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고된 하루 (102/210)


#102. 고된 하루
2022.08.21.


그날 하루는 유독 고되었다.

아서는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폭우 속에서 일주일을 잠들지 못했을 때도 이 정도로 피로하지 않았는데.

피곤하다.

하지만 놓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러를 거둘 수 없었다.

펄 공작 부인의 방문에 황실 하녀들까지 들어오며 후작 부인은 조만간 실수를 하겠다 싶을 정도로 충분히 예민해졌다.

렘브란트에게 다녀온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언성을 높이며 서로의 잘못을 들추어 쏘아대고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 그들의 약점이 될만한 정보들이 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저지를 일에 대한 힌트들도 무수히 쏟아졌다.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저택에서 움직임이 제한되자 상단을 통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아서 측이 레이나의 실종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듯한 지시와 움직임을 보였다.

기사들은 잘 피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행보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렘브란트 역시 어느 정도는 레이나의 행방에 그가 관여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속도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황실 하녀들 일부가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지시를 받았다.

렘브란트가 아서의 편의를 살펴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고, 레이나의 안전도 걱정해 주는 듯하지만,

아서로서는 예기치 않은 변수가 되지 않도록 파악하고 견제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적당히 예상한 범위 내에서 움직여 주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쪽은 이제 ‘브로디’를 통해 어느 정도 정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하녀들 사이에 수상한 동향이 없는지도 관찰한다.

줄리어스의 하녀들도 마찬가지…….

후작 내외가 움직이고, 다시 크리스티나가 움직인다.

아마도 ‘사생아’ 이야기가 충분히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자극한 모양이다.

아서에게 정부가 있다는 식으로 끌어가려던 포석은 일단 멈추었다.

하지만 언제든 재개될 수 있는 상태.

그쪽 움직임은 계속 살핀다.

지끈…….

눈에 작열감이 느껴진다.

슬슬…… 해결하지 않으면 시력이 더 손상되는 걸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펄 공작 부인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오러로 살피지 않고 있었지만, 어림없다는 듯이 전령 기사가 달려와 말해 준다.

레이나가 펄 공작 부인을 마주친 것 같다고.

일단 거처를 옮길 생각인데, 공작 부인의 방문과 관련해 지시하실 내용이 있냐고.

혀를 차며 결국 공작 부인의 방향으로까지 오러를 펼쳐 두고 위험한 요소가 없는지 파악한다.

그들이 그녀에게 좋지 않은 방식으로 마주치지 않도록.

피로하다.


“…….”

급기야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한숨이 나왔다.


“하아…….”

아서는 고개를 젖히며 허공을 응시했다.

빗방울은 가느다란 안개 수준이었지만 젖은 옷이 몸을 거추장스럽게 옭아매니 급격히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

인정한다.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다.

정신적 피로 탓인가 오러까지도 무겁게 느껴진다.

날 선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

더는 미루지 못하겠다.

일단 안전한지 확인하고…….

가능하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아서는 손등을 올려 눈을 눌렀다.


 

* * *



[너한테 나쁜 기억으로 남진 않은 사람인 거지?]

아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서는 귀 기울였지만,

말하지 않은 것인지, 오러의 상태가 좋지 않아 듣지 못한 것인지 들리지 않는다.

피로 때문에 오러가 순간순간 무뎌진다.

잠시 멈춰 선 채 오러를 집중시켜 귀 기울여 보지만 들리지 않는다.

포기하고 다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간신히 오러 끝에 어렴풋한 목소리가 걸린다.


[그럼 나도 원망 안 할게.]

“…….”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테일러 로렌슨의 목소리로 하여금 위치는 가늠할 수 있었다.

저쪽이구나.

그녀가 있는 곳.

* * *

카일 황태자의 말이 맞다.

오러에 의존하는 건 나쁜 버릇이다.

트리스탄의 말도 맞다.

목숨이 걸린 전장도 아닌데.

이젠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 안 남았으니까.

순조롭게…… 당신을 안전하게 보내주려면.

지끈.

눈에 작열감이 든다.


“…….”

이제 정말 오러를 쓰는 건 그만둬야 하는데.

조금만 더.

* * *

그녀가 머무는 곳이 안전하다는 건 확인했다.


“…….”

만나고 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알아챌 테니…….

하지만 어느새 그녀가 잠들어 있는 창문에 도토리를 던지고 있었다.

톡…….

톡.

아.

정말 한계다.

싶은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멍해져 가던 감각이 깨어나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그녀를 뒤쫓는다.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

피식.

웃으며 다시 도토리를 던졌다.

톡.

멈춰 선 그녀가 몸을 돌린다.

다가오는 발걸음.

그리고 문이 열렸다.


“…….”

아서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아팠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새카만 세상에 네모난 빛이 열려 있었다.

* * *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열린 창으로 가랑비가 들이쳤다.

비가 오는 줄도 몰랐는데,

안개처럼 잔 빗방울은 소리도 없이 세상을 적시며 내리고 있었다.

바깥은 어두웠다.

안으로 들이치는 빗방울이 금가루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풍경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이 세상과 상관없는 동화 속 같았다.

비 냄새가 바람에 실려 방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온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거기에 파묻힐 듯 숨을 들이쉬다가 멈추었다.

그 사람이 웃었다.


“……이렇게 쉽게 열어 주면 어떡해? 밤손님이면 어쩌려고.”

“…….”

탁.

레이나는 문을 도로 닫아 버렸다.


“…….”

네모난 빛이 쏟아져 나오던 문이 닫히며 아서의 곁은 사위가 시커메진다.


“……어?”

당황한 아서가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부인?”

“…….”

레이나는 멍하니 닫힌 덧문을 바라보았다.


“…….”

아서의 목소리에 곤란한 웃음기가 담겼다.


“……잘못했어. 열어 줘.”

“…….”

응답이 없다.

문을 닫은 레이나가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서는 더 이상 조금도 오러를 쓸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웃음이 나오고 여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이 너머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당신이 이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


“……안 열어 줄 거야?”

레이나는 어쩔 줄 몰랐다.

순간적으로 왜 문을 닫아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왠지 다시 열어 주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선 항상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문을 열지 않아도 소리는 바람에 실려 들어온다.


“추워.”

“…….”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온다.


“나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무리했단 말이야.”

“…….”

“비도 맞았는데.”

청승맞게 엄살을 부리는 목소리에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보고 싶어.”

예기치 못한 말에 갑자기 콱 가슴이 죄어든다.

……거짓말쟁이.

그러나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뜬 레이나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손을 뻗어 문을 열어 주고 만다.

다시 빛에 드러난 아서가 그림처럼 근사하게 웃었다.


“부인.”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소리를 해놓고도 막상 웃는 얼굴은 완벽하기만 해서 그는 그저 느긋하게 이 시간의 짧은 유희를 즐기는 것만 같다.

아서가 웃었다.


“나 보고 싶었어?”

레이나는 숄을 당기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아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풋 소리 내는 입을 손등으로 가리고 웃었다.


“너무하네…….”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레이나는 그가 걱정되어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느긋하게 앉아 있어도 위태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닿은 손이 얼음장 같다.

창틀을 딛고 아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려서는 순간, 아서는 지친 듯 살짝 중심을 잃으며 다른 손으로 등 뒤의 창틀을 짚었다.

어딘지 평소와 달랐다.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의도한 것처럼 그냥 등 뒤로 창문을 닫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태연한 척하는 그를 금방 알아챈다.


“……괜찮아요?”

“하하.”

아서는 민망한 듯 웃더니 그대로 레이나의 등을 당겨 안고 기댔다.


“힘들어.”

 

 


“…….”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무리했다는 건 엄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같지 않게 정말로 지친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아서는 레이나를 품에 안은 채 기대듯 서 있었다.

몸이 차다.


“……나무는 왜 타셨어요? 정문으로 들어오시지…….”

아서가 웃더니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다들 자길래…… 깨우기 미안해서.”

나직한 목소리가 몸을 울린다.

레이나가 피식 웃었다.


“저는 깨워도 미안하지 않고요?”

아서가 작게 웃었다.


“당신은 잠들어 있으면 깨워 달라고 했잖아.”

“…….”

레이나도 그 말을 기억하고 싱겁게 웃었다.


“……기사분들이 보고하셨어요? 금방 알고 오셨네요. 찾기 쉽지 않은 곳인데.”

아서가 느릿하게 대답한다.


“응.”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귀 기울이니 바람 소리 사이로 작은 빗소리가 들린다.


“……기사분들한테도 오신다고 말씀 안 하신 거예요? 오겠다고 하셨으면 안 자고 기다렸을 텐데.”

아서는 뭐가 재밌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됐어.”

내가 2층에서 자는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

이렇게까지 친밀한 자세로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레이나는 아서의 몸이 너무 차가워서 잠시 그를 안은 채 고민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그냥 차가운 손을 한동안 잡아 준 후에 그를 부드럽게 밀어 떼어놓았다.

그의 손은 온기를 놓아주기 싫은 듯 팔을 스치며 아쉬워하는 기색을 남기지만, 아서는 그저 레이나가 미는 대로 놓아주고 밀려난다.


“…….”

바라보는 눈이 무슨 뜻인지 알 듯 말 듯 하다.

레이나는 그냥 그를 외면하며 말했다.


“옷 벗으세요.”

“…….”

그녀가 황급히 덧붙였다.


“옷이 젖으셔서요. 마른 옷 가져다드릴게요. 수건이랑.”

아서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몸이 차요. 비 맞으셨잖아요.”

“그냥 약간 젖은 거야. 비 많이 오지도 않아.”

“흠뻑 젖으셨어요. 손도 굉장히 차고…….”

아서가 웃었다.


“그렇게까지 있을 시간은 없어.”

레이나가 멈칫했다.


“……할 얘기가 많아.”

“…….”

레이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가셔야 해요?”

“날이 밝기 전에.”

아서는 레이나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 귀 뒤에 정리해 주었다.


“……미안해.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안 됐어.”

“…….”

레이나는 괜찮다는 듯 웃었지만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가씨랑 결혼식 다시 올리신다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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