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흔들립니다 (120/210)


#120. 흔들립니다
2022.10.23.



“거절하신 이유가 뭐죠?”

사원 자리에 착석하며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전우들을 아끼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합법적인 돈일 텐데요.”

아서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당신 지참금을, 제가요.”

크리스티나 역시 정면의 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될 것 있나요? 부부잖아요.”

아서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무표정한 낯으로 다리를 꼰 채 말했다.


“레이디의 지참금은 남자가 손대지 않는 것이 도리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레이디가 자발적으로 내놓는다면 책잡힐 것도 없습니다.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이고요.”

“괜찮습니다. 가지고 계시지요.”

“제 돈은 안 받겠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딱히요. 일반론입니다. 결혼한 후에 제안해 주신다면 고려하겠습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아하,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눈동자만 그쪽으로 돌리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아직 저에게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 봐요. 굳이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걸 거듭 말씀하시는 걸 보니……. 결혼식의 대신이라기엔 부족하겠지만 전에 드린 제안은 지금도 유효해요.”

아서는 눈동자만 무감하게 움직였다.


 


“조급하십니까?”

순간 자존심이 상한 크리스티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리스티나가 천천히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웃는 얼굴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으시고, 제가 드리겠다는 건 다 거절하고 계시기에 당신을 도발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습니다.”

아서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역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출자하겠다 한 건 ‘상이군인 재단’인데 상이군인 재단 이사장직이 아닌 참전 용사 재단의 이사장직을 요구했죠. 이유가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거절한다 하니 거절한 이유나마 말해 주는 것인가.

크리스티나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상이군인 재단 이사장직’보다는 ‘참전 용사 재단 이사장직’이 당신의 레이디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데에 이유씩이나 필요한가요? 당신은 상이군인도 아닌데요.”

아서가 다시 정면으로 눈동자를 돌리며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미사가 시작되었다.

* *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는 어떻냐는 아그네스의 질문에 아서가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직 사이가 좋기 어렵기는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잘해 나가 봐야죠.”

아서의 목소리가 덤덤히 이어졌다.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거래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있고 제 효용성을 인정하는 것 같으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 부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 나와 황실이 너의 혼인을 주선할 때는 그게 이런 모습이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네가 혼인을 언급하는 태도가 나의 죄를 돌아보게 만드는구나.”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옅게 웃었다.

자조하는 듯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모님께서 신경 써 주신 혼인인데. 그런 뜻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대모님께서 우려하시는 것보다는 저를 존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변명이지만 제가 혼인에 대해 이해할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배워 가 보겠습니다.”

가까이는 결혼식 이후 출정하여 이제 돌아온 아서가 결혼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였고, 좀 더 멀리는 아서에게 제대로 된 부모가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황제야 말할 것도 없고, 로아스 자작 내외는 아서에게 어색한 아랫사람이었지 부모님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돈만 보내고 이름만 걸어 둔 걸 부모라곤 안 하니까.


“……귀족의 혼인이 거래라는 건 사실이다. 특히 너의 혼인은 더욱 그랬지.”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게 가장 좋은 거래 조건을 가져다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널 행복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일이 이렇게 되고서야 드는구나.”

아서가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아그네스는 지나가듯 물었다.


“쓸모없는 질문일 수 있겠다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레이나 아스타린 중에 그나마 이 사람이 내 부인이다 싶은 쪽이 있니?”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다 조금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대모님. 조금 변하신 듯합니다. 다정해지셨네요.”

아그네스는 무심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마음 쓰지 말렴. 네가 성공해 돌아오니 괜히 신경 쓴 생색을 내고 싶어지는 모양이니.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게다. 너는 냉정해져야 한다.”

아서는 피식 웃고 자연스럽게 질문을 회피하려 했지만 아그네스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쪽.”

“…….”

아서가 웃으며 말했다.


“선택권이 저에게 있지 않은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으니 위험에 휘말릴 수 없을 테고, 좋은 남자가 곁에 있으니 물러나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작 부인은 빤히 아서를 보다가 물었다.


“그렇다기엔 꽤 질투하는 것 같더라만?”

아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막상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니 남들처럼 날 기다려 준 부인이 있었으면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 몫이 아닌 욕심이겠지요. 냉정해져 보겠습니다.”

“…….”

아그네스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떤 이유로든……. 그 애를 네 곁에 묶어 두고 싶다고 해도?”

“…….”

아서는 놀라지도 않고 옅게 미소 지었다.


“대모님. 그러지 마십시오.”

“…….”

“흔들립니다.”

 

* * *

트리스탄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참전 용사 재단을 만드는 게 괜찮을 것 같다고.”

빨래를 널던 레이나가 얼떨떨하게 멈춰 서 물었다.


“네?”

트리스탄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전에 지나가듯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요. 혹시 그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이나가 조금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트리스탄이 자기를 그리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리스탄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조금 참고하고 싶어서요.”

“아…….”

레이나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아 나왔다.


“음……. 별거 아니었긴 한데요…….”

레이나는 천천히 자기 생각을 말했다.


“어느 집은 유족 연금 재단, 어느 집은 상이군인 재단, 어느 집은 참전 용사 보상……. 이렇게 보상을 다르게 나누어 받는 것보다는 모두 같은 기관에서 받는 편이 낫지 않나 해서요. 아무래도 전쟁이 끝나 제대한 후에는 보람과 기쁨도 있겠지만 허탈감이나 박탈감도 있을 텐데 같은 곳에 소속감을 가지는 게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연합 재단이 생긴다면 이름은 ‘참전 용사 재단’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였어요…….”

오 년간 신문 기사 수집을 통해 쌓은 소양과 깊은 관심에서 비롯된 통찰력이 자연스럽게 레이나의 말에 녹아들어 나오기 시작했다.


“상이군인이나 유족 연금만 특별히 관리하는 곳을 두는 것도 좋겠지만, 포괄적으로 ‘참전 용사 재단’이라고 만들면 좀 더 융통성 있게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거고, 군이 폐하 명령에 의해 해산한 후에도 아서 경과 기사분들, 징집병들에게 힘이 될 것 같아서…….”

레이나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만졌다.


“물론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요…….”

“…….”

레이나는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근래 점점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편해졌는지 레이나는 서서히 말문이 트이고 있었다.


“저……. 딜런 경 일을 들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회복하셔서 복귀도 하셨다고……. 그러니까 상이군인 재단에 그분의 자리가 있는 거죠?”

“아……. 예. 그렇게 될 겁니다.”

레이나가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정말 잘됐어요. 딜런 경 같은 존경받는 기사님이 복귀하셔서 재단의 상징적인 위치에 있어 주시면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될 거예요. 참전 용사 재단이든 상이군인 재단이든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

뭐지?

레이나가 그들과 똑같은 고민을 했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역시 수상했다.

종군을 한 것도 아니고, 분명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 않은 여자인데.

정보 수준이 상당하다.


‘아서 경과 군의 상황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냥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정확한 분석과 통찰이 범상치 않다.

무슨 방법으로 우리 내부 정보를 듣고 있나?

어느새 레이나는 스스로 이야기에 푹 빠져 아서와 황실의 관계, 아서에게 수여될 가능성이 있는 작위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서 경이 받는 공작위라면, 그걸까요? ‘피츠로이’? 왕의 서자에게 전통적으로 주던 공작위니까요. 하지만 전쟁 훈장으로 받으시는 작위니까 그런 것보단 조금 더 포상의 의미가 있는 작위면 좋을 텐데요…….”

“…….”

레이나가 손끝으로 스스로의 입술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아서 경 입장이 황태자 전하의 견제를 받는 미묘한 상황이니까, 황실의 충신이라는 의미로 공신에게 주던 작위를 받는다거나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전통적으로 권위 있는 작위가 몇 개 있을 텐데…….”

레이나를 보는 트리스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

뭐야…….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그보다 왜 저렇게 흥분한 상태로 말하는 거야?

분석은 통찰력이 있고 치밀한데, 말하는 태도는 뭔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

정보원을 심어 둔 세작이라고 의심하기엔 맥이 빠질 정도로 허술한 느낌이었다.

누가 물어봐 주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서 앞뒤 없이 술술…….

트리스탄은 뚫어져라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그런 분석을 펼치면 수상해 보일 거라는 자각이 없나?

아니면 저런 태도가 오히려 경계심을 낮추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레이나가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산책을 나간 후.

트리스탄은 심각한 얼굴로 몰래 루칸을 불러 물어보았다.


“루칸.”

“예, 형님.”

트리스탄이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납치했을 때, 저 여자 혹시 뭔가 수상한 것 없었어? 반사적으로 호신술이 튀어나왔다거나……. 뭔가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거나. 무슨 기술이나 힘을 숨기는 기색이 있었다거나…….”

“…….”

루칸은 이 형님 진짜 사람 보는 눈 없다는 듯이 트리스탄을 쳐다보다가 지루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트리스탄이 채근했다.


“우습게 여기지 말고 잘 좀 생각해 보라니까? 생각나는 게 없으면 앞으로라도 좀 주의 깊게 살펴서…….”

루칸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어 그를 밀어냈다.


“예, 예. 그거참……. 뭐 무시무시한 힘을 숨긴 걸 발견하게 되면 가르쳐 드릴게. 됐수?”

“좀 진심으로 살펴보라니까.”

“아. 재밌겠네요. 심심한데 세작한테 틈틈이 호신술이나 가르쳐 볼까요? 뭐 배운 게 있으면 티가 나겠죠.”

루칸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레이나를 호위할 겸 지켜보러 가버렸다.

트리스탄이 초조하게 얼굴을 굳혔다.

……저 여자 뭔가 숨기는 게 있다니까?

아서 경이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나는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고!


“…….”

트리스탄은 심각한 얼굴로 서 있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레이나가 할머니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 위층은 비어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트리스탄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비어 있는 레이나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녀의 물건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

방을 살피던 트리스탄은 마침내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노트와, 가죽끈으로 묶인 오래된 스크랩북을 발견했다.


“이건…….”

예전에는 비어 있는 노트였지.

사용감이 생겼다.

꾸준히 쓴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뭘 적었을까?

혹시 우리의 정보를 적었을지도…….

노트를 먼저 집어 든 트리스탄의 시선이 그 아래 있는 스크랩북으로 향했다.


“…….”

이 오래된 건 뭐지? 엄청 두꺼운데.

딱 봐도 어딘지 수상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발견하기 어렵도록 다른 물건들 사이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트리스탄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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