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별이 내리는 밤에 (105/210)


#105. 별이 내리는 밤에
2022.09.01.


줄리어스 번화가의 호텔.


“…….”

펄 공작 부인, 아그네스는 호텔 발코니의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오러가 한밤의 어둠이 드리워진 줄리어스 영지 곳곳에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여린 비는 오러의 빛을 산란시키며 지상에 반짝이는 달무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때때로 어떤 곳에는 진주 가루를 붓질한 듯 좀 더 밀도 높은 오러의 흔적이 빛의 길을 그리고 있었다.

루모스 상단.

그들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여기에 있는 이유였다.


“…….”

아래층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어왔다.


‘진짜 펄 공작 부인이라고? 확실하냐?’

‘그렇다니까요. 며칠간 저희 호텔에서 머물기로 하셨습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가시고 내일 인사드리세요.’

‘허어……. 아니 어떻게 공작 부인께서 우리 호텔에……. 귀족들이랑 다른 상단들이 모시겠노라고 줄을 섰을 텐데…….’

뿌듯한 듯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 목소리 좀……. 주무실 텐데 부인께서 깨시겠어요.’

‘알았다, 알았다. 아들아, 한데 대체 어찌한 게냐?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연줄을 만든 것도 그렇고, 요즘 네가 도대체 무슨 마술을 부리는 건지 나는 기특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

아그네스가 정중하게 방문을 청하는 수많은 귀족들을 사양하고 그곳을 친히 자신의 숙소로 정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가까이에 두었을 뿐 아그네스는 딱히 뭔가를 알아보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행보이기도 했고, 그녀가 오러를 볼 수 있다는 비밀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작 영애와 각별한 상단이라더니, 호텔이 좋네요.”

“그러게요. 호텔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던데.”

“…….”

아그네스와 시녀들이 머물기로 결정한 곳은 루모스 상단이 사들인 호텔의 가장 높은 특실이었다.

왜 그녀가 좀 더 공작 부인의 격에 어울리는 높은 귀족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는지 시녀들은 의아한 모양이었지만, 시녀들은 아그네스의 안목을 칭찬하며 말을 이어갔다.


“야경이 제법 운치가 있는데요?”

“줄리어스가 밤에 개선식을 한 게 줄리어스의 야경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라더니. 그럴 만하네요.”

시녀들이 아그네스 곁에서 야경을 함께 바라봐주며 몇 마디를 건네다가 아그네스가 그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나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

아그네스는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찰하듯 감돌고 있는 차가운 은빛 오러가 상단의 후계자와 그의 경비병들, 사용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아서가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오러를 사용하여 추적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서는 어째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는 걸까?


“…….”

아그네스는 자신의 검은 장갑 위로 일렁이는 오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저택에서 헤어질 땐 나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면 반짝이는 오러가 더 잘 보여서, 아그네스는 어두운 남색의 슬립 드레스에 검은 숄을 걸친 차림으로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투명한 은색으로 반짝이는 오러가 그녀의 몸 근처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듯 스치는 오러였다.

깨끗하고도 서늘한 은빛 오러가 잔잔히 일렁이는 모습은 그녀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아서가 자신에게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은 의도가 있었고,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러나 거리에서 빛이 쏟아지는 여자를 마주치고 나서 얼마 후.

아그네스에게 아서의 오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아그네스가 ‘그녀’를 마주쳤다는 것을 보고 받은 후 조심스럽게 아그네스의 기색을 살피기 시작한 것처럼.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거리감.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여자.

그 여자를 마주친 후, 나를 오러로 탐색하기 시작한 아서.

아그네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

설마 아서의 혼인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건가?

황실이 보증하고, 나와 교황 성하가 증인으로 서명한 혼인 계약이었는데.

감히?


“…….”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며 흔들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줄리어스를 상대로든, 루모스 상단을 상대로든, 아서를 상대로든.

어떻게 된 일인지 대화해 보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명확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서의 대모이면서도 한 번도 다정하게 손 내밀지 않았는데.

아서가 당당하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후에야 새삼스럽게 관심을 내비치며 어른 노릇을 하려 들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방관자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줄리어스를 방문한 건, 그저 잘 컸다는 걸 확인하고 축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중에는 개인적으로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보고 싶기도 했었던 듯하지만.

어쨌든 오러를 볼 수 있다는 걸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아그네스가 평생 감추어 온 비밀이었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굳이 루모스 상단을 가까이 둔다는 선택을 했으면서도 그들에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마도 아서가 듣고 있을 테니.


“…….”

권위를 부여하되, 정은 주지 않는 후견인.

그 정도면 외면받는 황제의 사생아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 거리감이 갑갑했다.


“…….”

아그네스가 피곤해 보이자 시녀들은 그녀가 무릎에 덮을 담요를 가져다주고 조명을 어둡게 조절해 주었다.

아그네스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아그네스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바깥에서 자꾸 그 여자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 여자의 놀란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아서의 오러가 자신을 지켜보기 시작하자,

그녀가 달아나던 모습마저 새삼스럽게 돌이켜 생각하게 되며, 그 여자가 뭔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

아그네스가 눈을 크게 뜨며 흠칫했다.

툭.

무릎에 둔 담요가 떨어졌다.


“부인?”

시녀들이 의아하여 그녀를 불렀다.


‘오러가……?’

그녀에게 맴돌고 있던 아서의 오러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굳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자신에게서뿐만 아니라 창밖의 풍경에서 모든 오러가 흩어져 가고 있었다.


‘아서?’

덜컹.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서가 오러를 거두어들이고 멈추어 섰다.


“……앞이 안 보여.”

레이나가 어둠 속에서 손을 잡고 끌어 주었다.


“이쪽이에요.”

아서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 밤에 산을 타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레이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해요……. 비가 와서 길이 험해졌을 걸 생각 못 했어요.”

레이나가 돌아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요.”

레이나가 후드에서 떨어지는 비를 훔치며 고개를 위로 꺾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별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별이라…….

아서가 작게 웃었다.

날씨가 흐려서 다행인가.

별은 어떻게 해도 그가 볼 수 없게 된 것 중 하나였다.

오러는 별에 닿을 수 없으니.


“여기서 별이 많이 보여?”

레이나는 조금 아쉬워하면서 대답했다.


“네. 맑은 날에는 은하수도 보이거든요. 정말 멋있는데.”

아서가 웃었다.


“또 와 보지 뭐.”

레이나도 웃었다.


“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비 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발걸음 소리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잎새에 모였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또옥…… 똑, 공기를 울린다.


“…….”

다람쥐인가. 혹은 올빼미.

오러 없이 느끼는 불확실한 감각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를 이끌어 주는 잡은 손도.


“……이쪽으로 자주 다녔어? 밤에 혼자 다니기는 위험해 보이는데.”

묻는다.


“음……. 사실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하고선 거의 저택에서 살았으니 자주는 못 왔어요. 그래도 오며 가며 지날 일 있을 땐 가끔……. 여기가 지름길이긴 하거든요.”

그녀가 답한다.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멈추어 있었다.

구름 밖으로 나온 달빛이 풀잎 위의 밤이슬에 영롱하게 부서졌다.

레이나가 그를 인도했다.

아서가 멈칫 멈추어 섰다.


“…….”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왔다.

일부러 오러를 펼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감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무 우거진 느낌이 사라졌다.

그리고 언덕 위에 펼쳐진 너른 공터에,

그가 알지 못하는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

그의 손을 놓고 몇 걸음 그 속으로 총총 걸어간 레이나가 팔을 벌리고 뿌듯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짜잔.”

그녀가 웃었다.


“……예쁘죠.”

“…….”

아서가 따라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서의 눈으로는 꽃의 색도, 종류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눈 대신 향기와 소리와 존재감으로 그 광경을 제 안에 들였다.

적막이 아름답다.

그녀가 제 대답을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예쁘네.”

레이나가 말을 하지 않은 채 쑥스러운 듯 웃는다.

솔직히 꽃은 잘 모르겠고, 당신이 예쁘다는 말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방어적인 본성이, 꽃의 이름은 몰라도 꽃의 색을 모르면 안 될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속살대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겠나.

적막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아서는 피식하며 고개를 숙이고 장갑을 벗었다.


“무슨 꽃이야?”

레이나가 맑게 웃었다.


“이름은 저도 몰라요.”

아서가 꽃밭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웃었다.


“그래?”

아서가 몸을 숙여 발밑의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럼 내가 지어 볼까.”

그가 꽃줄기를 들고 허리를 펴며 웃었다.

꽃을 느슨히 쥔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그는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을 입에 담았다.


“레이나.”

그녀가 멈칫했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비라는 뜻인가?”

“…….”

아서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레이나 앞에 멈추어 그녀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었다.

레이나는 피하지 못하고 얕게 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귓가를 손끝으로 쓸며 다시 말했다.


“아스타린.”

“…….”

아서가 나직이 웃었다.


“……별이라는 뜻이고.”

레이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작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이름을 불린 건 처음이었다.

세상이 저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그 이름으로 부를까.”

“…….”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빨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교차했다.


“…….”

그가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몸이 떨렸다.

그의 서늘한 손이 레이나의 목을 감싸고 내려오며 뺨을 스쳤다.

뺨을 쓸던 그의 엄지가 입술 끝에 닿았다.


“레이나.”

그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

조용한 눈에 묻어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내 모른 척했던 것.


“…….”

그러나 처음으로 그를 피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레이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아서가 고개를 내리며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가까이 닿았다.


“레이나 아스타린.”

그의 회색 눈 속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레이나는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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