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가지 말라고 해 봐
(106/210)
106. 가지 말라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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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가지 말라고 해 봐
2022.09.04.
천천히 닿은 입술이 이내 깊이 맞물렸다.
레이나가 그의 팔을 쥔 채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입맞춤은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이어졌다.
……왜 안 피해.
입꼬리에 웃음을 매단 채 그가 안타까이 물었다.
레이나는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대답했다.
……오늘만요.
작게 속삭인 소리가 다시 겹쳐진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아직 제 사람이니까.
……지금만은 당신이 내 사람 같아요.
* * *
새카맣던 하늘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날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생각한다.
“……이제 가셔야 해요.”
아서가 나직이 속삭였다.
“조금만 더.”
그가 레이나의 뺨을 감싸 쥐고 다시 입술을 내렸다.
레이나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입술은 차가웠다.
그러나 그 안의 열기는 몹시도 뜨거워서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 * *
서서히 구름이 걷히며 동쪽에서 시작된 빛이 하늘을 쪽빛으로 물들였다.
생각보다 이르게 새벽이 왔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언덕에 가득한 새하얀 꽃이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민 햇살을 받아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오르며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던 붉은빛은 사라지고 투명한 햇살이 땅에 내렸다.
바람이 풀잎을 흔들었다.
오랫동안 입 맞추던 아서가 잠시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가지 말라고 해 봐.”
레이나는 숨을 고르며 엷게 웃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정말 그러고 싶어지면 안 될 거 같아요.
당신 발목을 잡기 전에 가세요.
그녀가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서는 다시 그녀에게 깊이 입 맞추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흔들리게 할 수 있을까.
레이나는 그에게 기대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날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고마워요.”
레이나가 그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 저 할머니한테 보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높이 날아가길 바랄게요.
케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레이나는 어서 가라는 말 대신 말했다.
“……감사해요. 아서 경.”
* * *
눈을 떴을 때는 산장의 침대 위였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의자 등받이에 비에 젖은 옷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젖은 옷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뒤 머리맡에 놓인 꽃을 보았을 때,
레이나는 왠지 가만히 침묵하게 되었다.
레이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
눈이 조금 뜨거워졌지만, 눈물이 나진 않았다.
레이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아서의 눈앞에서 급히 감추었던 스크랩북과 신문 기사가 선반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
스크랩북 사이에 끼워진 소식지를 펼치는 대신, 레이나는 혼인 서약서가 끼워진 추억 노트를 펼쳤다.
레이나는 그 앞에 앉아 가만히 지난 밤의 기억을 헤아렸다.
창을 두드리던 도토리 소리.
힘들게 왔다며 웃던 당신.
차가운 몸. 젖은 옷.
하지만 소리 없는 이슬비마저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보이던 밤.
그와 함께 걸어간 비 오는 산길.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갔던 나만의 장소.
잠시 후.
레이나의 노트에는 창문 너머로 나무에 앉아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며 웃던 사람과,
하얀 꽃이 가득한 언덕 위에서 동이 트는 새벽 풍경의 스케치가 그림으로 남았다.
“…….”
그리고 레이나는 머리맡에 남아 있던 꽃에서 꽃잎 한 장을 떼어 페이지 한구석에 붙인 뒤
레이나 아스타린. 이라고 적고
노트를 덮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아서는 비에 젖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셔츠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방으로 돌아와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던 아서는 잠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다가, 가슴 포켓에 꽂혀 있던 레이스 손수건을 꺼냈다.
“…….”
아서는 그걸 검의 그립 위쪽에 묶었다.
그대로 검을 쥐어 보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손수건이 닿았다.
“…….”
그녀가 손을 잡아주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나쁘지 않았다.
“각하. 케이입니다.”
밖에서 보좌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아서가 문밖으로 답하자, 케이가 들어와 예를 표하고 일정을 안내했다.
“줄리어스 사원에서 전사자 추모 미사와 개선군을 위한 승전 감사 미사 일정이 있습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줄리어스 대주교와 오찬 약속 잡아두었습니다. 결혼식 이야기의 운을 떼어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서가 검을 차며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래.”
* * *
“…….”
줄리어스 저택 앞에 마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던 아그네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가지.”
그녀의 맞은편에서 졸고 있던 시녀가 퍼뜩 일어나며 눈을 비볐다.
“아, 네, 부인. 어디로 모실까요?”
아서는 무사하다.
저택에서 아서의 오러가 희미하게나마 다시 흘러나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줄리어스 저택 안에서 일하기 시작한 황실의 하녀들을 통해 아서가 간밤에 자리를 비웠다가 방금 돌아왔다는 것도 확인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눈으로도 아서가 저택에 돌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오러의 흔적이 느껴졌다.
“…….”
그러나 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서가 전날 밤처럼 오러를 펼치지 않는다.
그리고 아서의 오러는 확연히 몸을 사리며 희미해져 있었다.
그의 오러는 저택 안, 그에게서 가까운 몇몇 곳에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서는 무리하고 있다.
간밤에 본 오러는 지나치게 넓은 범위에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재능이 뛰어나서 가능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역시 그런 식으로 사용해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서가 사용하고 있는 오러는…….
아무래도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
내가 오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어쨌든 그녀는 지난밤처럼 밤새 안절부절못하며 아서의 안위를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사원으로 가지.”
“네, 부인. 그럼 사원에 방문하신다고 연통을 넣겠습니다.”
“그래.”
일단 루모스 상단을 확인한다.
그다음은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다시…….
그리고 그녀는 마차 옆에 마련된 포켓에서 카드와 깃펜을 꺼냈다.
“잠깐만. 남길 게 있으니 아직 출발하지 말게.”
그녀는 카드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장 반지로 카드에 펄 공작 부인의 증명을 남긴 뒤, 그것을 마부 옆에 앉아 있는 호위에게 건네었다.
“렘브란트 경에게 전하게.”
“예, 부인.”
호위가 공작 부인의 전언을 받아들었다.
* * *
레이나는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두 개의 찻잔을 보고 테일러가 무언가를 알아챘음을 눈치챘다.
“…….”
레이나는 가늘게 속눈썹을 떨며 눈을 감았다.
“테일러.”
“응.”
돌아보는 테일러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온화하고 곧은 갈색 눈.
서글서글한 눈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근심 모르는 햇살이 비쳤다.
소년에서 청년까지 레이나가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미소 짓는 테일러의 얼굴에서 전에는 몰랐던 감정이 읽혔다.
레이나가 줄리어스 저택에서 나온 후, 테일러는 레이나에게 첫날 외에는 그 차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레이나는 무릎 위에 둔 손끝을 몇 번 만지작거리고,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짐짓 그를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달칵.
레이나는 시선을 내려 아무렇지 않게 검붉은 물이 담긴 찻잔을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내가 너한테 10년 후에도 좋은 사람으로 남게 해 주라.”
“…….”
더는 안 된다.
이건 테일러에게 못 할 짓이었다.
단호해져야 할 때였다.
“좋은 사람 만나.”
레이나가 테일러를 보고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찻잔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검붉은 물이 필요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이나는 테일러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부탁할게. 내가 너한테 너무 매정하게 하면서 정 떼지 않아도 되게…….”
레이나가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부탁했다.
“그만 마음 접어 주라.”
“…….”
레이나는 검붉은 물이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상처 주면서 정 떼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은 했지만, 이런 일엔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레이나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만.”
그러나 테일러가 가만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막았다.
테일러가 가라앉은 눈으로 웃었다.
“차는 나 없을 때 마셔.”
“…….”
테일러가 레이나의 손에서 잔을 가져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았다.
상처 주려는 시도에도 테일러는 그녀보다 더 침착했다.
“보여 주지 않아도 되니까.”
“…….”
그리고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찻잔을 빼앗겨 비어 버린 손을 꾹 쥐었다.
“…….”
테일러는 눈치가 너무 빠르다.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간밤에 잠자리는 괜찮으셨어요?”
“으응? 레이나 친구……?”
“네에, 할머니. 저예요. 테일러예요.”
“으응. 여기는 어디여……?”
“저희 별장에 놀러 왔어요.”
“별장……?”
쉽게 낯선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테일러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일러는 그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며 할머니를 다정하게 챙겨 주었다.
레이나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테일러는 설령 내가 아서 경이랑 어떤 사이래도, 어떤 사이였대도 상관없는 거야.
테일러는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