 주고 싶으신가 봐요.”
아그네스가 찻잔을 들며 반문했다.
“젊은 주치의라면 테일러 로렌슨인가?”
“네. 젊은 나이인데도 상당히 명성이 있는 의사래요. 대대로 의사 집안인데, 줄리어스하고도 긴밀한 걸로 유명하고요. 거의 줄리어스의 가신이라던데요. 가신 맹세를 정식으로 하지 않았을 뿐, 닥터 로렌슨이 후작 대부인 패트리시아 님이 계시던 시절부터 30년을 이 저택을 지켰으니까요.”
앨빈 로렌슨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지금은 테일러가 거의 가문 주치의로 통하고 있었다.
딱히 함께 다니는 것을 숨기지 않았기에 테일러가 저택에서 아서와 딜런을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하녀가 재잘거렸다.
“딜런 경도 전쟁 초기엔 꽤 활약했던 기사라고 하더라고요. 휠체어를 타고 그분이 지나갈 때마다 기사들이 경례하는 걸 몇 번 봤어요. 딜런 경은 인사를 잘 안 받아주는 것 같지만, 존경받는 기사라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그러니?”
“네. 아서 경의 측근 기사분들하고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고요. 하지만 젊은 분이 그렇게 됐다니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기사들이 지나다니면 하녀들은 힐끔거리느라 난리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하녀들도 그분을 볼 때랑 다른 기사들을 볼 때 시선이 좀 다르긴 해요. 딜런 경도 치료가 잘 돼서 다시 걷게 되시면 좋을 텐데. 가능성이 있으니까 의사를 만나시는 거겠죠?”
아그네스가 관심을 보이자 하녀는 더욱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하지만 아서가 테일러 로렌슨을 그렇게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아그네스에게는 그것이 조금 다른 의미로 읽혔다.
“…….”
아서가 테일러 로렌슨을 썩 편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걸 측근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다리가 불편한 딜런 오스본은 굳이 저택까지 와서 ‘아서와 함께’ 의사를 만날까.
공작 부인은 하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서인 것 같은데.’
아서는 아그네스에게 의사를 보내주겠다 제안했던 것처럼, 테일러를 그에게 보낸다는 선택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니 더더욱 그러는 편이 타당했다.
그런데 의사를 보내주는 게 아니라 굳이 저택에서 만난다니.
이건 딜런 오스본이 테일러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딜런이 테일러와 함께 아서를 찾아가 진료를 받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는 휠체어를 끌고 찾아온 부하를 내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만나주는 거고…….
―몹시 흔들립니다.
“…….”
짓궂은 농담에 답하듯 옅게 웃으며 말하던 아서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그네스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후 알 수 없는 문제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며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의사가 찾아왔었지만 누구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어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의 오러에 문제가 생겼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서는 그렇게 잃고 싶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평온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
아서의 건강 문제는 아그네스가 그의 오러를 봤던 밤부터 계속 걱정했던 것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아서는 괜찮은 듯이 보였지만, 이후로 루모스 상단에도, 자신에게도 오러를 전혀 쓰지 않고 있었다.
아마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못 쓰는 것일 것이다.
그 정도로 발달한 감각을 매일 같이 광범위하게 쓰던 사람이다.
그렇게 쓰던 능력이 갑자기 없어진다면 누구라도 불편해서 못 견딜 것이다.
갑자기 멀쩡히 쓰던 손발을 잃은 듯 느껴질 테니.
엄밀하게는 눈이나 귀를 잃는 것에 가까우려나.
“아참. 그런데, 마님. 그 소식 들으셨어요……?”
아그네스의 하녀들은 약간 눈치를 보며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쉬쉬하는 하녀들 사이에서 꿈틀대고 있는 ‘후작의 사생아’ 이야기였다.
아그네스가 외도에 꽤나 매서운 편이라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인 듯했다.
“…….”
공작 부인은 묘한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이미 한 번 희망을 걸었다가 포기했던 가능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렘브란트를 통해서 레이나에 관해 그런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서의 혼인 계약이 무효화되는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던 아그네스였기에 당연히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근거가 없었다.
꽤 수완이 좋은 렘브란트와 포드 백작의 자제도 찾아내지 못했고, 혹시나 싶어 사원을 통해서도 조사해 봤지만 아무래도 모두의 공통적인 결론은 후작의 사생아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정도의 이야기가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으니 사생아는 아니구나,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의외의 근거가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증거인데, 이렇게 갑자기 보란 듯이 떨어지다니…….
“……소지품에서 가문의 물건이 나왔다고?”
“네. 인장 반지요. 그건 법적으로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물건이잖아요.”
하녀는 더욱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줄리어스의 하녀장인 허스트 부인이 법원에 갔다더라고요. 비 적통 계승자 상속권 배제 소송인 것 같다고……. 그 왜, 혼외자가 상속권 주장할 수 없도록 정리할 때 각서 받아서 주로 처리하는 소송 말이에요.”
아그네스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
아서를 대동하고 레이나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서는 레이나와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이나는 공작 부인만 바라보았고, 아서는 그녀의 할머니만 짧게 따로 만난 뒤 돌아갔다.
서로에게는 시선 두지 않고, 그것이 자기들의 의무라는 듯이.
그저 오러를 볼 수 있는 공작 부인만이 눈치챌 수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의 뜻이 멀어지는 것이고 아서와 레이나가 스스로 그렇게 결정해 마음을 정리했다면 아그네스는 존중할 생각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레이나가 휘말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가 갔고, 아서가 지키고 싶어 하는 전우들의 평온과 행복도 저버리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서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녀가 확인했던 시점에는 사실이 아니었던 사생아 설이 이렇게까지 구체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
둘을 다시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트리스탄은 급하게 달려간 법원 앞에서 케이와 마주쳤다.
트리스탄은 케이를 거기서 만났다는 것 자체로 모든 것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가 그의 표정을 보고 멈칫하다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닙니다.”
트리스탄이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뭘 듣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거 사실이 아니라고요.”
트리스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가 든 서류를 턱짓했다.
“손에 든 그 서류, 뭡니까? 혼외자 상속권 배제 소송 서류입니까? 사무원에게서 빼앗아 오신 건가요?”
“…….”
“저희 계획, 아니, 혼인……. 아무튼, 전면 재검토하는 겁니까?”
케이가 한숨을 지었다.
뭔가 듣고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조사를 시킨 것도 아닌데 벌써 트리스탄까지 알았다니, 대륙 최고의 무거운 입으로 유명했던 줄리어스의 하녀들이 확실히 술렁이고 있었다.
애초부터 강하게 틀어쥐는 주인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 침묵이었거나, 무언가가 계기가 되어 그들의 입이 열리기 시작하고 있거나…….
트리스탄이 케이의 침묵을 참지 못한 듯 독촉했다.
“저한테도 말해 주십시오. 들을 권리 있지 않습니까?”
“…….”
케이가 입을 열었다.
“……레이나 양은 안토니오 줄리어스 후작의 사생아가 아닙니다. 아서 경 옆자리를 꿰어찰 생각으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
“레이나 양이 출생을 숨기고 우리를 농락한 것도 아닙니다.”
“…….”
트리스탄은 무언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는 재차 레이나를 변호해 주었다.
“뭘 듣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정말로 후작이 숨겨 키운 세작 같은 게 아닙니다. 아서 경의 혼인이나 우리 재단에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겁니다……만. ……그것 때문에 온 것 아닙니까?”
트리스탄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케이가 말을 바꾸며 의심스럽게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트리스탄은 멍하니 탄식했다.
케이는 당연히 트리스탄이 레이나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노트와 스크랩북을 보지 못했다면 자기가 그 소문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돌이켜 보자 반박할 수도 없어 트리스탄은 허탈하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아.” 하고 알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후작이 아서 경에게 자기 사생아를 붙여 주는 걸로 아서 경 출신을 모독한 것도 아닙니다. 그녀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
트리스탄의 표정을 보고 케이가 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아닌가요?”
“…….”
트리스탄이 뭔가를 참는 듯이 말했다.
“……케이 포드 경. 당신이 보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보셨죠?”
“뭘 말입니까?”
“레이나 아스타린의 노트요. 오 년 치.”
“…….”
케이의 침묵은 대답이 되었다.
트리스탄이 신음하듯 손을 올리고 머리를 쥐었다.
“케이 경……. 케이 경.”
트리스탄이 머릴 쥐었던 손을 내리고 힘주어 말했다.
“저는 의심했을지언정 당신은 레이디 레이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
“각하에게 그 스크랩북 이야기하지 않으셨죠?”
“…….”
트리스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각하는 읽지 못하잖습니까. 각하는 그런 게 있다는 걸 모르실 거 아닙니까. 각하는, 아…….”
트리스탄이 몸을 돌리고 뭔가 안타까워 견디기 힘든 듯이 주먹을 쥐었다가 내렸다.
“각하에게 알 권리가 있습니다.”
“…….”
케이의 침묵에서 거절이 읽혔다.
트리스탄의 목소리가 울컥 격앙되었다.
“케이 경, 각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하신 건지 짐작하실 거 아닙니까. 저희 레이디 레이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생아라잖아요. 그럼 돌이킬 수 있잖아요. 저희가 그 정도 위험 부담은 같이 할 수 있잖아요.”
“…….”
그의 침묵을 이해한 트리스탄이 얼굴을 꽉 눌러 마른세수를 했다.
케이는 희생이 있어도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가 뭘 위해서 무엇을 희생시켰는지 알 수 있었기에 트리스탄은 안타깝고도 화가 나서 간곡히 말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는 이미 저희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하셨어요. 케이 경, 우린 각하께서 뭘 더 희생하려고 하시면 더 이상 그걸 방관하면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저희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 저희가 같이 부담해 드려야죠. 각하께 다 부담시키는 건…….”
“트리스탄 경.”
케이가 냉정하게 잘랐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
“레이나 아스타린은 후작의 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트리스탄이 목소리를 낮추고 바짝 다가섰다.
“케이 경, 인장 반지가 나왔습니다. 그건 법적으로 증거로 인정받는 물건 아닙니까?”
케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설령 사실이래도 나는 막을 겁니다. 레이디 레이나도, 아서 경도 그럴 거고요. 그런데 심지어 사실도 아니에요.”
케이가 옆에 끼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보십시오.”
“…….”
트리스탄이 받아 열었다.
“…….”
그것은 참전 용사 재단 설립에 대한 서류였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혼인 이후 출자’를 제안한.
그 뒤에는 유족 연금 재단, 상이군인 재단, 얽혀 있는 상단들과 군인들의 목록, 혼인 계약서 따위가 줄줄이 두꺼운 두께로 이어지고 있었다.
케이는 법원에 그것을 제출하러 온 것이었다.
“……법원이 인가한 겁니까?”
케이는 도로 받아들며 말했다.
“미비된 서류가 있어 반려되었습니다. 지적받은 자료 보충해서 다시 제출할 겁니다. 원래 몇 번 이렇게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
케이가 피로한 듯 안경 아래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트리스탄.”
“…….”
케이가 손을 내리고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그냥 해프닝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