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111/210)
111.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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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2022.09.22.
테일러 로렌슨이 떠난 후.
아서는 구겨진 미간을 누르며 트리스탄을 향해 말했다.
“……로렌슨 가문은 사실상 줄리어스 후작가에 충성을 바치는 가신이야. 적당한 의사가 아니라고.”
“줄리어스의 가신이라면 각하의 가신이기도 한 것 아닙니까? 각하께서도 ‘줄리어스’이신데요.”
아서가 한숨과 함께 헛웃음 지었다.
“…….”
트리스탄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는 듯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말을 이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후작 쪽으로 불리한 정보가 나가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테일러 로렌슨도 인망 없는 후작과 황실의 피가 흐르는 젊은 영웅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
아서가 불편한 얼굴로 찌푸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보가 아니면 내가 가진 배경이 위험하고 불완전하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미 그는 후작 부인에게 이중 첩자 활동을 잔뜩 해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테일러 로렌슨은 원하는 것도 분명하고 협조적이고요.”
아서는 회의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내 기밀에 접근권을 바로 준다고?”
“물론 그런 것을 주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의사의 상담은 필요합니다.”
딜런이 슥 손을 들었다.
“치료받는 것은 접니다, 각하. 각하께 피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말하는 건 내 증상 같던데.”
딜런이 웃었다.
“우연히 증상이 겹쳤네요.”
“자네 눈. 보이는 것 같은데?”
딜런이 대놓고 시선을 피하며 슥 미소 지었다.
“……다행히 조금 호전되긴 했습니다. 뭐가 있다는 게 보이긴 하는데, 흐릿합니다. 각하를 핑계 삼아 좋은 의사를 자주 보고 더 빨리 낫고 싶습니다.”
아서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휠체어를 탄 딜런 오스본은 다른 기사들에게도 그렇듯 아서에게도 아픈 손가락 같은 동료였다.
“나를 핑계 삼지 않아도 되잖아? 의사는 직접 만나. 누가 나 없이 의사를 못 만나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아뇨. 각하 없이는 테일러 로렌슨을 못 만납니다.”
뭐?
아서의 눈이 찌푸려졌다.
“누가 감히 그런 명령을?”
딜런이 답했다.
“저의 양심과 충성심이요.”
“…….”
아서가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그대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친 것 같아서 좀 섣불리 말하는 건데, 내 눈은 괜찮아. 의사는 필요 없어.”
“각하.”
트리스탄이 설득하려 하자 아서가 짧게 손을 들어 저지하고 말했다.
“일시적인 건가 싶어서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했는데.”
“……?”
기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말을 골랐다.
“눈 상태가 좋아졌어. 글을 읽을 순 없는 상태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의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 내 눈은 의학적 문제가 아니야. 오러를 안 쓰고서부터 호전되고 있는 걸 보니 사실 오러를 계속 사용했던 피로가 누적된 게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강하긴 한데.”
“……!”
아서의 뒤쪽 말은 거의 묻혀 버렸다.
부하들 사이에 소동이 일었다.
“호전되고 있다고요?”
“아니 그걸 이제 말씀해 주십니까?! 정말입니까? 거짓말 아니시고요?!”
“언제부터요?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신 겁니까?”
“진짜 좋아지신 겁니까? 설마 지금 의사 싫다고 둘러대시는 건 아니시죠?”
아서가 찡그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거짓말은 안 해.”
불신했다가, 얼마만큼 보이게 된 거냐고 확인했다가, 그렇게 가망 없다고 하시더니 그것 보라며 열띤 흥분과 난리가 지나갔다.
고맙지만 솔직히 피로했다.
아서가 손을 들어 부하들을 저지했다.
“그만.”
분위기가 한결 진정되었지만, 부하들의 질문 세례를 막을 순 없었다.
“각하.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좀 더 리스크를 지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아지신 겁니까? 치료를 따로 시도하고 계셨습니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습니까?”
“…….”
아서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통증이 생긴 이후로 오러를 멀리까지 펼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걱정만 더 시킬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피로 문제인 것 같다. 카일도 그렇고 트리스탄도 그렇고 오러에 의존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러를 멀리까지 쓰는 걸 관뒀어. 그래서인지 그 후로 눈이…….”
“좋아지신 겁니까?”
다급함이 숨겨지지 않는 부하들의 채근에 결국 아서는 엷게 찡그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그래. 무리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아지고 있어. 나도 시력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야. 눈으로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아서는 대충 부하들을 진정시켜 넘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의 내용을 명령으로 바꾸었다.
“그런 이유로 이젠 오러를 쓰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날 믿지 말고 주변 경계 강화해. 내가 전처럼 문밖을 보고 들을 수 있다고 믿지 마.”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동시에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케이가 본격적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종이 위에 펜을 세웠다.
“회복하게 되신 경위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오. 중요한 문제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서가 팔짱을 꼈다.
“눈이 갑자기 좋아진 건 최근 일이라 왜 그런지는 나도 몰라. 일시적인 건지 완전히 좋아진 건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조금 더 있다가 말하려고 했으니까.”
“뭔가 평소와 다른 일이 있지는 않으셨던 겁니까?”
“딱히 한 건 없어. 평소와 다른 점을 굳이 따지자면, 사원에 갔다는 건가.”
“사원이요?”
트리스탄이 물었다.
“좋아지신 걸 언제 처음 느끼셨습니까?”
아서가 짧게 고민하다 말했다.
“……오늘.”
트리스탄이 놀라 되물었다.
“오늘요?”
“그래. 추모 미사를 보는데 문득 시야가 평소보다 선명하다 싶더군. 착각인가 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확실히 눈이 좋아졌어.”
아서가 피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나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다녔다더니. 신이 보살피신 모양이지.”
* * *
대주교는 서기가 적은 대화록을 다시 읽어 보며 낮의 만남을 회상했다.
아서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후작 부부를 만났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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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결혼식을 다시 올리고자 하신다구요?」
이미 소문을 접해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대주교는 새삼스럽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후작 부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이미 한 번 올린 혼인성사를 다시 올리는 것이 혹시 율법에 어긋나지는 않을까요?」
율법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후작 부인이 사원에 그런 이야기를 물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목적인 질문이었다.
사실상 보도를 내보내기 위한 인터뷰를 남기는 자리였다.
대주교가 흔쾌히 답했다.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신께서도 귀중한 혼인 서약과 맹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다는 아름다운 부부를 다시 한번 반겨주실 겁니다.」
뒤편에 자리한 서기가 깃펜 사각대는 소리만 내며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받아적었다.
오 년 전 비공개로 치렀던 두 사람의 약식 혼인이 정식으로 다시 열린다는 내용은 사원의 소식지를 통해 공식 공표로 나갈 것이다.
후작은 이 일을 품위 있는 큰 행사로 열어 줄리어스 후작가의 달라진 위상을 만방에 알리는 수단으로 삼고 싶어하는 듯했다.
어쨌든 혼인은 사제들에게만 증인이 될 권한이 있으니 그 무엇보다도 사제와 교단의 권한이 큰 사안이었다.
「이미 혼인성사를 치른 부부인데 유난이 아닐까 민망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만, 아서 경이 우리 아이가 오 년 전에 혼례를 성대하게 치르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지 뭡니까.」
「허허, 저런!」
대주교의 흐뭇한 시선이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아서에게 향했다.
「…….」
아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가문의 기를 세워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는 듯 굳이 부정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혼인은 가문의 일이니 가문 어른들의 뜻을 따르기로 한 듯했다.
하긴. 환영 축제 미사는 무시하고 전사자 추모 미사는 참석하는 인물이 성대한 혼례로 권위를 과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역시 아서가 유쾌한 내색을 하지는 않았던 듯, 후작 부인은 아서의 눈치를 보는 낌새를 감추지 못하다가 얼른 후작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때는 아무래도 사정이 사정이었던지라 여러 가지 혼례식의 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전쟁 앞두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게 부적절하기도 했습니다만, 전세가 급박하여 아서 경이 빠르게 출정해야 했던지라 결혼식을 예고하지도 못했고.」
대주교가 안타까워했다.
「아, 그랬지요…….」
혼인은 본래 3주 동안 예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들의 혼인에선 황제의 허락을 빌미로 생략했다.
혼인의 증인들이나 양측 부모 중 하나는 반드시 결혼식에 동석해야 했지만, 그것도 혼인성사를 집전한 주교 혼자서 대표로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사려 깊으신 판단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럴싸하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포장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주교는 적당히 후작 내외가 만족할 만큼 다시 치르는 혼인식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을 주었다.
「교단은 이혼을 용납하지 않을 뿐, 혼인성사를 한 번 더 하시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종종 있던 일이지요. 특히나 왕족이나 황족분들 가운데서는 즉위 전, 즉위 후로 혼인 예식을 같은 분과 두 차례 하신 역사도 종종 있었습니다.」
대주교가 몇몇 역사적 사례를 읊어주었고 서기가 받아 적었다.
왕족의 사례라는 말에 줄리어스 후작은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표정 관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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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가 대화록을 덮고 교황과 황실에 보내는 혼인에 대한 편지와 간략한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후작이 요구하고 황제와 교황, 펄 공작 부인의 사인이 담긴 혼인 계약서까지 명령서처럼 내려온 마당이라 일개 주교인 그로서는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긴 했으나, 여러 가지를 졸속으로 처리한 결혼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간신히 무효가 되지 않을 최소 조건만 겨우 갖춘 혼인이었다.
혼인을 주관하는 한 명의 사제, 혼인 서약, 최소한의 예물과 초야.
그런 엉망인 혼인이 인정된 것은 황제와 교황의 사인이 된 혼인 계약서가 그들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는 받아들였으나, 대주교로서도 혼인을 혼인으로 알리지 못하고 대외적으로 약혼으로만 알린 채 사실상 침묵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입 다물어야 했던 것은 마음에 걸렸다.
【 아서가 전사할 경우 혼인 사실은 없던 걸로. 】
【 아서가 후작가에 피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교계 평판을 회복하기 전에는 혼인하였음을 공표하지 않는다. 】
혼인 계약서의 그 항목 때문이라는 점이 짐작은 되었지만, 영 기분이 결백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혼인이야 결국 부부가 잘 살면 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승전 기원 미사에 꾸준히 참석한 이유가 정말로 순수하게 아서의 무사 귀환과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함이었다고는 대주교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후작은 아서가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혼인은 없던 일이 된다.
그것이 후작이 생각했던 결말일 것이다.
전쟁에 나간 이들에게 보급을 부실하게 하고, 그들을 가장 가혹한 조건으로 내몰았던 것도 그 때문.
그럼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약혼’만 한 척하고 사원 미사에 꾸준히 출석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아버지인 후작과 뜻이 달라서였을까?
아서 경이 전공을 세우며 유명해지기 전,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녀가 좋지 않은 혼처에 약혼으로 묶인 채, 위험한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약혼자를 기다리는 상황인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전쟁에 나간 약혼자가 있다는 이유로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미사만 다니는 크리스티나의 의외의 절개는 유명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그녀의 사원 출석이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레이디인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서 경이 지나치게 성공하여 돌아오는 바람에 후작가는 당혹스러워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얼른 태도를 바꾸게 됐지만, 아서 경만 괜찮다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사원이야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보기 위해 늘어난 신도들로 이득을 보았으니 의혹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덕분에 그는 가장 주목받는 주교가 되었고, 후작가는 사원을 존중하며 지원했다.
줄리어스 사원은 교세를 떨치며 승승장구했고 그것은 그가 대주교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아서와 크리스티나가 서로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어 제국 널리 이름을 떨쳐 준다면 그에게도 자랑이 되는 일이다.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서 경과 함께 유가족을 방문하고, 유족들을 위해 사재까지 내놨다고 했지?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주었으면 좋겠군.
문득 그는 함께 그 서약서에 증인으로 사인한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펄 공작 부인…….
「펄 공작 부인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요. 어제 도착하신지라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참석하고 싶으셨지만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돌아가신다고…….」
「너희는 펄 공작 부인과 인사 나눴니? 너희 쪽에 계시다 가셨지?」
「아뇨. 저희 쪽에서도 못 뵈었는데요.」
“흠…….”
분명 오늘 찾아오셨던 것으로 들었는데.
왜 미사에도 참석하지 않으시고 날 만나지도 않고 가셨을까.
많이 피곤하셨나?
그래도 다시 오시겠지.
독실하신 분인데다가, 교단의 성녀이시니까.
편지와 보고서를 마무리한 뒤 눈을 감고 짧게 신에게 기도를 올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으아악!”
“…….”
창문 앞에서 여자의 하얀 얼굴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억울해진 대주교가 예의도 잊고 소리쳤다.
“아, 아그네스 님! 거, 거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놀랐잖습니까!”
얼굴만 떠 있어 유령인 줄 알았다.
검은 옷을 입은 데다 검은 머리인 흰 얼굴의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가 아프군. 란델 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