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 바닷가 별장의 후작 대부인 (119/210)


#119. 바닷가 별장의 후작 대부인
2022.10.20.


바닷가 별장.

후작 대부인 패트리시아 줄리어스가 백사장으로 향한 안락의자에 앉은 채 무릎 위의 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바다를 보며 시중 하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본가에 있는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보내온 보고였다.


“……하여,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는 집사장과 함께 수도로 출발하였고, 허스트 부인은 크리스티나 아가씨와 함께 영지에 남아 그 아이가 후작님의 사생아라는 증거를 마련해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

패트리시아 줄리어스는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을 가만히 멈춘 채 하얀 포말이 이는 백사장만 바라보았다.


 
시중 하녀가 조심스럽게 대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

이내 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납치돼 행방불명이라더니. 어디 있는지는 알고?”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허스트 부인에게 명령 남겨두고 찾는 대로 보고하라고는 하셨답니다.”

패트리시아가 눈을 찌푸렸다.


“마틸다는? 생판 남을 사생아라 하자는데 가만있어?”

하녀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당연히……. 노발대발하신 모양이에요.”

패트리시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탄식했다.


“하…….”

자기 잘못도 아닌데 면목이 없어 이야기를 전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 혹시 문제 생길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서 몰래 준비만 해두신다고요…….”

패트리시아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

그렇구나. 그게 내 아들의 해법이구나.

그 애를 네 사생아로 꾸민다고?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나.

이내 패트리시아는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대부인의 무릎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하얀 고양이의 꼬리가 장난치는 듯 흔들렸다.

패트리시아는 아들의 행보에 대한 말로 그저 한마디만 했다.


“안토니오는 그런 명령을 하며 그 애 부모가 누군지 조사도 시키지 않았다니?”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위증을 시킬 생각이었는지 조사를 시켰다곤 하더라고요……. 하지만 양친 모두 돌아가셨고 가족은 할머니뿐인데 연로하여 증언은 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이야기하니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패트리시아는 헛웃음을 한 번 짓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이제 와서 사기 결혼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그놈이 무슨 짓을 벌이든 어쩔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 일을 막았으면 모르되, 그때 막지 못했으니.

오 년 전 그 일을 전해 들었을 때는 이미 저질러진 후였다.

언젠가 한 번 더 그 아이의 소식을 들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어렴풋이 예감은 했었던 듯했다.


“…….”

대부인이 이미 오래전 아들인 후작과 연을 끊었고 본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시중 하녀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허스트 부인에게 하지 말라고 전할까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패트리시아의 목소리는 초연했다.


“이미 그 녀석은 내 손을 떠났다. 알잖니.”

“하지만, 마님…….”

“알아서 하게 둬라. 정 심각한 일이 생기면 올가가 말을 하겠지.”

패트리시아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목숨 달린 일만 아니면 굳이 보고하지 말려무나. 같이 살며 때려잡아도 못 잡았는데 여기서 뒷방 늙은이가 하는 말을 선제후 감투까지 쓰게 된 놈이 퍽이나 듣겠니. 저 잘났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터인데.”

“…….”

그렇게 제멋대로 살다가 한번 매운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릴 것을, 도리어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아 버렸으니.

제 손으로 가문의 전성기를 열었노라, 선제후 자리까지 따냈노라, 곧 황제 할아비라도 될 듯 우쭐대고 있겠지.

제 아비랑 똑 닮아가지고.


“두려무나, 제 복 찾아가게. 그리고 어차피 그 애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네…….”

“이대로 찾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 애 복이고. 여기서 더 얽힌다면 천상 그 집에 들어갈 운명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침묵이 흘렀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서지는 솨아아 소리만 들렸다.

잠시 틈을 두고, 시중 하녀가 머뭇거리며 손에 초대장을 들었다.


“……그리고 저어……. 후작님께서 황실의 초대장을 보내오셨습니다.”

“황실 초대장?”

“네……. 개선식 겸해서 줄리어스 후작님의 선제후 임명식이랑 아서 경 작위 수여식이 있다고요. 후작가의 가장 큰 어른이시니 가능하시면 대부인께서도 참석 바란다는데요…….”

그런 의미로 예우하여 초대한다면 당연히 직접 오거나 예법을 아는 아랫사람을 보내 정중하게 초대의 말을 전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초대장만 덜렁 전달하다니.

물론 후작이 직접 왔다 해도 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패트리시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됐다. 황실에는 노파가 몸이 안 좋아 불참한다고 답장 보내고 태워 버리렴. 그놈 꼴 안 보겠다고 나와 사는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수도까지 가서 내가 저놈의 모친입네 망신을 당하겠니.”

시중 하녀가 우물쭈물했다.


“망신이라뇨……. 지금 제국에서 줄리어스의 명성이 얼마나 높이 빛나고 있는데요. 후작님께서도 마님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 하실 거…….”

패트리시아가 픽 웃었다.


“너는 방금 안토니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네 입으로 전해 주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진작 나오기를 잘했다.

이 꼴 저 꼴 안 보는 게 제일이지.

이런 것조차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자꾸 목숨 달린 일들이 벌어지니 완전히 끊을 수도 없었다.


“앞으로는 진짜 목숨 달린 일 아니면 아예 보고도 하지 말려무나. 마음 어지럽다.”

“네…….”

패트리시아는 무릎 위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

딸에게 아버지 무덤이나 보여주고.

조용히 그곳에서 딸아이와 여생이나 보내고 싶다더니…….

딸을 먼저 보내고. 너와 나는 이렇게 남아서.


“…….”

인생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삶이로구나.

이오나.


“…….”

시중 하녀는 조용히 물러나며 다른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오늘 밤에는 마님께서 술을 좀 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케이가 크리스티나 쪽으로부터 전해져 온 제안서들을 가져와 아서의 책상에 반, 기사들이 모인 테이블 위에 반 내려놓으며 말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측에서 보낸 상이군인 재단 자금 조달 계획서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투자 규모와 자금 출처, 운영에 대한 제안이 적혀 있습니다.”

루칸이 산더미 같은 서류를 보며 조금 놀라 물었다.


“제안서? 레이디 크리스티나 본인이 직접 썼나요?”

케이가 싱겁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이것만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직접 썼습니다.”

케이가 손가락 끝으로 문서 마지막에 적힌 ‘크리스티나 폰 데어 줄리어스’라 적힌 서명을 가리켰다.


“내용은 일하는 사람들이 작성했습니다. 책임 작성자 이름이 따로 적혀 있어요.”

“아하.”

케이가 간단하게 제안서 내용을 설명했다.


“재단에 출자하겠다 제안한 금액에는 지참금이 절반, 그리고 루모스 상단을 비롯한 상단들의 투자가 절반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지참금은 각하께서 성공적으로 전쟁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 돌아옴으로써 혼인 계약서에 의해 자동 확정된 것이고요.”

줄리어스에서 크리스티나의 혼인에 포함시킨 지참금은 아서의 소유인 것, 크리스티나의 소유인 것, 둘의 공동 소유인 것 세 가지 종류로 나뉘어 있었고, 아서의 소유인 것은 전쟁 자금으로 이미 대부분 집행되었다.

크리스티나는 나머지 지참금 중 공동 소유인 것과 크리스티나의 개인 소유인 것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며 참전 용사 재단의 이사장직을 요구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개인의 품위 유지비로 책정된 지참금이 거대 상단 몇이 고심하여 출자한 금액과 맞먹을 정도이니 대단한 액수였다.


“그리고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출자의 대가로 본인을 ‘참전 용사 재단’에 이사장으로 지명해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가 요구한 이사장직이 ‘상이군인 재단 이사장직’이 아닌, ‘참전 용사 재단 이사장직’이라는 것이었다.

‘유족 연금 재단’은 있었지만 ‘참전 용사 재단’은 없었다.

그것을 들은 트리스탄이 의아하여 물었다.


“……‘참전 용사 재단’요? ‘유족 연금 재단’을 말하는 겁니까?”

루칸이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재단 이름을 착각한 거예요?”

물론 재단 이름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가 기사들 앞에 있는 여러 개의 제안서 중 하나를 맨 위로 올려 집어 들며 말했다.


“출범할 예정인 상이군인 재단과 유족 연금 재단을 포괄하여 ‘참전 용사 재단’으로 새로 설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곳에 이사장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나 아서는 듣지도 않고 답했다.


“거절해.”

케이는 이의 없이 가볍게 경례하며 대답했다.


“네. 전달하겠습니다.”

루칸이 눈을 굴리며 물었다.


“거절합니까?”

케이가 대신 답했다.


“참전 용사 재단의 설립 자체는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이미 군인들과 유가족들에게 돈을 뿌리며 자신의 이미지를 그에 적합하게 설계했으니까요. 하지만 줄리어스 후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후작이 없는 사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각하와 협상해 유족 연금 재단을 삼키려 드는 건 분란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루칸이 턱을 만졌다.


“호오.”

트리스탄은 묘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스치듯 레이나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그럼 ‘참전 용사 재단’ 이사장직은 어렵다고 전달하겠습니다. ‘상이군인 재단’ 이사장직으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검토할까요?”

“아니, 돈도 안 받겠다고 해.”

그것은 의외였기에 기사들이 모두 멈추었다.

돈도 안 받는다고?


“레이디 크리스티나 나름대로는 각하와 군인들에게 다가가며 관계를 좁히려는 시도일 텐데요. 이걸 거절하면 사이를 개선할 생각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지참금은 재단에 넣지 마. 설령 혼인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재단에는 영향 안 가는 방법으로 구성해.”

트리스탄이 물었다.


“……각하. 혼인에 여기서 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이미 눈치챈 사람이 많아. 이 혼인은 결국 마리아 황후나 교단으로부터 정당성을 공격받을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해.”

아서가 말을 이었다.


“독립적으로 구성해. 설령 그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재단에는 문제없도록.”

케이가 우려스러운 얼굴로 제안서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하지만 이미 유족 연금 재단에서 줄리어스 후작 영지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자금을 받았으니 혼인이 틀어질 경우 그쪽도 다 흔들릴 텐데요.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지참금만 받지 않는다고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서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지참금은 받지 마.”

“…….”

상의가 아닌 명령이라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서는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개선장군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크리스티나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부하들에게 전적으로 맡긴 채 레이나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왜 레이나 생각이 나며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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