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고해성사
(112/210)
112.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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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고해성사
2022.09.25.
펄 공작 부인은 귀족 사교계만이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 권력과 종교의 유착으로 보이길 바라지 않은 펄 공작 부인이 그것을 주목받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교단이 인정한 성녀였고 교단의 사제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펄 공작 부인은 황족으로서 자신의 땅인 북부를 다스리는 속세의 의무를 더 우선적으로 요구받았기에 사원에 속한 사제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교단에서는 그녀를 높은 고위 성직자로 인정했다.
황족이자 성녀인 그녀는 대주교와 같은 품계였으나 황족이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추기경과 비슷한 지위로 여겨지고 있었다.
란델 대주교가 푹푹 한숨을 쉬면서도 반갑게 웃었다.
“소리를 질러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몸이 안 좋으시다더니 괜찮으십니까?”
“내가? 몸이 안 좋다고?”
“아……. 아그네스 님의 시녀이신 남작 부인께서……. 아니,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대주교는 대충 넘겼다.
다른 이유로 오지 못하신 것을 시녀가 적당히 말해 주었나 보다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때 후작과 먼저 약속이 있었지.’
줄리어스 후작 같은 인물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실 분이 아니니 후작과 말 섞게 되는 것이 내키지 않으셔서 먼저 일어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주교는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펄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추운데 들어오십시오.”
대주교는 그녀가 서 있는 창문 옆의 출입문을 열었다.
그리고 귀빈이 방문할 때마다 사용하는 특별 응접실로 아그네스를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다른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나오게.”
“……예?”
아그네스는 무표정한 낯으로 말했다.
“고해성사실로 갈 걸세.”
대주교는 얼떨떨하게 눈을 껌벅였다.
“예? 고해성사실요?”
* * *
고해성사실은 철저하게 방음 시공이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고해성사실을 지키는 사제는 없었다.
대주교가 열쇠로 고해성사실의 문을 열자, 아그네스는 자연스럽게 앞장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대주교는 고해성사하는 자, 즉 지은 죄를 고백하는 신도의 자리에 들어가 그녀를 마주했다.
“…….”
고해를……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건가?
사제들끼리도 고해성사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교황도 자신보다 낮은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곤 하니 못 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오랜만에 만난 공작 부인 앞에서 다짜고짜 신께 뉘우치고 고백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이곳으로 오신 건가……?
그의 짐작은 반만 맞았다.
“신이여, 죄인이 간구하노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그네스가 벽 너머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하는 기도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께서 당신의 고백을 들으시러 이 자리에 보이지 않게 계십니다. 두려워 말고 당신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고 신께 용서를 받으십시오.”
대주교는 의아한 와중에도 똑같이 마주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나이다. 우리에게 자애의 문을 열어주소서.”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고 악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성사를 시작하는 기도를 마친 후, 그녀가 말했다.
“용서는 신의 권한이며 나에게 그대를 용서할 권리는 없으나, 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실 것을 믿으며 나는 최선을 다해 그에 임할 것이네.”
“…….”
공작 부인이 말했다.
“고백할 것이 있다면 하게. 나는 고해성사의 원칙에 따라 이곳에서 들은 모든 것에 비밀을 지키고 침묵하겠네.”
란델 대주교는 기도하던 그대로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어리둥절해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공작 부인은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것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은 죄가 바다와 같아 어리석은 자가 헤아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모르는가.”
“예.”
아그네스가 꿰뚫어 볼 듯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정녕 모른다면 내가 먼저 하겠네.”
“……예?”
공작 부인이 고해했다.
“신이여. 저는 성스러운 혼인에 증인을 자처하여 서명하였으면서도 성사의 증인으로서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증한 혼인은 사기였고 저는 신의 앞에서 한 성스러운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
대주교의 눈이 커졌다.
뭐요? 사기?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로 인하여 저는 성사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으며 혼인의 당사자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하였습니다. 저의 게으름과 안일함이 야기한 이 모든 일을 뉘우치나이다. 저는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저의 잘못으로 일어난 이 모든 일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니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대주교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펄 공작 부인이 보증한 혼인?
그건…….
“하게.”
채 공작 부인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얼떨떨한 대답이 나왔다.
“예?”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은 죄를 고하게, 란델 대주교. 이제는 모른다고 하지 못할 테지. 자네 역시 같은 죄를 지었지 않나.”
“……!”
“자네와 나는 같은 혼인성사에 증인으로 서명했고 자네는 그 성사를 직접 주관하였네. 자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자네는 이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었을 걸세.”
놀란 대주교가 입을 뻐끔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아, 아그네스 님! 그게, 대체……!”
아그네스가 냉엄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성사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그대는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네. 작정하고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면 과오의 정도를 따지지는 않겠네. 자네와 나 모두 불성실함으로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앉게.”
“……!”
공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자네는 고해성사의 원칙에 따라 비밀을 지켜야 하네. 이곳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 누설된다면 자네는 율법에 의해 파문될 걸세.”
“……! ……!”
대주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
공작 부인이 버럭 호령했다.
“빨리 해! 그래야 보속*을 논의하지! 할 일이 많네!”
* * *
“할머니!”
레이나는 집 밖으로 나와 허겁지겁 할머니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
렘브란트와 대화하던 도중, 할머니가 방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기사들이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저는 미지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던 게 맞고, 기사분들은 저를 구해 주시고 보호해 주셨을 뿐이라고, 제가 원한 일이었다고 열심히 아서를 변호하는 말을 하고 있던 레이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하얗게 질리더니 벌떡 일어나서 뛰쳐나갔다.
렘브란트 경이 나타난 바람에 리오넬과 루칸은 레이나와 렘브란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서를 포함해 군인들이 참여하는 추모 미사가 있던 날이었기에, 그곳에 참석해야 하는 기사들은 상당수가 호출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날따라 그들 근처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수가 적었다.
후작 부인을 만나는 일정이 있는 날이라 테일러도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그 사이에 사라진 것이었다.
“어떡해요. 어떡해요? 산에서 길을 잃으셨으면…….”
“내려가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래로 이어지는 모든 길목을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직 멀리 못 가신 것 같으니 이 근처에 계실 겁니다. ……죄송합니다. 기사들이 흩어져서 찾고 있습니다.”
“제가 찾을게요. 저도 찾을게요!”
그녀의 가족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렘브란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돕겠습니다.”
레이나는 그에게 많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아서를 보호하고 싶어했다.
그건 두려워하거나 협박받아서 나올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저 사람들이 알게 될까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지만…….
레이나 아스타린은 황후에게 말할 거냐고 물었다.
같은 질문을 얼마 전,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펄 공작 부인.
그것은 아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만이 하는 질문이었다.
허겁지겁 기사들을 변호하는 그녀는 아서 경의 결혼에 문제가 있었다는 정보가 황후에게 들어갈까, 기사들이 그녀를 납치해 빼돌렸다는 오명을 쓰고 명예를 잃을까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녀는 예전에 만났을 때와 달리 자기 자신보다도 그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할머니!”
그리고 그녀에게는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후작가가 레이나 아스타린의 약점을 잡았고, 오 년 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 대신 그녀가 대역으로 혼인했으며, 돌아온 아서 경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그녀는 아서 경의 편에 서 있다.
“…….”
아서 경이 그녀를 회유하는 데 성공한 것이거나.
또 다른 사람이 교묘하게 그녀의 약점을 잡은 상황인 것을 그녀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레이나 아스타린은 정치적이지 못한 인물이다.
그녀의 약점이 무엇인지, 무엇에 마음을 쏟는지, 그녀가 무엇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지 렘브란트 앞에서 하나도 숨기지 못했다.
아서 경이나 케이 포드 같은 사람에게 그런 순진한 여자 하나쯤 제 편으로 구워삶는 것은 어렵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레이나 아스타린은…….
“할머니…… 할머니!”
순간 레이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바뀌었다.
달리는 발소리가 나서 렘브란트는 몸을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찾았습니다―.”
멀찍이서 기사의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방향에 젊은 갈색 머리 청년에게 업혀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청년의 외투를 받아 입은 것인지, 할머니의 어깨에 걸쳐진 남자 외투가 보였다.
달려간 레이나가 울먹였다.
“할머니!”
“…….”
할머니가 귀찮아하며 무어라 작은 소리로 웅얼거린다.
레이나가 거칠게 눈을 훔치고 소리쳤다.
“할머니, 정말! 어디 갔었어! 막 나가면 어떡해! 걱정했잖아!”
그녀의 눈이 붉다.
가까이 가자 비로소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않여……. 여기 않여…….
웅얼거리며 할머니가 청년의 등 위에서 아기처럼 꾸물거린다.
“말도 없이 이렇게 나가면 어떡해!”
그녀가 눈물을 터뜨린다.
덩달아 안심한 렘브란트가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찾았구나. 다행이다.’
그녀의 가족인가?
저 청년이 찾아온 건가?
청년이 할머니를 업은 채 그녀를 달랬다.
“할머니 괜찮으셔. 일단 들어가자. 놀랐겠다. 내내 찾았다며.”
그녀가 우느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고마워.”
누그러진 목소리는 아직 울먹이고 있었다.
“들어가자.”
가볍게 안아 도닥여주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몸을 돌리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
렘브란트가 짧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집 쪽으로 이동해 문을 열어 주었다.
할머니를 업은 청년도 눈인사하고는 발을 떼었다.
“…….”
브로디에게 들은 이름이 떠올랐다.
테일러 로렌슨.
레이나 아스타린과 염문이 있다는 청년.
그게 이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동이 트며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
*보속: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일. 고해성사를 한 뒤 속죄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과제를 말한다. 보속의 내용은 고해 사제가 정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