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흔적
(108/210)
108.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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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흔적
2022.09.11.
줄리어스 사원.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중후한 파이프오르간 소리 위로 흘렀다.
아름다운 성가가 거룩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울려 퍼졌다.
아서와 크리스티나가 방문한다는 소리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대주교의 얼굴에 반가운 기쁨이 서렸다.
“아서 경.”
대주교가 얼굴 가득 빛나는 미소를 머금고 걸어가 두 손으로 부드럽게 아서의 양손을 잡아 축성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는 오 년 전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혼인성사를 주관한 사제였다.
당시에는 주교.
지금은 대주교였다.
아서가 짧게 고개 숙이며 미소 지었다.
“방문이 늦었습니다, 대주교님.”
“아닙니다. 얼마나 바쁘실지 익히 짐작이 갑니다. 지금이라도 경께서 찾아주시니 사원의 홍복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미사 베일 속에서 툭 던졌다.
“아서 경께서 돌아오신 후로 한 번은 와 주실 줄 알았는데 오지 않으셔서 내내 기다리고 계셨어요.”
대주교가 민망해하며 손을 저었다.
“아이고. 그런 부끄러운 말씀을. 아닙니다. 그저 이 노구가 구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오신 아서 경을 다시 뵙고 싶다는 주책 어린 희망을 속에 꾹 담아 두지 못하고 흘렸을 뿐입니다.”
아서가 입매를 올려 웃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진작 찾아뵙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주교가 반가워하며 좋아했다.
“무척 감사한 말씀입니다! 한데 제가 이리 반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선장군의 공무 외엔 사람을 만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요.”
아서가 미소 지었다.
“어찌 개선장군의 공무가 아니겠습니까. 제국을 위한 승전 감사 미사이고 전우들을 위한 추모 미사인데요.”
다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사원이 마련한 행사의 이름이 ‘귀환군 환영 축제 미사’일 때는 아서가 공식 방문 의사를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사자 추모 미사’를 행사의 이름으로 올리자 아서는 비로소 방문 일정을 잡았다.
사원으로서는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아서의 귀환이 너무 축제 분위기이다 보니 일단 후작가와 영지 사람들이 상실의 위로보다는 영광과 축복을 원한다 생각해서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었다.
대주교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후작가의 계승자가 될 데릴사위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후작과 다르다.
앞으로 줄리어스 일가의 비위를 맞추는 기준점에 조금 변동이 있겠구나.
대주교는 나쁘지 않다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상업이 발달하고 사원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시기였다.
대주교는 후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원이 너무 귀족의 권세에 치여 불이익을 보지 않도록 잘 처세하는 인물이었다.
어떤 주임사제들은 고위 사제의 자존심을 세우며 영주와 신경전을 벌이고 대립하거나 사원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하기도 했지만,
대주교는 스스로를 유연하게 잘 굽히며 융통성이 있는 성격이었고 영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원과 사제들이 영주로부터 대접을 잘 받는 데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혹자들은 사제로서 자존심이 없다느니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대주교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교황과 영주, 신도들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미사 직전의 대주교는 무척 바쁠 텐데도 그는 아서와 크리스티나에게 충분히 시간을 할애했다.
아서의 영웅적인 업적과 오 년 동안 사원에 참석해 꾸준히 기도를 하고 그를 기다린 크리스티나의 정절, 그들을 보살핀 신의 은총에 대한 덕담이 오갔다.
보좌 사제가 와서 미사 준비를 시작해야 함을 알려주었다.
“대주교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주교가 무척 아쉽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사 끝나고 다시 뵙겠습니다.”
아서가 묵례했다.
“네.”
크리스티나가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혔다.
* * *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귀빈석으로 에스코트했다.
서둘러 치맛자락을 들고 그들을 따라가던 후작 부인이 뒤편에서 사제를 붙잡고 물었다.
“공개 미사에 참석하는 것인데, 평범하게 일반석에서 참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안 됩니다. 안전 문제도 있고, 신도들이 두 분 모습을 뵈려다가 압사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어디서든 잘 보이는 곳에 계셔 주시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곁에 따라붙은 후작이 물었다.
“오만해 보이지는 않겠지?”
오늘의 추모 미사에 펄 공작 부인도 참석의 뜻을 비쳤다는 소식을 직전에 급히 전해 들은 탓에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오히려 두 분 모습을 누구에게나 공정히 보여 드리기 위해 귀빈석에 따로 계시게 하는 것이니까요. 규율로도 명시된 내용이니 누구도 오만하다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후작 부부의 걱정을 짐작한 다른 사제가 슬쩍 귀띔해 주었다.
“선황제 폐하 때 개선 미사에서 압사 사고가 난 적 있거든요. 그 후로 생긴 규율입니다. 펄 공작 부인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두 분은 이쪽이십니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반대편 귀빈석으로 안내되었다.
미사를 집전하는 대주교를 중심으로 양쪽 옆 위층에 각각 마련된 발코니형 귀빈석에 각각 아서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후작 부부가 자리하게 되는 구조였다.
* * *
귀빈석에 들어서 자리에 앉은 아서와 크리스티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서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주교는 5년 전 나와 혼인한 게 당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모르십니다. 그 아이가 베일을 쓰고 있었던 탓이겠지요. 그 애는 실제로 저와 꽤 닮았으니까요.”
아서가 실소했다.
“저런.”
“실망스러우신가요?”
아서는 무감하게 미소 지었다.
“이미 말이 맞춰져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아는 사람은 우리 집안 최측근들뿐입니다. 아서 경 쪽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 같지만요.”
“불만스러우신가요.”
“개의치 않습니다. 같은 배를 탔으니 침몰을 저 혼자 걱정하지는 않겠죠.”
아서가 입매만 올려 냉소했다.
“말을 맞추어 드리길 바라는 바가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고려해 볼 테니.”
크리스티나가 사근사근하면서도 냉랭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필요하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래에서 사람들이 환호했다.
대주교가 그들을 지나가듯이 언급한 탓이었다.
크리스티나만 예를 표하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더더욱 열광했다.
아서는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그저 차분하게 크리스티나의 곁을 지켜서며 개선장군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바가 있었으니, 그 귀빈석은 두 사람만을 위해 마련된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의 바로 옆 칸.
커튼을 친 상태라 보이지 않는 귀빈석에 앉아 있던 펄 공작 부인, 아그네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그들의 말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
이게 무슨 뜻이야?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아그네스는 숨마저 멈춘 채 귀 기울여 보았지만 둘 사이엔 냉랭한 침묵만이 흐를 뿐, 더 이상 아무런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새하얘진 손마디로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던 아그네스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망히 귀빈석에서 빠져나갔다.
“공작 부인?”
사제와 대화하고 막 따라오던 시녀들의 당황한 얼굴을 마주친 것 같지만, 어떻게 떨쳐 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 *
“…….”
공작 부인은 정신없이 걸어가다가 비틀거리며 계단의 난간을 짚고 멈추어 섰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대화가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오 년 전 아서와 혼인한 게…… 크리스티나가 아니라고?
베일을 쓰고 있던 아이라니?
그 대화는 도저히 믿기 힘든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후작가가…… 신부를?’
설마 루모스 상단의 청년이 말하던…….
실종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하녀라는 게?
분노가 찾아오기 전에 마음이 먼저 철렁 내려앉았다.
‘제거됐나?’
그리고 비로소 떠올랐다.
‘아니야! 살아 있다!’
그 여자!
내가 거리에서 마주친!
그 여자가 틀림없다!
‘찾아야 해. 그 여자를 찾아서 보호해야 해!’
공작 부인은 황망히 몇 걸음을 더 옮기다가 다시 멈추었다.
‘……가만.’
그럼, 아서가 가져야 하는 권리는?
줄리어스와의 혼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그래서 아서가 감추려고 하는 건가?
왈칵 대주교에게 불같은 분노가 일었다.
이런 멍청한!
신부가 바꿔치기 된 걸 몰랐다고?
신 앞에서 혼인성사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자가!
성사를 집전하며 눈을 어디에 달고 있었기에!
다른 증인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것인가?
후작과 후작 부인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
감히 이걸 외부인에게 아서의 외도처럼 말해?!
아서는 이걸 언제 안 거지?
홀에 울려 퍼지던 성가가 멈추고 있었다.
대주교가 단상에 나왔다.
미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볼 수 있는 거대한 홀로 몰려들어 있었다.
아그네스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
공작 부인은 퍼뜩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미사가 열리는 대형 홀로 들어가는 길목, 코너에 붙어 있는 사원의 소식지 판매대 앞에 서 있었다.
소량의 기부금을 받고 사원에서 수도사들이 필사한 소식지를 배부하는 곳이었다.
소식지가 가득 쌓여 있어야 할 매대는 텅 비어 있었다.
수도사도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고, 글씨가 빼곡한 안내문만이 판매대 앞에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 오전 소식지 필사본 배부가 끝났습니다. 】
【 오후 필사본 배부는 오후 미사 시간에 맞추어 시작됩니다. 】
【 소식지는 고정 구독자분들께 우선 배부됩니다. 】
【 소식지 구독권은 세례를 받으신 분들 가운데 감사 헌금을 내시고 특전으로 구독권을 선택하신 분들께 제공됩니다. 】
“……?”
공작 부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순간적으로 그 매대 앞에 사람의 잔상이 연기처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빈 소식지 매대 앞.
기웃거리며 소식지를 찾는 여자의 뒷모습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깜박이자 다음 순간엔 금발의 여자가 소식지를 들고 난간에 기대어 선 채 열중하며 그것을 읽고 있었다.
소식지에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에 가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한번 깜박인 사이, 여자의 환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흐릿한 오러의 잔영만이 연기처럼 남아 있었다.
공작 부인은 홀린 듯이 걸어가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
신문 매대의 옆, 벽에 붙어 있는 모호한 용도의 철제 난간에 옅은 오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작 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 철제 난간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자주 사용하던 만년필에 남아 있던 흔적과 비슷하게 보였다.
오러를 가진 사람이, 아마도 어떤 애착을 가지고, 오랫동안 반복해서 그 자리에 머물렀던 흔적.
“……?”
아니 대체…… 이 난간에 애착이 있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사물에 오러가 남는 이유는 내가 생각한 이유와 다른 건가?
공작 부인은 그 여자의 환상이 보였던 자리에 서서 소식지 판매대를 한 번 보고, 다시 난간을 만져 보았다.
“!”
순간 그녀의 검은 장갑 위로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오러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공간에선 보이지 않았던 오러의 흔적이, 검은 천 위에서는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눈에 힘을 주어 찌푸리며 잘 보이지 않는 흔적을 힘들게 따라갔다.
그리고 비로소 사원 밖으로 나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었다.
* * *
그리고 그날 밤.
레이나는 깜짝 놀라서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레…… 렘브란트 경?”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합니다. 좀 늦었죠?”
레이나가 당황해서 그를 가리키며 버벅였다.
“어, 어떻게 여기…….”
그가 웃으며 유쾌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을 만나러 오겠다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