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아무도 모르는 일
(114/210)
114. 아무도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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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아무도 모르는 일
2022.10.02.
‘아서만 봐도 황제보단 선황을 닮았으니 아서의 자식이라면 나를 닮겠지?’
아들이 태어난다면 내 이름을 물려주는 것도 좋겠어.
딸이 태어난다면…… 아그네스 같은 이름이 예쁜 것 같군!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싹수가 괜찮은 놈이 태어날 가능성이 올라갈 텐데.
손이 귀한 집안이라 걱정이다.
어차피 밖에선 다들 이미 오 년 전 결혼한 걸로 아는데 침실이라도 먼저 같이 쓰게 하면 좋으련만.
후작은 속으로 크리스티나를 못마땅해하며 혀를 찼다.
‘그렇게 돼먹지 못하게 굴어서야 어디, 시작부터 기분 망친 남편 마음을 돌리겠어? 아서가 현실적인 사람이기에 망정이지!’
어쨌든 후작 부인은 아서가 결혼식을 다시 하겠다고 한 이상 그전에 합방은 없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아내가 평생 받을 대우를 결정한다나 뭐라나.
대체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도무지 뭐가 가문을 위하는 건지를 모른다니까.
내가 나 혼자 좋자고 이래?
다 우리 가문이 잘 돼야 자기들 신세도 피는 거지.
어쨌든 후작에겐 내실의 일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다.
‘결혼식이라도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겠어. 개선식이랑 데뷔탕트를 다녀오자마자 여기서 바로 혼인을 올릴 수 있도록 대주교에게 말해서 미리 3주 전부터 예고를 하고 있게 할까? ……절차가 그게 또 아닌가?’
망상에 빠져 있는데 렘브란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럼 여기 남아 있는 동안 그 아가씨를 찾아보겠습니다. 발견되면 제가 따로 보호하겠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후작은 송구하고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유……. 이리 감싸주시고 도와주시니 제가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렘브란트 경께서 계셔서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펄 공작 부인이 와서 결국 ‘레이나’를 크리스티나로 알고 있던 렘브란트 앞에 진짜 크리스티나를 내놔야만 했던 날.
후작은 공작 부인이 돌아간 후 렘브란트를 찾아가 자신은 아내가 오 년 전 신부를 다른 아이로 바꿔 치기 한 것을 뒤늦게 알았고 딸이 불쌍하여 입을 다물고 말았다며 그간의 사정을 저 좋을 대로 변명했고, 렘브란트는 믿어주었다.
난처하고 두려워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 숙이는 후작에게 렘브란트는 중립적으로 말했다.
「저에게 죄송하실 일은 아니지요. 아서 경이 용서하시고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혼인을 다시 진행하시겠다는 의사를 밝히셨다니 저야 이의는 없습니다만. 황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잘 수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실로서는 용납하지 않을 일이니.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렘브란트는 입을 다물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황실에 보고하겠다며 그가 정색하고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가 어느 정도 사태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했기에 무릎까지 꿇을 각오를 하고 포근한 바지를 입고 온 후작은 감격하여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황실이 용납하지 않을 일이라는 말이야 신경 쓰였지만 그야 안 들키면 그만이다.
이제 하녀는 없고 크리스티나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서도 기분을 풀고 다시 결혼식을 올리겠다며 받아들여 주었으니!
우연히 그 일을 알게 된 렘브란트 경만 비밀을 지켜 준다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렘브란트가 단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 하녀가 납치된 일은 후작 각하께서도 모르는 일이신 거군요?」
후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렘브란트 경의 시험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로운 사람이니 불쌍하게 휘말린 하녀의 목숨을 위해서라고 하면 비밀을 지켜 줄 거라고 했었지.
이런 상황에서 하녀가 납치되었으니, 나나 아내의 짓이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렘브란트 경이 우리 편을 들어 주게 하려면 그 하녀에 관해선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은 것으로 보여야 했다.
진짜로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억울한 건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후작은 한껏 심려하는 척, 레이나를 동정하는 척했다.
「예, 저로서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하녀에게도 이렇게 휘말리게 만든 것이 줄곧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제가 곤란한 처지라 대놓고 찾아보지도 못하고 이만저만 걱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사람을 시켜 찾고 있긴 합니다만……. 무사해야 할 텐데…….」
하인에 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영 가식적인 것 같고 낯설었지만, 말하고 보니 자신도 그 하녀를 예뻐했는데 갑자기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니 퍽 염려되고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레이나의 행방을 비밀리에 수색하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후작이 떠나고 그가 영지에 남아 있는 동안 이곳에서 얻게 되는 소식이 있다면 공유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 일이 밝혀지고 하녀가 붙잡힌다면 높은 확률로 살 수 없고, 후작가는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 너무도 감사한 일이죠!」
후작은 그동안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자신이 그동안 크리스티나의 일이 마음에 걸려 렘브란트를 피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고민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저어……. 그리고 제가 이 일에 대해 누구한테 조언을 받은 것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후작이 하는 말을 듣더니, 렘브란트는 짧게 고민하다 답을 주었다.
「네. 좋은 방법 같군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후작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쓸 일이 없길 바랍니다만,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 사기 결혼 건이 밝혀질 때를 대비해 그 하녀를 후작님의 사생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미리 만들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일이고 평판은 떨어지겠지만, 무고한 목숨들이 희생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역시 그런가?
아서에 이어 렘브란트까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역시 그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 두는 게 맞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일의 사태에 그것이 최후 방어선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
후작 부인이 크리스티나는 어쩔 거냐며 길길이 뛰던 것이 떠올라, 후작은 아내 몰래 그 일을 준비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초상화가 완성되지 못하고 지연된 이유도, 혹시 이야기가 나온다면 렘브란트가 적절하게 변명해 주겠다고 하여 후작은 무척 고마워하며 마음을 놓았다.
슬슬 이야기가 끝나자 후작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준비한 말을 했다.
“제가 이리 신세를 졌으니……. 괜찮으시다면 수도로 오신 후 줄리어스의 타운하우스에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머물러 주신다면 더 영광이고요. 아내도 경께서 베풀어 주신 친절에 미처 인사를 다 못 했다며 경을 다시 한번 모시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 친절이란 렘브란트가 황후에게 청해 그의 저택에 황궁 하녀들을 꽂아 준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펄 공작 부인이 친히 부탁한 하녀들이 어려워 쩔쩔매고 있었지만, 어쨌든 렘브란트에게는 ‘감사한 친절’이라 인사해야 할 일이었다.
대외적으로 후작이 렘브란트에게 특별히 감사한 이유를 설명하기에도 적당한 핑계였다.
“혹시라도 머물러 주신다면 제 타운하우스에서 모든 편의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겸사겸사 렘브란트 경께서 그려 주시는 초상화를 완성 받을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그 핑계로 수도에서 인연을 이어가고 사교계 사람들에게 렘브란트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선제후끼리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다.
수도에는 물론 클라인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도 있었으니, 굳이 줄리어스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렘브란트는 후작의 초상화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예.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 * *
오전 기도 시간.
대주교는 영혼이 탈탈 털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고해성사실에서 나왔다.
고해성사실에 사람이 있을 시간이 아니었기에 근처에 기대어 있거나 비질을 하던 사제와 수도사들은 녹초가 된 사제 하나가 홀로 고해성사실에서 불쑥 걸어 나오자 기겁했다.
“뭐, 뭐요? 이 시간에 고해성사실에……. 대주교님?!”
그가 비틀거리자 황급히 수도사들이 와서 그를 부축했다.
“대주교님! 왜 여기에……. 아니, 아침에 고해성사를 한 신도가 있는 겁니까?”
“…….”
당황스러워하며 사제와 수도사들이 안타까워했다.
아니 어떤 신도님이…….
어제 대미사까지 집전하시고 인터뷰 일정도 많아 바쁘고 피곤하실 대주교님을…….
“다른 고해사제들에게 부탁하시지요. 어떤 신도님이시기에 대주교님께서 직접……. 근데 대주교님 혼자 계신 겁니까?”
수도사들이 무심결에 텅 빈 고해성사실을 바라보았다.
“…….”
대주교는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펄 공작 부인은 새벽에 떠났다.
그리고 란델 대주교는 몇 시간 동안 나무 방 안에 처박혀 멍하니 고해성사실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간신히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대주교는 살래살래 손을 저으며 안쓰러운 미소를 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쿵!
주저앉은 대주교의 몸에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나무 문이 삐걱거렸다.
“대주교님!”
놀란 사제와 수도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대주교가 괜찮다는 듯 손짓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감쌌다.
“……허허허허…….”
줄리어스…….
내가 언젠가 사달을 낼 줄 알았지…….
이미 사달을 냈을 줄은 몰랐네.
대주교는 아그네스 바실리사 성녀가 내려준 보속*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듯이 들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허허……”
“대주교님! 여기 계셨습니까?”
그를 찾아다니던 서기가 저편에서 대주교와 사제들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신문사에서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혼인에 대해 나누신 회의록과 인터뷰 원고를 달라고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혼인에 대한 대주교님 한 말씀도 듣고 싶다는데요, 지금 괜찮으십니까?”
“…….”
대주교가 퀭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제자 회의록 원고는?”
“아, 여기 있습니다.”
서기가 옆에 끼고 있던 서류철에서 회의록 원고를 꺼내 넘겼다.
대주교가 한숨을 내쉬며 원고를 바라보았다.
그가 서기를 보며 말했다.
“……신문사에 모든 인터뷰는 서면으로 변경한다고 전하고 양해 구하게. 그리고 교황청과 황실에 보낼 서류 내용도 다시 쓸 것이 있으니 그쪽에 말 전하고 자네는 내 집무실로 따라오게.”
―――――
*보속: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일. 고해성사를 한 뒤 속죄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과제를 말한다. 보속의 내용은 고해 사제가 정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