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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대화 (118/210)


#118. 대화
2022.10.16.


레이나는 공작 부인과 따로 독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를 알고 있었어요?”

“네?”

“처음 만난 날, 날 보자마자 뿌리치고 도망치기에. 그냥 바빠서 도망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레이나가 당황했다.


“그, 그건……. 죄송해요…….”

공작 부인이 웃었다.


“역시 알고 도망친 거였군요?”

다른 사정이 있었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을 텐데.

레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보자마자 알지는 못했는데……. 옆에 계시던 부인께서 공작 부인을 살짝 부르셨잖아요. 그거랑…… 부인께서 소개하신 이름을 듣고 알았어요…….”

“내 이름?”

“네. 바실리사라고 소개해 주셔서……. 부인의 세례명이잖아요.”

공작 부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걸 듣고 나인 걸 알았다고? 내 세례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네? 정말요?”

“바실리사라는 이름을 듣고 내가 펄 공작 부인이라는 걸 한 번에 맞춰낸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어요.”

레이나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레이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원 소식지에서 봤는데……. 다들 아는 줄 알았어요…….”

원래 아그네스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편이었다.

주변 이야기를 에둘러 돌아가며 천천히 벽을 무너뜨리는 대화 같은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레이나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취향도 환경도 너무 다른, 심지어 아서에게 괘씸한 짓을 저지른 어이없는 평민 여자애일 뿐인데.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묻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붉어진 얼굴로 눈치를 보며 긴장해 대답하는 게 귀엽고 안쓰러웠다.

내가 이런 사람에게 물렀나, 싶을 정도였다.

이미 반짝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온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 * *

레이나의 아픈 할머니와 5년 전 혼인에 관련된 사정을 모두 들은 공작 부인이 눈을 꽉 감으며 탄식했다.


“아……. 줄리어스.”

레이나의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오랫동안 고용해 주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해 준 고용주인데.

너무 안 좋게 느껴지게 말했을까?

결국 아서 경의 본가가 될 곳인데.

게다가 공작 부인은 고용주의 입장일 텐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몹쓸 인간들이구나. 가족의 안위를 빌미로 잡아 힘없는 사람을 협박하다니.”

레이나는 협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은 공작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아그네스의 강한 표현에 레이나는 쩔쩔매며 어쩔 줄 몰랐다.

어쨌든 잘못한 것은 자신인데, 너무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협박당한 건 아니에요. 제가 선택한 일이었어요. 제가 후작 부인이 제시했던 대가를 받고 싶어서, 아서 경을 속이고…….”

아그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이 막지 못한 탓이다. 너는 그 횡포를 막을 방법이 없었잖니. 내가 혼인성사에 직접 참석했다면 감히 그러지 못했을 텐데.”

레이나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거예요.”

“…….”

레이나는 자신이 그 일을 이용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저는 지난 오 년간, 후작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좋은 것은 다 누렸다.

할머니에 대한 오 년간의 후한 보살핌을 누렸고, 돈을 받았다.

심지어 아서 경이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걸 보며 남몰래 내 남편 잘한다며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주제넘게.

종종 그 일 덕분에 다른 궂은일도 피할 수 있었다.

싫은 하급 귀족에게 지목당해 첩으로 팔려 갈 위기도, 이 일을 내세워 후작 부인에게 읍소하였더니 넘길 수 있었다.

최근에는 눈에 띄지 않게 몸을 피했다 온다면 더 좋은 대우를 해 준다는 말을 들었다.

레이나는 그 말을 듣고 횡재라 여기며 반가워했다.

아서 경과의 혼인으로 제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아서 경은 피해만 입었고 저를 배려해 주기만 했다.


“…….”

레이나는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 그 혼인으로 할머니를 구했어요. 공작 부인께서 그 혼인이 잘못된 걸 알아채고 막으셨다면 저는 절망했을 거예요.”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황급히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주책이야.

왜 이러는 거야.

레이나는 애써 웃었다.


“아서 경은 저한테 잘해 주셨어요. 전 상처받지 않았어요. 물론 제가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알고 그러셨겠지만……. 저는 평범하게 살았다면 평생 못 받았을 귀한 대우를 받았는걸요. 아서 경께는 감사하고 죄송할 뿐이에요.”

레이나는 다시 다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제 사정으로 아서 경을 기만했고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끼쳤으니 모든 분들께 죄를 지었어요. 하지만 더 이상 이 혼인이 틀어져서 기사 분들이나 아서 경께 피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만 있으면 뭐든 할 거예요.”

“…….”

공작 부인이 레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나.”

까마득한 분에게 이름을 불리는 기분이 이상해 레이나는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부인.”

아그네스의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었다고 그것이 정말 너에게 있는 권리였니? 너에게 다른 도리가 없었다면 그건 협박이란다. 그리고 네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이 했을 거야. 그건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

공작 부인이 레이나의 팔을 짚었다.


“고생했다.”

“…….”

레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

아그네스는 탄식했다.

아서의 마음이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

사실은 공작 부인이 결코 용납했을 일이 아니었다.

원칙주의자인 그녀가 용서했을 아이도 아니었다.

아마 돌이킬 기회가 있대도 레이나는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하지만 아서의 마음이 눈에 보였고, 레이나와의 대화는 아그네스의 마음을 녹였다.

아그네스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결론을 내렸다.

공작 부인이 레이나의 손을 다독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이 고민해 보자. 내가 너와 네 할머니를 보살펴 주마.”

 

* * *

아서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오나 산. 할머님의 성함입니다.”

테일러가 짧게 소개했다.


“…….”

할머니는 아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할머니는 뜨개질 직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서의 눈에 익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할머니. 저희 조금 있다가 올게요. 아서 경과 잠시 인사 나누세요.”

두 남자가 조용히 밖으로 나간 후에, 아서는 천천히 다가가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레이나의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

할머니는 여전히 뜨개질 직물만 조물거렸다.

할머니는 의사를 의지하고 있는 듯, 테일러가 나간 문 쪽을 조금 힐긋거리며, 아서는 바라보지 않고 피했다.

아서는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서입니다.”

“…….”

할머니의 증상에 대해서도 꾸준히 보고 받아왔기에, 아서는 대답 없는 할머니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조용히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아내가 누구를 닮아 그리 미인인가 했는데. 할머님께서 미인이셨군요.”

“…….”

아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누구의 가족 자체를 어색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는 전사자 유가족을 방문했고, 기사들의 가족도 종종 만났다.

하지만 레이나의 가족은 어려웠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잘해 주고 싶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아서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입고 계신 옷, 제가 골랐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

“아내가 할머님을 무척 좋아합니다. 저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어요. 저는 가족이 딱히 없지만, 아내가 말하는 것만 봐도 할머님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아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언제 한 번 할머니를 업어드리기로 아내와 약속했는데. 지금은 무리겠네요.”

아서가 시선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창문 밖에서 낙엽 소리가 부서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아서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아내가 할머님 가르침을 제게 전해 준 적이 있습니다.”

“…….”

아서가 피식 웃었다.


“저도 제게 주어진 것들 중에……. 1할이나 2할을 저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아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해 보았다.


“그럴 수 없어서 그런가. 당신 말씀대로 사는 게 다소 팍팍한 것 같습니다.”

“…….”

할머니는 아서를 한번 바라본 뒤, 뜨개질감으로 다시 무심히 시선을 내렸다.

* * *



“그럼 집사장 짐은 우리와 함께 가지. 하녀장은 저택에 남게 하고.”

“허스트 부인은 크리스티나와 함께 오는 걸로 해요. 크리스티나한테도 돌봐줄 부인이 필요하니까.”

“그럼 집은? 크리스티나가 떠나온 후에는 하녀장도 집사장도 두지 않고 비워? 그래도 집이 돌아가?”

“부집사장과 수석 하녀는 남겨둘 거예요. 모시는 어른들도 없으니 그 정도는 돌아갈 거예요.”

하인들에게 짐을 싸라는 명령을 내린 후작 부인은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너도 우리랑 같이 출발할래?”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후작 부인이 불안하게 물었다.

크리스티나는 그녀를 바라본 채 이상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서 경을 두고 저만 부모님이랑요?”

……역시 좀 아닌가?

후작이 쏘아붙였다.


“결혼식도 하기 전에 불화설이 돌면 데뷔탕트 참 볼 만하겠군.”

후작 부인이 주저하며 우물거렸다.


“아서한테 한번 말이라도 해 보지…….”

후작이 퉁명스럽게 비웃었다.


“개선식하러 수도에 들어가는 개선장군이 군을 뒤에 남겨 두고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 손 잡고 선발대로 수도에 입성한다고? 되겠어?”

“…….”

후작 부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후작을 향해 도끼눈을 했다.

무리인 걸 알지만 후작이 말하니 짜증이 났다.

자기가 뭘 안다고?

군대나 기사단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건 나와 똑같으면서.


“카일 황태자도 먼저 자기 군을 끌고 따로 수도에 들어갔잖아?”

“그야 황태자는 황궁이 자기 집이니 그렇고. 아서 집은 여기잖아? 황제 폐하의 부르심이 있어야 들어가지. 원, 모르면 가만히 있어.”

크리스티나가 끊었다.


“아버지, 목소리가 커요. 하녀들이 들어요.”

후작이 팽 코웃음 쳤다.


“너나 잘하거라. 널 뒤에 남겨두고 먼저 이곳을 떠나는 마음이 오죽 불안하면 우리가 이러겠니.”

크리스티나가 비웃었다.


“아무렴 수도에 아버지를 먼저 보내는 제 마음만 하겠어요?”

 

 

* * *

후작과 후작 부인은 수십 대의 짐마차와 수행인들을 이끌고 수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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