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비협조적인 (110/210)


#110. 비협조적인
2022.09.18.



 
레이나가 굳은 얼굴을 하는 걸 보고 렘브란트가 안심시키고 싶은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입니다.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그냥 돌아갈게요. 그리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

렘브란트는 그녀의 마음을 살피듯 레이나를 보고 있다가 “흠.” 소리를 내며 의자에 고쳐 앉고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네요.”

렘브란트가 다시 미소 지었다.


“먼저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말해 줄게요. 당신이 저한테 어디까지 상의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당신은 그 후에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도 되고, 할 말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요.”

“…….”

그는 생각을 떠올리듯 턱을 만지며 시선을 먼 데 두었다.


“흠……. 그것부터 할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이 그날 물어봤었는데 내가 대답해 주지 못했죠?”

황태자가 왔던 날.

그들이 대면했을 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

이어진 그의 대답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일단 당신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대역을 하고 있다는 건…… 그날 밤 당신이 개선식에 나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알고 있었다기보다 짐작한 거지만.”

놀란 레이나는 긴장한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그럼 거의 제일 처음, 그녀가 그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알았다는 뜻이 아닌가.


“어떻게……요?”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하나.”

그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낮에 개선식 잠깐 열렸다가 중단됐을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서 경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서 경이 인사 나온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면전에 두고 나와 결혼한 여자가 아니란 소릴 하면서 그녀를 퇴짜놓더군요.”

레이나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겠다고 하녀 다락에서 잠들어 있던 시간의 이야기였다.


“…….”

그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그땐 부실 보급 건 때문에 아서 경이 항의하는 건가. 제법 강경하게 나오네.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

“그게 진짜 말 그대로의 의미였던 거죠?”

렘브란트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날 후작과 약속이 있었는데 세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더군요.”

“…….”

“축제 열어놓고 얼버무리고 있는데 개선식 분위기는 이상하고. 아서 경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렇다 쳐도, 후작은 뭔가 말이 있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서 후작한테 약속 확인해 달라고 하고 슬쩍 하인을 따라갔거든요. 그런데…….”

렘브란트가 잠시 틈을 두고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그때 집사장 님의 말이 아마……. ‘그렇다고 지금 얘한테 드레스를 입혀서 뭘 어쩌자고요……’ 뭐 그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해요?”

“아…….”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나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렘브란트가 곤란한 듯 웃었다.


“문밖에서 그 얘기를 듣고, 집사장 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고 슬쩍 문틈으로 봤는데, 그곳에 전에 봤을 때랑 다른 옷을 입은 당신이 있었습니다.”

“…….”

렘브란트가 말을 이었다.


“그날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면 아, 이 사람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인가,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미안한 듯 웃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전에 만난 적이 있었잖아요? 좀 인상적인 모습으로.”

 


「저…… 그 소식지, 다 보시면 버리실 건가요?」


「……저한테 버리시면 안 될까요?」


「도, 돈을 드려야 될까요? 역시 그렇죠……? 많이는 어렵지만…….」

 


‘아…….’

레이나가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기억력 좋으시네요.”

렘브란트가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30코퍼에 소식지를 사 간 아가씨를 잊긴 힘들었거든요.”

“…….”

창피했다.

그땐 이 사람이 렘브란트 경이라는 걸 몰랐단 말이야.

너무 편하고 소탈한 차림새로 혼자 벤치에 앉아 있기에 그냥 수행원인 줄 알았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게 소식지를 내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은 괜찮아요.」


「아, 아니에요. 수행원님도 돈을 주고 사셨을 텐데…….」


「그……. 아뇨, 괜찮…….」


「바, 받으세요! 저 돈 있어요.」

 
소식지를 받고 억지로 그에게 돈을 쥐여 주었던 게 생각나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웬 하녀가 푼돈을 꼭 쥐여 주는 게 웃겨서 기억에 남았다고 생각한 레이나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땐 제가 귀족이신 줄 몰랐어요.”

렘브란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뭐가 죄송해요? 귀족한텐 30코퍼 주면 안 되나요? 그걸로 맛있는 거 사 먹었는데요.”

“…….”

농담 같으면서도 비웃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기분 좋고 편하게 말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서 경 말이 결정적인 힌트가 됐죠. 그 후에 당신이 갑자기 끌려와 드레스를 입고, 당신이 나간 후에 아서 경이 당신을 데리고 개선식을 시작했으니까요.”

“…….”

“다음날 아서 경이 후작을 다루는 걸 보고 당신 일로 후작이 톡톡히 약점을 잡혔다는 걸 알 수 있었고요.”

“…….”

그리고 그는 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그게 좀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날 카일 황태자랑 말이에요. 그전까진 당신이 굉장히 무섭고 힘든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안합니다.”

“…….”

레이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만 저었다.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그 후에 아서 경을 기분 나쁘게 하면서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천천히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당신이 납치됐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무사한 당신을 봐서 기쁩니다.”

“…….”

어떡해.

레이나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였다.

렘브란트 경이 전부 알게 되었다면 마리아 황후가.

그럼, 아서 경의 결혼이 위험해질 수 있잖아.

* * *



“…….”

“…….”

아서가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서는 딜런과 함께 테일러 로렌슨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서가 물었다.


“……트리스탄. 자네가 말한 ‘딜런의 증세를 봐 줄 의사’가 이 사람이야?”

트리스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했다.


“네.”

“…….”

아서가 묵묵히 그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테일러 로렌슨이라고 했으면 안 만났어.’

트리스탄이 단호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네. 그러실 줄 알고 말씀 안 드렸습니다. 의사 데려오면 보기로 하셨잖아요. 진찰받으세요.’

“…….”

테일러 로렌슨 입장에서는 협조적이지 않은 환자 둘을 마주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에게 적대적인 환자 하나와, 꾀병인 환자 하나.

아서는 트리스탄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고, 트리스탄에게 의지해 들어온 야윈 몸의 기사는 휠체어를 타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러나 딜런의 시력 이상은 이미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아직 딜런을 정식으로 소개 받지 못한 테일러가 트리스탄에게 물었다.


“음……. 그러니까 눈이 불편하시다던 환자 분은…….”

아서 옆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마른 기사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접니다. 의사 선생님이십니까?”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왠지 눈이 마주쳤다가 시선이 빗겨 가는 기분이었다.


“……?”

테일러는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네……. 테일러 로렌슨입니다.”

“딜런, 오스본입니다.”

“눈이 불편하시다고요?”

딜런이 답했다.


“네.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중독된 이후 눈에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말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사람처럼, 그의 말은 조금 어눌하고 느렸다.

테일러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가 근래 음독까지 한 고문 후유증 환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트리스탄에게 들은 탓이었다.

딜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제 시력이 꼭 회복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듣고 싶어서, 실력이 좋은 의사 선생님이시라는 말씀에, 각하와 함께 찾아뵈었습니다.”

“…….”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테일러는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환자에게 조금 감명받았다.


“그러셨군요. 치료 의지가 있다는 건 회복에 중요한 열쇠죠.”

싸늘하게 부관과 눈싸움을 하는 아서의 앞에서 환자를 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테일러는 이내 아서에게서 신경을 끄고 능숙하게 딜런을 상대했다.


“눈은 한 번 손상되면 회복이 쉽지 않은 부위이긴 해서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중독으로 인한 일시적 증상이라면 회복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함께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지금은 어느 정도 보이시는 상태죠?”

딜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선명하지 않고, 어렴풋이 보입니다. 눈이 많이 나빠졌다는 기분입니다.”

“…….”

아서가 트리스탄을 보며 정말 싫은 얼굴을 했다.

트리스탄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서 있었고, 딜런과 테일러의 대화가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딜런 오스본 경. 제가 잠시 경의 눈을 살펴봐도 될까요?”

순간 딜런이 마른 어깨를 흠칫 움츠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

트리스탄이 말했다.


“잠시만요. 그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딜런 경의 공포증 때문에…….”

“아.”

“잠깐만……. 트리스탄. 내가.”

딜런의 말이 더 느리고 어눌해지며 약간 떨렸다.

트리스탄이 대신 말해 주려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딜런은 자기 스스로 말하겠다는 듯 손을 들어 트리스탄을 저지하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제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 말이 어렵고, 약간의 기억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딜런이 말했다.


“제 증상에 대해선 사령관 각하께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가끔, 필요하다면,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

아서가 소리 없이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테일러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트리스탄 역시 아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아서가 조금 엇박으로 평온한 표정을 만들며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내.”

“……?”

아서가 왠지 이를 악물면서도 표정은 하나도 변화 없이 평온하고도 어색하게 말했다.


“내 부하를 잘 부탁하네.”

“…….”

테일러도 영 불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환자 앞에서 보호자와 신경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부하를 무척이나 아껴 자신이 싫은 마음을 이겨내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부하에게는 사려 깊은 좋은 사령관인가 싶기도 하고.

테일러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