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101/210)
101.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101/210)
#101.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2022.08.18.
“네가 그러지야 않으리라 생각한다만, 함부로 너 좋다는 애들 마음 받아 주고 그러지 마라. 내가 아버지로서 너 아까워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저택 안에서 남자를 만난 하녀 애는 귀족 저택의 규칙에 따라 이 저택에서 살지 못하게 된다. 질시의 대상이 되고 동료들에게 괴롭힘도 당할 수 있어. 평생 인생을 망치거나 너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걸 막을 방법은 네 책임감뿐이고, 네가 책임감을 발휘하는 방법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네 신중함을 네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뿐이다. 네가 잠깐의 호감으로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물론 그 애는 네 마음을 얻어 잠시는 행복하겠지만, 머지않아 많은 걸 잃게 될 거다.”
아버지가 종종 당부하곤 했던 가르침이었다.
별걱정을 다 하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테일러는 그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누구도 ‘그런 의미’로 좋아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신분 차이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최대한 너랑 비슷한 애를 만나는 게 좋아. 계산적이라는 듯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너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이기도 해. 신분 차이가 나면 더 그렇다. 네가 너 좋다는 사람과 만나도, 헤어져도, 너는 다치지 않는다. 다치는 건 상대다.”
그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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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의 대부분의 귀부인들이 그렇듯, 줄리어스도 저택 내에서 하녀들이 남자를 만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저택과 관리자인 안주인의 평판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저택 안에서 일하는 남녀가 연애를 하다가 들키거나 결혼하게 되면 둘 중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테일러와 레이나가 모두 아는 하녀 하나가 결혼하며 저택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동료 하녀의 결혼과 사직이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나무 밑에서 테일러와 점심을 먹으며 레이나는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결혼해도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줄리어스 저택만큼 주급을 잘 주는 데는 없으니까. 결혼했다고 그만두기는 아까워.”
테일러는 어리둥절해 물었다.
“……결혼하고도 계속 일을 한다고? 꼭 그럴 필요가 있나?”
레이나는 제 생각에 푹 빠진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당연하지. 나는 아이들이 많았으면 좋겠거든. 하지만 아이들은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으니까. 아이 한 명당 2할씩 쓰게 해 주려면…….”
“……응? 2할?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들 취미 생활에 쓰는 돈 말이야. 내가 용돈으로 줄 거야.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해.”
“……?”
“그러니까, 애들은 돈을 못 벌잖아?”
무슨 말인지 몇 번 더 물어보고 나서야 테일러도 알게 되었다.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더라도, 현재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과하지 않은 최소한의 돈을 반드시 쓴다는 레이나만의 원칙.
하지만 나이가 차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그럴 돈이 없으니까 레이나가 해 주어야 한다는 거였다.
어쩐지. 돈을 열심히 모으는 거 같은데 어떻게 나한테 준 것 같은 비싼 초콜릿을 가지고 있었나 했는데 납득이 되었다.
나름대로 원칙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나는…… 레이나의 1할의 즐거움을 양보받은 건가?
레이나가 눈을 빛내며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발끝을 까닥이며 웃었다.
“내가 생활비를 계산해 보니까, 내가 벌면 아이는 셋까진 가능할 것 같아. 애들이 좀 자라서 돈을 같이 벌어주기 시작하면 좀 더 갖는 것도 가능하려나?”
“…….”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네가 벌지 않아도 여덟 명도 가능한데.
“……생각하고 있는 남편감은 있고?”
레이나가 와장창 현실의 벽을 마주친 사람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건 아직……. 우리 하녀들은 시간이 없잖아. 어디서 남자를 만나지?”
레이나가 계획하고 있는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미래에 너무 당연하게도 테일러가 없었다.
자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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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책임감과 신중함을 검증하는 시간이 흘렀다.
테일러는 몇 번씩 달려가려는 마음을 멈추어 세우며 몇 년 동안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지를 들여다보았다.
미래에 대해서도 여러 번 생각했고, 그 자신이 어른이 될 때까지 고민했다.
그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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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테일러는 레이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테일러의 고백을 들은 레이나는 당황스러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저택 내 연애는 안 되는데? 그리고 너는 우리랑 너무 다르잖아. 나는 나랑 비슷한 평범한 사람 만날 거야. 너도 그래야 하지 않아?”
놀랍게도 아버지가 했던 말이랑 똑같았다.
테일러가 몇 년 동안 내내 생각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예상은 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며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나는 네가 좋은데?”
그에 대한 감흥은 없어?
레이나는 여전히 웃었다.
진지하지 않게 듣는 거 같았다.
“나도 너 좋아하지. 하지만 우리는 그냥 친구 하자. 비슷한 사람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따라 웃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만 것 같다.
“장난 아니야.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어?”
그리고 좀 상처 입은 듯 찡그린 웃음이 나왔다.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대도 아무렇지도 않지?”
레이나의 표정이 얼떨떨하다.
그제야 레이나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경직을 거쳐 당혹감.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무슨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
아버지의 당부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상대의 마음을 받아 주는 입장인 경우만 말했고,
내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입장인 경우는 말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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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테일러는 생각해 봐 달라고 말했다.
테일러는 의사로서 정식으로 자격을 등록하고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떠났다.
사정이 생겨 예정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문 다음 돌아왔을 때.
레이나의 이마에는 작은 흉터가 생겨 있었다.
앞머리로 가려지는 위치였기 때문에 테일러는 알아채지 못했다.
“레이나.”
빗자루를 들고 정원을 쓸고 있던 레이나가 돌아온 그에게 미소 지었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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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정식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만 하고, 자신이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후작 내외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하지 않았다.
다만 레이나에게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조용히 털어놓았다.
테일러는 성인이 되었다.
이제 그 자신의 책임감과 신중함은 증명했다.
그리고 이젠 테일러는 홀로 독립할 수 있는 자격도 갖게 되었다.
떨어져 있는 사이 자신의 마음을 더욱 확신한 테일러는 조금 더 진지하게 고백했다.
“그동안 생각해 봤어?”
“…….”
“나 너 꽤 오래 좋아했어.”
“…….”
“너만 허락한다면 결혼하고 싶어.”
“…….”
너는 아직 아니어도 괜찮아.
너만 허락한다면……. 아니.
네가 ‘고민해 보고 싶다’ 정도의 마음이라도 있다면 난 결혼 전제로 만나 보고 싶어.
“…….”
레이나는 몇 달 전 테일러가 했던 것처럼.
왠지 상처 입은 듯 찡그려 웃는 표정으로, 곤란하고도 미안한 듯이 대답했다.
“미안해.”
레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숙였다.
“난 누굴 만날 생각은 없어. 너 아니라 누구여도……. 결혼은 하지 않을 것 같아.”
“…….”
테일러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이건, 돌려서 말하는 거절이었다.
간접적인 거절의 말의 종류야, 익히 알고 있었다.
거절하며 많이 해 봤으니까.
너는 아니라는 말 대신 상대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한 상냥한 거절의 말.
그래도 너무하잖아.
내가 널 뻔히 아는데.
“…….”
스스로도 자각했는지, 말해 놓고 입을 다무는 레이나를 보며, 테일러가 웃었다.
“……내가 고백할 줄 모르고 너무 이것저것 많이 말했다. 그렇지?”
“…….”
‘계시지 않습니다.’ 따위로 ‘만나주지 않겠다.’를 돌려 말하는 귀족들의 언어와 사교적 거절에 익숙한 테일러는, 담담하게 레이나의 거절을 접수했다.
“괜찮아. 어려워하지 마. 알았어.”
“…….”
그리고 언제나처럼 웃어 주었다.
“그래도 친구는 계속해 줄 거지?”
“…….”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친구로 돌아갔다.
그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다.
* * *
테일러는 조용히 소파에 기댄 채 손등으로 이마를 눌렀다.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키지 못하는 직업.
테일러가 후작 저택을 떠났던 유일한 시기.
그가 수도에서 우연한 기회로 높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작위를 받았던 그때.
‘크리스티나’의 혼인과 ‘줄리어스’의 이름을 건 아서의 출정이 있었다.
그 사이에 레이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
“…….”
괜찮아. 괜찮아…….
“…….”
테일러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눈을 감았다.
계속 괜찮은 척했지만,
계속 괴로웠다.
내가 그때 가지 않았더라면.
“…….”
그때 내 고백을 들으며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 * *
둘은 친구로 돌아갔지만, 테일러가 다녀온 이후로 레이나는 더 벽이 높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말수는 더 줄어들었다.
그래도 테일러에게만큼은 곁을 내주었다.
뭔가를 계속 미안해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할머니 이야기를 자기 아는 사람 이야기라고 돌려 물어보면서.
레이나는 그저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속 모를 아이’에서, ‘벽치는 성격으로 유명한 아이’가 되었다.
* * *
레이나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손을 위로 올려 쥔 것을 쳐다보았다.
“…….”
손에 테일러가 준 아서의 신문 기사가 쥐어져 있다는 게 웃겼다.
“…….”
레이나는 뭔가 허탈한 얼굴로 신문을 눈앞으로 들어 올려 쳐다보았다.
……대체 난 뭐 하고 있는 거야.
“…….”
왜 몰랐을까?
속도 없이 그걸 받아다 보고 좋아했다니.
레이나는 솔직히 자신이 원하는 신문을 테일러가 가져다주는 그 일이 3년 넘게 반복되면서,
테일러가 저처럼 아서 경 팬이거나 이런 영웅 스토리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
“…….”
오다 주웠다며?
바보.
“…….”
진짜 바보는 나다.
테일러 속이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딜런 경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걸 들킨 후에 그런 소리까지 한 적 있었다.
「사, 사실. 테, 테일러가 구해다 준 소식지에서 우연히 봐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테일러도 전부터 아서 경 소식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아서는 레이나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었다.
「……테일러 로렌슨이?」
그때 아서가 지었던 괴상한 표정을 생각하니 푸스스 쓴웃음이 나왔다.
“…….”
그대로 배 위에 신문을 내려놓은 레이나는 얼굴을 감싸 누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
내가 바보 멍청이야.
그동안 테일러가 했던 행동들. 테일러와 나눈 이야기.
내 일을 알게 된 후, 테일러가 돌이켜봤을 일들…….
어쩌면 테일러를 상처 줬을 내 행동들이 차례로 떠오르며 끔찍하게 부끄러워졌다.
레이나는 손바닥으로 찡그린 얼굴을 가렸다.
루칸 경과 했던 이야기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들었네. 미안합니다. 전 레이디를 밀착 경호하라는 명령을 받아서요. 근처에 있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니 앞으로도 참고해 주시고.」
「흠…….」
「근데 왜 거절했어요? 듣자 하니 전에도 고백받은 적 있는 모양이던데.」
“…….”
「레이디에겐 다시 없을 남자 아닌가? 좋은 기회잖아요.」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약하게 웃었다.
그죠.
하지만 조건 좋은 남자한테 제가 그렇게 환영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서 경도 그렇고 테일러도 그렇고요.
저한테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건 테일러한텐 일생일대의 실수라는 뜻이잖아요.
루칸 경에게는 테일러가 가까운 사람이 아니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아서 경이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는 없을 거잖아요.
저는 테일러가 소중하거든요.
“…….”
레이나는 침대 옆에 팔을 괴고 물끄러미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옛날의 기억들을 되새겨 본다.
결혼한다면 아이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릴없이 떠들어댈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우리 강아지 시집 보내면,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그런 말을 종종 했던 할머니.
테일러가 고백했던 것.
그 후에 했던 고민들…….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적은 몇 번 있었다.
나를 사고 싶다던 나이 든 귀족이 있었고, 상인이 있었고, 잘 알지도 못하는 동료 하인도 있었다.
테일러는 그중에 유일하게 두렵거나 혐오감이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
하지만 테일러는 나한테 너무 과분하다.
할머니가 들었으면 좋아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레이나는 잠든 할머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할머니. 테일러는 내가 좋대요.”
이제 내가 신 앞에 결백한 신부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도.
“걔는 왜 나 같은 걸 좋아한다고 할까요.”
괜히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꿈이 생각나더라고요.
하지만 난 이미 결혼했으니까.
내가 그런 평범한 가정을 갖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남편은 있는데…….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니까요.
레이나는 손에 쥔 기사를 보며 그 사람을 생각했다.
혼인 계약서…….
“…….”
「일곱. 헤어지게 될 경우, 작별 인사는 꼭 한다. 인사 없이 사라지지 않기.」
그건 그냥 유희였을까?
* * *
톡…….
레이나는 깜박 잠들었던 눈을 떴다.
할머니 옆방에서 짐을 정리하다 잠이 든 참이었다.
휘잉…….
바람이 느껴졌다.
외풍이 드는구나.
여기서 잠을 자지는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레이나는 몸을 일으켜 할머니가 계신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 침대는 안쪽으로 뒀으니 괜찮으려나?
감기 드시면 안 되는데.
가 봐야겠다.
숄을 당겨 걸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톡.
창문에서 작은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막 일어난 레이나는 창문 쪽을 보았다.
“……?”
그대로 다시 지나가려는데,
톡.
다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창가에 굵직한 참나무 가지가 무성히 자라있던 게 떠올랐다.
도토리가 부딪치는 소린가?
창은 나무 덧문이 닫혀 있는 상태였다.
외풍이 드는 게 바깥 창이 제대로 안 닫혀 있어선가?
레이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닫혀 있던 덧문을 열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과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휘몰아쳤다.
훅 바람이 들어오며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가을비.
나무 냄새.
칠흑 같은 어둠.
바쁘게 커튼을 흔드는 바람.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쥔 채, 다른 손으로 앞머리에 맺힌 비를 툭툭 털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체구.
반지를 낀 커다란 손.
몇 번이고 훔쳐보았던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
창에 닿아 있는 나뭇가지에, 그 사람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