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 노트에 담긴 것 (121/210)


#121. 노트에 담긴 것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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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이 가장 먼저 펼친 것은 푸른색 표지의 스크랩북이었다.

앞에서부터 빠르게 몇 페이지를 넘기던 트리스탄의 손이 멈칫하며 멈추었다.

기사 틈새에 과격하게 적힌 빨간 글씨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꼭 아서 경이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으면 좋겠다.

아서 경이 고소한다고 하면 이 기사는 내가 꼭 익명 제보할 거다.

죄목은 황실 모독죄, 허위사실 유포죄.

★제국법 X조 XX항 황실 모독은 최대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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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한 시선이 자연히 옆에 붙은 기사로 향했다.

그것은 웬 변방의 무명 기사가 스스로를 황제의 사생아라 주장하더니 기어이 후작가의 데릴사위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했다고 조롱하는 기사였다.

한 번 힘껏 구겼다가 식식거리며 마지못해 도로 펼쳐 모아 둔 듯 종이에 거칠게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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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이게?

트리스탄이 굳은 얼굴로 근처의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그는 이내 그것이 신문과 사원 소식지를 잘라 붙인 스크랩북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내용은 전부 아서와 징집군에 대한 것이었다.

약 4년에서 5년 전의 신문들로, 사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아서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이 썩 좋지 않던 때였다.

굳이 그의 존재를 찾아 조롱하는 사람조차 드물던 시기.

여론이 나쁘던 시절의 기사를 보고 울컥 화가 난 트리스탄은 본능적으로 두꺼운 두께감이 느껴지는 스크랩북의 페이지를 맨 뒤쪽으로 휙 넘겨 살펴보았다.

【 특별 기획, 세기의 개선장군 ‘아서 줄리어스’ 】

【 아서, 제국 전쟁사를 새로 쓰다 – 5년 전쟁 요약 】

【 줄리어스 후작. 사위 덕 보나. 새로운 선제후 권력 지도 ― 말을 아끼는 후작 부인의 모습 】

【 ‘전쟁의 신’ 알렉산더 루사익 2세와 아서 줄리어스의 업적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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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이 좋아져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직후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건 시간 순서대로 정리된…….

5년 동안의 아서의 소식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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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몇 장씩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황제, 황태자 구출 이후 첫 연설! ‘형제의 우애’에 기쁨 표현! ― 사실상 아들임을 인정!! 】

【 아서 줄리어스에게 황실 작위 수여되나? 】

【 줄리포브스 선정 ‘아서 경’에게 수여될 가능성이 높은 작위 1위는? 】

【 인정받지 못하던 서자 - 황실의 인정을 받기까지 】

【 아서 줄리어스의 외모 분석! ‘회색 눈’ 선황제 알렉산더 루사익 2세의 핏줄 가운데 유일 】

스크랩되어 있는 것은 대부분 아서에 대한 특별 기획과 그와 관련된 정치적 분석을 모아 둔 칼럼들, 아서를 그린 삽화들이었다.

중간중간 펜으로 메모를 해 둔 것도 보였다.

아서나 기사의 이름에 틀린 스펠링을 고쳐 놓은 것도 있었고, 내용 자체가 틀린 것에 대해선 조그만 화난 표정의 뱁새 그림과 함께 내용 정정이 적혀 있었다.

―구해 낸 포로 수 28명(X) > 288명(O)

―딜런 오스발드(X) > 딜런 오스본(O)

―아서 경이 애용하는 시가 페첼루아 상단 것 아님. 이 신문사 페첼루아 상단 뒷돈을 받은 듯.

틀린 내용을 고쳐 두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모략이나 비약을 하는 평론가에 대해서는

형편없는 기사

라는 짧은 촌평이 적혀 있었다.

아서에게 한결같이 부정적인 기자의 이름이 슬슬 트리스탄에게도 눈에 익을 즈음 그 옆에 적힌 무심한 메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백날 헛소리만 하는 놈.

순간 트리스탄의 입에서 풋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에 당황해서 트리스탄은 스스로 입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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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스크랩 사이 사이에 가끔 레이나가 직접 쓴 글이 보였다.

좋은 이야기에는 색연필로 칠한 밑줄과 별표, 약간의 정정만 붙어 있는 데 반해, 나쁜 이야기에는 직접 쓴 코멘트가 많이 달려 있었다.

―망언 정정 보도만 기다렸는데 이 기자 잘린 듯…….

이때부터 이 사람 기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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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남의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잊고 빠져들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전쟁 초기의 기사를 보는 일은 트리스탄 자신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였기에 저도 모르게 전사자가 많지 않은 후반부의 내용만 살펴보고 있었지만.

한동안 푹 빠져 뒤쪽의 내용을 살피던 트리스탄은 이내 무언가를 예감한 듯 전쟁 결과가 좋지 않던 스크랩북의 앞부분으로 돌아갔다.

아서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한 근 3년의 기사가 스크랩북 대부분의 두께를 차지하며 매우 많은 것에 비해, 초기 2년의 기사는 많지 않았다.

애초에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고 보도 자체가 자주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트리스탄은 과거의 기사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손으로 쓴 코멘트가 더 많이 달려 있었다.

―현지 조달?

(경악하는 뱁새 그림)

병법의 기본조차 모르는 칼럼.

자기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전쟁터에서 현지 조달하면서 글쓰길 바람.


―전쟁에서 보급의 중요성은 300년 전에도 상식이었다.

전쟁의 신이라 불린 알렉산더 루사익 2세조차 보급망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극상이 왜 아서 경 탓?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무기도 주지 않으면서 사지로 진군하라는데 하극상을 하지 않을 병사는 없다.’ <하이넬 병법론 1조 1항>

트리스탄의 눈이 칼럼으로 향했다.

그녀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굶어 죽으나 군법에 처형되나 똑같다며 반발하는 병사들을 장교들이 군법대로 처리하지 않았으니 사령관에게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증거’라며, 연이은 패배가 아서의 탓이라고 비판하는 칼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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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도 이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적으로 적혀 있는 코멘트에 동감했다.

애초에 그 병사들을 처벌해야 하는 기사와 장교들도 급여를 받지 못해 탈영을 고민하던 상태였는데 뭘 바란단 말인가.

종종 아서의 전쟁 성과나 혈통에 대해 부정적으로 조롱한 기사는 구깃구깃해진 채 붙어 있었다.

가끔 분노의 메모나 반박이 길게, 혹은 짧게 쓰여 있었고.

조용히 접힌 채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중에는 옳은 비판도 있었기에 가슴이 쓰렸다.

심호흡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트리스탄의 손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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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 없이 앞뒤가 비워진 페이지 왼쪽에 그들의 첫 번째 승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2년간……. 참혹한 연전연패가 계속되던 시기를 거친 후.

그들이 거두었던 작지만 값진 승리였다.

그 아래 또박또박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서 경의 첫 승리.

다른 긴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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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갑자기 뭔가 울컥해 입술을 콱 말아 물었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가 아니었다.

전사자가 많았고, 초라하고 슬픈 승리였다.

그럼에도 트리스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픈 첫 승리였다.

그 승리 이후에도 그들은 다음의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여러 번 끔찍한 패전을 거듭해야 했다.

그래도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이 되었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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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일단 그 책을 내려놓고 다른 오래된 스크랩북들을 들추어 보기 시작했다.

최소한 다른 책들도 정체가 뭔지는 파악해야 했으니까.

팔락.

검은 표지의 스크랩북에는 펄 공작 부인, 카일 황태자, 마리아 황후와 그레이엄 황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후작 내외, 아서의 측근 기사 등 아서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기사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색 표지의 스크랩북에는 전쟁과 줄리어스 영지의 사정, 황실의 반응, 자잘한 사건들과 관련된 기사들이 시간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 열어 본 푸른 표지가 아서에 대한 것.

검은 표지는 아서의 주변 인물에 대한 것.

회색 표지는 그 외에 연관이 있는 보도, 주로 평론이 아닌 단순 사실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 같았다.

페이지를 넘기던 트리스탄의 손이 회색 표지의 스크랩북 어느 지점에서 다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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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 보도된 패전 기록이었다.

또다시 참패한 전투였다.

붉은 협곡 전투.

그것은 딜런이 포로로 붙잡혔던 전투에 대한 기사였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기사들이 포로로 붙잡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던 절망적인 전투 결과에 대한 보도 기사가 그곳에 스크랩되어 있었다.

회색 표지의 스크랩북에는 코멘트가 달린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그곳에는 구석에 작은 글씨가 적힌 편지지가 끼워져 있었다.

보내지 못한 위문편지 같았다.

술을 마시고 쓰기라도 한 건지 글씨가 흐물흐물 날아가고 있었다.

―아직 딜런 경과 많은 병사들이 살아 있어요.

제가 미래에서 봤거든요.

X월 XX일 기사로 날 거예요.

종이가 우글우글하고 유독 글씨가 번져 있는 이유를 트리스탄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곧 플람베르 평원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시게 될 거예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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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세요.

트리스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거칠게 손등으로 눈을 문지른 뒤 몸을 돌렸다.

툭.

트리스탄의 팔꿈치에 부딪혀 레이나의 새 노트가 아래로 떨어졌다.

파라라락.

조그만 잠금장치가 달린 노트가 열리자 안쪽에 있는 페이지들이 바람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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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서와 재회한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가 새로 쓰기 시작한 그 노트는 신문 스크랩이 아니라 직접 그린 그림들로 대부분의 페이지가 채워져 있었다.

군데군데 엽서나 말린 잎, 꽃 따위를 붙여 둔 페이지가 좀 더 묵직하게 벌어졌지만…….

그런 페이지는 소수였고, 그곳에 담겨 있는 것은 대부분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풍경 스케치 몇 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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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서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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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트리스탄은 할 말을 잊고 굳어 버렸다.

아서의 그림이 가득 그려진 노트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의 아내였다.

만삭으로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고 혼자 아이를 낳았을 아내.

아내가 그 아이를 혼자 키웠다.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멍하니 아서의 그림을 보던 트리스탄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스크랩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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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아내가 말하지 않은 고통과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쳤다.

비로소 ‘아내의 시간’을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그녀인 것처럼,

아서의 아내는 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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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의 머릿속에 레이나 아스타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매일 아서를 기다리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아서가 삼 분의 일을 차지한 줄리어스 저택의 풍요로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서의 성공적인 정착에 생계가 달려 있는 수많은 목숨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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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비로소 그녀를 보내 주겠다는 아서의 선택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트리스탄은 노트를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노트의 맨 앞에 끼워져 있는 두 사람의 ‘혼인 계약서’가 바람에 팔락였다.

승전 이후 귀환하던 길.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군대를 등 뒤에 남겨 둔 채 열흘 거리를 이틀에 주파했던 그의 존경하는 총사령관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 후에 이어진 아서의 선택이 발밑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함께한 전우들이 받은 보상과.

줄리어스가 병사들에게, 그리고 유족들에게 약속한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이제야 발을 뻗고 편하게 자는 전우들이, 아직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며 도움이 필요한 전우들이.

이제 다섯 살이 된 자신의 아들과, 떠날 때는 스물다섯이었으나, 자신을 기다리며 서른이 된 아내가 떠올랐다.

그들을 지켜 주기 위해 아서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것이 시력을 잃고도 자신이 잃은 것은 별것이 아니라며 덤덤히 웃던 아서의 선택이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트리스탄은 스크랩북과 노트를 원래 자리에 허겁지겁 돌려놓고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당장 아서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우연히 듣게 된 뜻밖의 소문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것은 저택에서 일하다 실종된 ‘후작의 사생아’에 대한 소문이었다.

트리스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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