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초콜릿 소녀 (100/210)


#100. 초콜릿 소녀
2022.08.14.


저명한 의사, 앨빈 로렌슨의 아들인 테일러 로렌슨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자랐다.

지금은 유명 의사의 아들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평범하게 촉망받는 의사가 되어가는 중인 테일러였지만,

어릴 때는 그 길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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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홉 살쯤이었을 수도. 열세 살쯤이었을 수도.

뭔가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데.

자전거로 분노의 질주를 하다 넘어져 주저앉은 테일러는 무릎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왠지 모르게 서러움에 차서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의사가 무슨 좋은 직업이라는 거야!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엄마를 살리지 못했잖아.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키지 못하면서!

난 의사 같은 거 안 해!

아무리 후작가가 로렌슨 일가를 총애한다 해도 너무 오냐오냐 한다고 생각되었을까.

하인들 하녀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단 한 명.

그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 하녀 애 하나가 지나가다가 멈추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어린 테일러는 그냥 서러움에 차 울고 있었다.

그 하녀 애는 뭔가를 부스럭거리더니 소리 없이 걸어오더니, 우는 테일러의 입에 포장을 깐 초콜릿 하나를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서러운 울음 사이에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초콜릿 맛으로 기억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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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에게 친절한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테일러에게 그 초콜릿 하녀가 유달리 기억에 남은 건, 그 애는 자기에게 한 번도 다른 하녀들이 하는 것처럼 붙임성 있는 친절이나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의 세상은 그에게 관심이나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아는 모든 하녀들은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초콜릿 하녀는 테일러가 이름을 모르는 유일한 하녀였다.

모두가 다가올 때는 다가오지 않아 자신이 이름도 모르게 해놓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 때 다가와선 제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는 애.

초콜릿을 줬으면서.

말을 걸지도, 기억해 달라고 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 애는 그 애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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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콜릿 하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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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야?”

조그만 몸으로 제 하반신만 한 걸레 양동이를 들고 가던 그 하녀 애는 손가락으로 제 턱 즈음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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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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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너.”

맑은 눈동자에, 여린 햇살 같은 밀빛 속눈썹이 긴,

아몬드 모양 깊은 눈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눈만 한 번 깜박이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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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

그 애는 딱히 어렵지도 않게 대답해 주었다.

왠지 이름을 말해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나 모르겠다.

어려운 애는 아니었구나.

레이나. 레이나.

그 이름을 곱씹어 보며, 테일러는 하나를 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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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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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방.”

부엌방 하녀. 최하층 하녀다.

하루 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설거지와 허드렛일만 하는 곳.

부엌방은 주로 새로 들어온 신입 하녀들이나 영 재주 없는 애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가장 힘든 곳이었기에 도자기 같은 비싼 걸 깨거나 실수를 했을 때 벌 받으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아는 하녀 애가 아가씨 드레스에 홍차를 엎지르는 바람에 부엌방으로 떨어졌다고 테일러 앞에서 울며불며 하소연했던 것이 기억났다.

다음으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부엌방 하녀들은 다치는 일도 많아, 주치의 선생님의 아들인 테일러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손에 바르는 연고나 약 같은 것을 덜 부담스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애는 왜 나한테 관심이 없지?

신입 하녀라 나나 아버지를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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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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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아. 테일러 로렌슨이지? 주치의 선생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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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아는데 왜 나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아?

어린 테일러는 모든 하녀들이 자기와 인사를 하고 친하게 지내는 줄 알았다.

이런 상대는 낯설었다.

초콜릿 하녀가 테일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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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필요한 거 있어?”

테일러는 어리둥절해졌다.

이 하녀는 왜 나한테 필요한 걸 묻지?

언제나 필요한 걸 말하는 건 하녀들이었는데…….

테일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하자, 초콜릿 하녀는 힐긋 자기가 가던 방향을 보고는 양동이를 고쳐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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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야 해. 하던 일이 있어서 오래 비우면 안 되거든.”

그리고 그 애는 저편 다른 하녀들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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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있으면 저기 하녀나 하인들한테 물어봐. 다들 로렌슨 선생님을 좋아하는 애들이니까 잘 대해 줄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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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이나 허스트 부인께 물어봐도 되겠지만……. 넌 또래 애들이 편할 것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너도 또래 애잖아.

초콜릿 하녀는 아몬드 모양의 눈을 한 번 깜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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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가볼게.”

그리고 그 애는 진짜 미련 없이, 이야기해서 기쁘다는 미소조차 없이 몸을 돌려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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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는 어리둥절해서 뒤에 남겨졌다.

왜 그냥 가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테일러는 뭔가 거절당한 기분으로 우두커니 남겨져 레이나의 등 뒤만 쳐다보았다.

주변에는 항상 친해지려는 애들 뿐이었다.

그런데 저 애는 왜 나랑 친해지려고 하지 않지?

너는 어떤 친구들이랑 친해?

너는 왜 나랑 안 친해?

부엌방은 안 힘들어?

늘 설거지를 할 텐데 손은 괜찮아?

연고는 안 필요해?

테일러는 주머니에 넣고 가지고 다니던 연고 통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이런 거 줄 수 있는데…….

다른 애들 다 그렇게 하는데…….

그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며 한동안 그 초콜릿 하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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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친구들에게 알아보니 레이나는 부엌방에서도 친해지기 어려운 아이로 유명했다.

일은 열심히 하고 애가 나쁜 건 아닌 거 같지만, 영 사교성이 없는 게, 하녀장 허스트 부인과 마님이 좋아할 만한 인재라는 말이 덧붙었다.

왠지 잔잔한 오기가 생겼다.

상당한 성실함과 노력을 기울여 테일러는 초콜릿 하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테일러가 여덟 번 정도 레이나를 찾아다니고 먼저 말을 걸면, 레이나도 테일러를 마주쳤을 때 두 번 정도는 테일러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게 된 것이었다.

그뿐이었지만, 테일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레이나가 먼저 말을 거는 사람도, 편하게 대화하는 사람도 거의 테일러뿐이었으니까.

얼마 후.

레이나는 부엌방 하녀에서 일반 하녀로 직급이 올라갔다.

레이나로부터 일반 하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레이나가 드디어 부엌방을 벗어났다니, 이제 급료도 오르고 일도 편해질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분이 좋은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레이나가 조금 기쁜 듯, 수줍게 웃으며 그 얘길 자기에게 직접, 가장 먼저 해 주었다는 것이.

그 순간의 좋아하던 얼굴이 계속 생각이 나며 웃음이 났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레이나가 다쳤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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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에 차서 달려간 테일러가 레이나의 팔을 잡아채 돌려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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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쳤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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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레이나는 언제나처럼 두 손으로 양동이를 들고 가고 있었다.

시선이 레이나의 메이드복 치마 아랫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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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피와 흙이 묻어 있는 치맛단 아래 상처 끄트머리가 드러나 있었다.

레이나의 무릎이 시원스럽게 갈려 있었다.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끔찍한 피멍도 보였다.

문득 그녀가 들고 있는 걸레 양동이에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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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걸 하고 있어? 다친 사람이 왜 이런 걸 해?”

하지만 그 애는 언제나처럼 맑은 눈동자에 밀빛 속눈썹을 한번 깜빡인 뒤 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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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다친 건 손이 아니잖아. 무릎을 써서 하는 일도 아닌걸.”

일 초 정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릎을 다쳤을 때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릎을 다쳤을 때 너는…….

하지만 레이나의 상처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바로 다시 툭 말문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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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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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테일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테일러는 레이나를 억지로 끌어다 정원 벤치에 앉히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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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기다려.”

몸을 돌려 달려가려다 말고 다시 레이나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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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 가지 마.”

테일러는 또다시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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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뒤, 멀찍이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고는 그 애의 손을 끌어다 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옮겨 앉혀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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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 혹시 하녀들을 만나면 내가 기다리라고 했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그리고 마침내 진짜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갔다.

테일러는 아버지의 조제실에 가서 약재와 붕대, 소독제를 가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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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이고 해 봤던 일이었다.

하지만 또래 여자애를 벤치에 앉혀 놓고 치마를 무릎 위까지 올리게 한 뒤 다친 무릎을 치료한다는 건 생각보다 난감하고,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이렇게 도구까지 들고 와서 갑자기 머쓱한 티를 내며 머뭇거릴 순 없었다.

여기서 당황해서 어색해져 버리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테일러는 당당하게 옆에 도구를 내려놓고, 뻔뻔하게 레이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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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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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가 슬그머니 치맛자락을 무릎 위에서 잡았다.

테일러가 침착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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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좀 더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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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는 레이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레이나의 갈린 무릎만 노려보았다.

테일러는 일이다, 일이다. 치료다, 치료다. 생각하며 혼신의 집중력을 발휘해 레이나를 치료해 주었다.

소독약을 흘려서 무릎의 상처를 드레싱해 주고 깨끗한 거즈로 조심조심 닦아낸 다음, 심하게 상처가 생긴 곳은 약을 발라 따로 처치를 했다.

상처가 빨리 낫는 약을 발라주고 감염되지 않게 거즈를 덧댄 뒤 붕대를 감아 주었다.

레이나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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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안 한다더니.”

왠지 창피해서 ‘의사 하겠다는 거 아니거든?!’ 하고 말하려던 순간 레이나가 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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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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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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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부터 왠지 의사 공부가 싫지 않아졌던 거 같다.

왜 그런지 생각하게 된 건 그보다 더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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