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눈덩이 속 사생아
(122/210)
122. 눈덩이 속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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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눈덩이 속 사생아
2022.10.30.
아서를 만나기 위해 저택 본관으로 달려가던 트리스탄은 어디선가 한 번 들어봤던 것 같은 목소리에 멈칫 발을 멈추었다.
“아……. 그, 그게……. 모,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프랜시스 님.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인데 제가 너무 입을 가볍게 놀린 것 같습니다…….”
급하게 달려왔으면서도 본능적으로 트리스탄은 기둥 뒤에 몸을 감추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지 모르지만 못 들은 걸로 해 달라는 말은 일단 듣고 봐야 하는 법이었다.
“……?”
그러고 나서 기시감을 느꼈다.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둥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거 그 사람 얘기잖아요, 그렇죠?”
“!”
빠르게 기억이 되살아났다.
프랜시스 포드.
트리스탄이 막 저택에 들어와 레이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레이나’에게 연서를 전하고 싶다며 하인에게 그녀를 만날 방법을 묻던 렘브란트의 수행원이었다.
트리스탄은 갑자기 프랜시스에 대한 경계심이 확 피어올라 표정을 매섭게 바꾸며 기둥에 바짝 붙어 그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 사람 이야기? 누구 이야긴데?
혹시 ‘레이나’ 이야기?
프랜시스가 하인을 안심시키며 회유했다.
“당신에게 들었다는 건 비밀로 할게요. 부탁합니다. 하인들 사이에 돌고 있다는 그 얘기, 저한테도 들려주실 수 없을까요?”
하인이 머뭇거렸다.
아무리 친분이 있는 프랜시스라도 말하기 꺼려지는 사정인 듯했다.
그때 프랜시스가 악수하듯 하인의 손을 잡더니 손안에서 그에게 금화를 찔러 주었다!
하인이 흠칫하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다른 뜻은 아니고 지난번에 주문 대신해 준 물건값이에요. 신경 써준 게 고마워서 좀 더 넣었어요.”
“아, 프랜시스 님…….”
프랜시스는 전혀 뇌물을 준 사람 같지 않은 선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사실 다 알고 왔어요. 하지만 당신이랑 나 사이엔 우정이 있고, 당신이 가장 믿을 만하니까 당신한테 온 거예요.”
프랜시스 포드는 순식간에 하인을 구워삶았다.
“제가 지금 많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에 증거가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어서요. 아무래도 가문에서도 다시 고민해 줄 테니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고, 또…….”
프랜시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일부러 하인들이 오해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얘긴지 모르는 트리스탄마저도 프랜시스가 무슨 오해를 유도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트리스탄이 기둥 뒤에서 도끼눈을 떴다.
저놈이?
유부녀를 상대로 지금 무슨 장난질을?
프랜시스는 금화와 함께 하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제 마음을 아시잖아요. 그게 사실이면 제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트리스탄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포기하지 않길 뭘?
웃긴 놈 아냐?!
뭔지 모르지만 당장 포기해! 유부녀라고!
하지만 일단 정보는 들어야겠어서 트리스탄은 분노한 마음을 다스리며 참았다.
“…….”
하인이 눈치를 보았다.
줄리어스의 고용인들은 엄한 교육을 받아 상당히 입이 무거웠지만, 하인들 사이에서는 불문율이 있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거나, 이렇게 누군가 좋은 사람을 만나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면 인간적으로 서로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프랜시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레이나에게 관심이 있는 척하며 쉽게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근래 줄리어스 저택의 기강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있는 상태였다.
하인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어지간해선 침묵을 지켜야 할 주인집의 프라이버시이긴 했지만, 이 사안은 양쪽 모두에 해당했다.
목숨도 달려 있었고, 그녀의 신분이 바뀔 수도 있는 기회 같았다.
포드 백작가 정도의 명문가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설득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아서와 얽혀 있는 레이나의 사정이라곤 알 리 없는 하인의 눈에는, 줄리어스 후작의 사생아가 포드의 눈에 들었다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신분 상승 줄을 잡은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이미 프랜시스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지 않나.
결국 숨겨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하인이 폭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희가 원래 이런 이야기 옮기는 사람들이 아닌데……. 혹시 목숨 걸려 있는 일일까 봐 걱정이 되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하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실은……. 저희 사이에 얼마 전부터 물밑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후작님의 사생아가 저택에서 하녀들 사이에 섞여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만두어 행적이 묘연하다는 소문이요…….”
“……!”
트리스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래도 그게…… 프랜시스 님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뭐라고? 후작의 사생아?
트리스탄이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만.
각하의 혼인 계약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었지?
‘후작의 딸’ 아니었나?
그럼 이거…… 가능한 거 아닌가?
대부분의 하인들도 듣자마자 한 사람을 떠올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모두가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누군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
베일에 싸인 가족.
후작과 같은 금발에 크리스티나 아가씨와 다른 듯 닮은 외모.
묘하게 하인들 사이에선 겉돌면서, 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주치의 도련님 테일러와 알 듯 말 듯 염문을 뿌리던 하녀 애.
그녀가 사라진 후 그동안 레이나를 찾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이 더욱 수상하게 느껴졌다.
경악한 트리스탄의 시선이 프랜시스의 뒤통수로 향했다.
프랜시스는 정말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차 한숨을 내쉬며 하인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그게 진짜다, 아니다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 그 하녀가 실종되고 나서 소지품에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왔다지 뭐예요? 그걸 하녀들 여러 명이 봤다고…….”
프랜시스가 트리스탄이 묻고 싶은 말을 그대로 물어보았다.
“증거요? 그게 뭐죠?”
하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한 이야기라 점점 소리가 작아지는 게 속이 타 트리스탄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바짝 세웠다.
“그게 그러니까……. 그 애 소지품에서 후작 가문의 문장이 박힌 반지가 나왔다지 뭡니까……!”
줄리어스의 문장?
트리스탄은 거의 숨을 멈추었다.
“보통 한 달 넘게 돌아오질 않으면 ‘아, 일이 고되어서 야반도주했구나’ 하고 자리 정리를 하곤 하거든요. 이번에 허스트 부인 명령으로 자리 정리를 하다가 그걸 발견한 거죠.”
가문의 문장이 있는 장신구라는 건 보편적으로 귀족이 혈육에게 남기는 증거로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 친부가 후작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건데……. 갑자기 반지도 두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얘가 잘못되었거나 납치를 당한 게 맞는 거 아니냐……. 걱정스러우니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죠…….”
하인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근래 후작님 내외가 큰소리를 내며 싸우신 게 그걸 들켰기 때문인 것 같다고……. 두 분 싸우실 때 사생아라는 이야기가 나온 걸 들은 하녀들도 있다더라고요…….”
프랜시스가 신중하게 물었다.
“후작과 후작 부인 사이 싸움에서 사생아라는 얘기가 나왔다고요?”
“예에……. 그 후에 그 애가 사라졌으니 이건 그 애가 해를 입을까 봐 후작님이 빼돌린 거 아니겠냐구요. 아니면 후작 부인이 화가 나서 쓱싹해 버린 걸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무슨 해결사 길드에서 그 애랑 관련된 의뢰까지 있었던 것 같다고 아주 소문이 흉흉했습니다…….”
하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건…….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근래 조용히 법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혼외자 상속권 배제 소송을 접수한 것 같다지 뭐예요……? 그건 후작님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거잖아요?”
혼란 속에서도 정신이 번쩍 든 트리스탄이 눈을 부릅떴다.
뭐? 안 돼!
그게 진짜라면 상속권은 빼앗기면 안 된다고!
* * *
렘브란트는 프랜시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묘한 얼굴을 하며 웃었다.
“……상당하네요.”
“그렇죠?”
너무 증거를 잘 만들고 있었다.
뒤탈이 있을 정도로.
“꼭 진짜 같네요.”
일을 지나치게 잘하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봐도 어라, 싶을 정도로 그럴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만들었다는 증거가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몰래 증거만 만들어 둔다던 일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고 있는 거지?
후작은 몰래 증거를 꾸며 두고 그걸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묻어 놓을 생각이었던 거 아닌가?
게다가 상속권 배제 소송을 접수했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오히려 진짜 같아서 증거의 신빙성이 살았다.
정황 증거가 너무 딱 맞아떨어지다 보니 ‘사생아로 위장할까요?’ 하는 소리를 후작에게 직접 들었던 렘브란트까지도 설마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레이나 양이 후작의 사생아가 아닌 건 맞죠?”
“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그랬습니다. ……근데 다시 조사해야 하나 싶네요. 꼭 진짜 사생아이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저도 헷갈리네요.”
“레이나 양한테 직접 물어볼게요.”
“저도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렘브란트가 당황스러워하며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일파만파가 될 것 같은데.
예상한 것보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줄리어스의 하인들 대부분이 후작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생겼다.
후작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만 하나 정도 마련해 둘 셈이었을 텐데.
하녀들이 너무 빨리 알아챘다.
아니 어쩌면 후작 일가가 하녀들을, 그리고 그들의 곁을 지키는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너무 무시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집안의 일에 언제나 찍소리 않고 침묵하고 있던 입 무거운 하녀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자기들끼리 생각을 교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하녀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보는 것도 줄리어스라는 좁은 세상에서 억눌린 채 살아왔던 그녀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주인 내외가 자리를 비운 것도 이상 기류를 증폭하는 데 한몫했다.
친하지는 않았어도 동료였던 하녀가 무슨 해결사 의뢰의 타겟이 되었느니, 실종이 되었느니 하는 것도 하녀들에게는 현실적인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하녀들은 평소보다 자주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펄 공작 부인의 귀에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