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동상이몽 (115/210)


#115. 동상이몽
2022.10.06.


하녀가 가져다 둔 신문들을 훑어본 후작이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도가 왜 이렇게 밍밍해? 대주교가 인터뷰한다더니 안 했어?”

세기의 커플인 아서와 크리스티나가 영지에서 다시 올리는 공개 결혼식이니 좀 더 대대적인 분위기로 보도될 줄 알았는데.

척하면 척하고 알아서 잘하던 사람이 웬일이지.

이 사람 감이 떨어졌나?

보도가 되긴 했는데 1면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께 실릴 줄 알았던 대주교의 인터뷰와 삽화, 사원이 따로 기고할 줄 알았던 축복의 말도 빠졌다.

물론 수많은 신문사의 일간 보도야 대주교 관할이 아니지만, 큰 행사라는 뉘앙스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일반적인 혼인처럼 한 줄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영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이게 대대적인 행사라는 인상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오 년 전 둘만 조용히 올린 혼인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느낌이 아닌가.

오히려 아서와 기사들이 참가한 추모 미사의 내용 복습이 더 크게 실리다니.


“사원 소식지는?”

“사람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아직 제작 중이라고 못 받아왔다고 합니다.”

후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먼저 보여줄 한 부도 없어?”

“그게……. 아마 신경 써 담을 내용이 많아서 그렇지 싶습니다. 사원 소식지는 필사로만 만드는 데다 주간지라서 아직 나올 때가 아니긴 합니다. 초안이라도 되는 대로 보내 달라고 말씀 전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기사로 내며 축하를 바라듯 자화자찬하는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 줄리어스 후작과 후작 부인은 주로 대주교와 사원이라는 경로를 이용해 왔다.

영주 일가의 자랑하고 싶은 일에 대주교가 축복 성명을 내거나 사원의 이름으로 특별 미사를 연다는 소식을 전하면 후작가는 사원에 감사 헌금을 보내거나, 행사 자금을 넉넉히 댄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사원은 소식지를 많이 발행하지는 않았지만 신뢰도가 높은 보도를 내는 곳이라 인기가 많았다.

인쇄도 하지 않고 가십이 배제된 신뢰도 높은 정보를 아름다운 손글씨를 가진 수도사들이 직접 베껴 적었기에 수집가들에게도 선호도가 높았다.

많은 신문사들이 사원 소식지를 베껴 적어 신문을 찍어 내기도 했다.

그러니 결혼 행사 이야기가 사원 소식지에만 제대로 실린다면 소식이 금방 퍼지긴 할 것이다.

신문들을 전부 1~2면만 넘겨본 뒤 일어선 줄리어스 후작에게 집사장이 편지를 가져와 건넸다.


“사원에서 서신을 전해 오셨습니다.”

“란델 대주교?”

“예.”

후작은 페이퍼 나이프로 사원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뜯었다.

후작의 눈이 편지 위를 훑었다.


“…….”

원래 그냥 혼인 서약이나 다시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기획을 해 보니 생각보다 일이 크게 될 것 같아 교황청이 이 일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게 해선 안 될 것 같다고.

그리고 신문사는 인터뷰를 왜곡하는 일도 있고 하니 대충 이래저래 신중을 기하느라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리였다.

후작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웬만하면 어떻게 나왔나 보고 가려고 했더니 그건 못 보고 가겠군.

먼저 교황 성하께 보고하겠다는데 됐고 일단 보도부터 하라고 할 수도 없고.

* * *

후작 부인은 가문 문양이 없는 마차를 타고 나가 외성의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아서 경을 만난 후 후작 부인을 바로 만나러 간다면 후작 부인께 아서 경의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의심을 살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선 그동안 그렇게 하신 겁니까?」

 
테일러의 지적이 합당하게 들렸기에, 후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 그럼 절대로 앞으론 저택에서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따로 날을 정해 저택 밖에서 조심조심 테일러를 만나기 시작했다.

극장의 프라이빗 객석에 들어선 후작 부인은 테일러를 기다리며 근래 부쩍 그가 아서나 측근 기사에게 자주 불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요즘 확실히 아서 측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작 부인은 테일러가 올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녀를 내보냈다.


“보고 나갈 테니 마차에 가 있으렴.”

“네, 마님.”

후작 대부인과의 인연으로 줄리어스와 연을 맺어 저택을 30년 지킨 앨빈 로렌슨으로 인해 로렌슨 일가는 줄리어스의 가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테일러 로렌슨이 줄리어스 저택에서 후작이나 후작 부인을 거의 만나지 않고 아서의 구역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을 보고 하녀들은 ‘로렌슨’이 실세를 파악하고 아서 쪽에 줄을 섰다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후작 부인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레이나를 잃어버린 후 테일러의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차라리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가신을 빼앗기고 세대교체가 일어났다고 뒷말을 듣는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밖에 떠벌리지만 않으면 된다.

지금은 테일러가 아서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때였다.

테일러는 그녀에게 아서 쪽 소식을 가까이서 듣고 전해 주는 유일한 경로였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에 대한 기사들 분위기는 어떤지.’

‘아서 쪽에선 딴짓하지 않고 혼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지.’

‘그 상이군인 보상인지 뭔지 하는 건, 아서는 진짜 받아낼 셈인 건지.’

‘혹시 상이군인 명단이나 장부 쪽에 접근은 어려운지.’

후작 부인은 주로 그런 이야기들을 테일러에게 물었고, 테일러는 당연하게도 아직 케이 경에게 그 정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서도 크리스티나에 대한 기사들의 분위기 같은 것은 꽤 괜찮은 수준으로 전해 주었다.

어차피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정보나 곧 공개될 정보들 뿐이라 영양가가 없었지만, 아예 저택 공간 자체를 내주고 만데다 하녀들을 통해 들어오던 정보도 차단당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후작 부인은 그 정도의 내부 정보라도 들을 수 있다는 데에 만족했다.

오히려 그녀는 아직은 아슬아슬한 상황이니 괜히 본심을 드러내지 말고 아서 곁에서 능력을 보여 신임을 더 쌓으라며 테일러의 분노를 단속했다.

후작 부인은 테일러가 레이나와 진지한 사이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일러가 레이나를 빼앗아간 아서에게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차라락.

객석의 뒤편 귀빈석 커튼을 열고 조용히 테일러가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후작 부인이 얼른 오페라 무대 쪽으로 향한 앞쪽 커튼을 닫으며 일어났다.

테일러가 위장을 위해 사용한 모자와 외투를 벗으며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 드렸을까요?”

“아닐세. 앉게.”

테일러가 자리에 앉았다.

후작 부인은 주변에 귀가 없는지 잘 살핀 후 커튼을 단속했다.

그녀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근래 아서가 자네를 따로 만나기 시작하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일을 맡았나?”

테일러가 대답했다.


“무슨 일을 맡았다기에는 부족합니다만, 아서 경과 함께 측근이신 딜런 오스본 경을 뵙고 있습니다.”

“딜런 오스본? 그게 누구인데?”

귀족인가?

전쟁 막바지에 공을 많이 세운 유명한 최측근 기사들만 파악하고 있는 후작 부인에게는 그의 이름이 낯설었다.


“기사이며 상이군인이십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았던 사람이고 아서 경의 측근이기도 하고요.”

전쟁이 가장 힘든 시기에 무위를 떨쳤던 사람이자 기사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고, 고문 피해자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후작 부인이 관심 있을 내용이 아니었다.

상이군인이 아서의 측근이라는 소리에 후작 부인은 눈만 찌푸렸다.


“어디가 불편한 사람인데?”

테일러는 대외적으로 허락된 정보만 말했다.


“휠체어를 사용하십니다.”

“아…….”

딜런 오스본이 음독을 했다는 것과 시력 문제는 보안 항목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재단의 이사 같은 중책을 맡길 수 없다는 저항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테일러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복귀하셨는데 상이군인 재단에서 무엇이든 역할을 맡으실 듯했습니다.”

후작 부인이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


“상이군인 재단이라고? 유족 연금 재단처럼 말이야?”

“네.”

어차피 곧 공개될 정보였다.

하지만 후작 부인에겐 놀라운 보안 정보로 들렸다.


“그리고 곧 출범할 상이군인 재단에 자문 위원으로 의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자문 의사가 되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근래 딜런 오스본 경과 아서 경을 자주 뵙고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후작 부인은 더 놀랐다.


‘재단 자문 위원? 세상에. 테일러가 제법 아서의 신임을 얻었나 보구나!’

후작 부인은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아서 측이 요구한 상이군인 보상이 마지막 난관으로 그들을 막아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레이나가 납치되고 펄 공작 부인이 오고 나서 아서가 크리스티나와 사원 출석도 해 주었고 침묵하고 있는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언제 또 기분이 상한다고 내 아내가 아니라는 둥 폭탄 발언을 뱉거나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지 몰라 후작 부인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펄 공작 부인 앞에서 아서가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침묵하는 가운데 케이를 통해 들어온 상이군인 보상 요구는 마지막 골칫거리였다.

후작 부인은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 하녀가 사라지고 낯선 하녀들이 저택에 들어온 후로 후작 부인은 밤마다 사기 결혼 건이 폭로되는 꿈을 꾸며 잠을 설치고 있었다.

아서가 조용한 것이 숨 막히게 초조하고 불안했다.

남편은 대체 뭘 믿고 속 편하게도 지껄이고 있는 건지, 이제는 후작보다 후작 부인이 더 다급하게 나서서 아서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빨리 그 입을 막으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수도로 향해야 하는데 레이나는 행방을 모르고, 뒤에 아서와 크리스티나, 펄 공작 부인과 렘브란트를 남겨두고 영지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아서의 수석 참모인 케이는 ‘참전 용사 보상금’과 ‘유족 연금’에 비해 상이군인에 대한 보상이 터무니없이 미비함을 지적하고 그에 걸맞은 금전적 보상을 요구했지만, 후작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융통할 수 있는 금전과 미래의 사업 소득까지 저당 잡혀 유족 연금 재단에 모조리 밀어 넣은 후작으로선 그들의 요구에 응할 방법이 없었다.

아서와 개선군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만나는 상인들마다 끌어들여 자꾸만 돈을 당겨 쓴다는 말이 진작 나왔을 만큼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더 무리할 수도 없었다.

후작 부인은 내탕금을 한계까지 써버린 상황이었고 그녀의 친정은 힘이 없었다.

자금 여력이 없는 후작 대신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지참금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나서서 일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상이군인이 몇이나 되는지, 그 보상 규모가 어떤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일러가 그 재단의 자문위원이 된다면, 그렇다면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자문 의사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뭐?! 왜!”

“오히려 시험인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군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문 의사가 되기엔 경험이 일천하니 무리일 것 같다고, 아버지가 더 적합할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래도 케이 경은 아버지가 부인께 정보를 반출하셨던 일을 눈치채서 아버지는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테일러가 신중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후작 부인은 그 정보가 필요했다.

시험이라 해도 이런 제안이 들어온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받아들이게! 자네에게도 좋은 기회일 거야!”

후작 부인은 안달을 내며 말했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맡는단 말인가? 당연히 군의관도 몇 명 있고, 상이군인도 들어가고, 로렌슨의 가신도 들어가고, 이런 거겠지!”

후작 부인은 이제 후작과 함께 줄리어스를 떠나야 했다.

시시각각 저택과 영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아서를 뒤에 두고 도저히 수도를 향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전에 최대한 줄리어스 영지에서 일어날 일들을 손안에 두고 싶었다.

테일러에게 지속적인 보고를 받고 싶었기에 금전적 보상이라도 주려 했지만 테일러는 받지 않았다.

로렌슨은 하인처럼 돈 몇 푼으로 움직여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후작 부인은 자네가 이러면 내가 미안하느니, 어른이 주는 것 거절하는 것 아니느니 하며 돈 대신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정체를 숨긴 미지의 남성과 프라이빗 객석에서 밀회를 가지며 선물을 퍼붓는 후작 부인을 눈치챈 하녀들이 입을 꾹 닫고 ‘나는 입이 무겁다. 나는 입이 무겁다.’ 생각을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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