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숨겨진 집
(99/210)
99. 숨겨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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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숨겨진 집
2022.08.11.
“펄 공작 부인? 황제 폐하의 누님이요?”
루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했다.
리오넬이 곧바로 뒤쪽의 기사에게 눈짓했다.
직속 부하 기사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갔다.
펄 공작 부인이 줄리어스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의 보고를 전해 들은 리오넬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네요. 아무래도 이 근처로 오신 게 맞는 듯합니다.”
루칸은 팔짱을 끼고 선 채 신기하다는 듯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오셨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바로 마주치셨습니까?”
그러게요…….
레이나는 민망해졌다.
“죄송해요.”
루칸이 씩 웃으며 격려하듯 레이나의 등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치고 나갔다.
“안 들키셨으니 괜찮아요.”
“…….”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있던 테일러가 레이나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루칸은 기사들에게 지시를 하러 나갔고, 리오넬과 전령 기사는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각하께선? 뵐 수 있었나?
뵙지 못했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다녀가신 후 후작 내외와 긴히 대화 중이셔서요.
일단 이동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레이나든 기사들이든 이런 곳에서 공작 부인 일행을 마주치는 것이 좋을 리 없으니.
만에 하나라도 동선이 겹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즉시 여관방을 빼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레이나는 서둘러 꽃바구니를 갈무리해두고 할머니를 챙겼다.
“할머니.”
“…….”
날이 추워서인지 할머니는 평소보다 피로한 듯 반쯤 감긴 눈을 껌벅이고 계셨다.
이런 날은 할머니에게 열이 있을 때가 많았다.
공작 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해열차를 달여 드리려고 했는데…….
레이나는 두 손으로 옷을 들고 할머니 가까이 앉았다.
“할머니. 우리 새 옷 입어요.”
“으응.”
밝은 얼굴로 할머니 앞에 새 옷을 펴 보인다.
“이 옷으로 갈아입을까요? 와, 이 옷 좋다. 너무 예쁘고 포근해요. 할머니도 마음에 드세요?”
“으응…….”
“할머니, 팔!”
“으응……. 할미 혼자 할 수 있어…….”
레이나는 할머니를 따뜻한 외출복으로 갈아입혔다.
부드러운 인기척과 함께 달칵, 쟁반 소리가 난다.
“이거 마시게 해드려. 지금은 괜찮으신데, 이따가 열 오르실 수 있을 거 같아.”
그 바쁜 와중에 어느새 테일러가 잔에 약을 내려왔다.
“네가 가져온 거 썼어.”
“……고마워.”
“혼자 하지 말고 앞으론 나한테 말해. 유난 떠는 거 아니니까.”
레이나는 미안해하며 웃었다.
도움받는 건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점점 의지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먼저 마차로 모셔다드리고 레이나는 서둘러 돌아와 남은 짐을 챙겼다.
레이나가 막 어깨에 메던 가방과 짐을 어느새 돌아온 테일러가 빼앗아 들며 말했다.
“내가 들게. 가서 할머니 모셔.”
“어? 아, 고마워! 그리고 옷장 옆 서랍에…….”
“검은 머리 가발이랑, 모자랑, 스웨터 들어있는 거 챙겼어. 침대 밑에 넣어둔 네 소지품도 마차에 가져다 놨고. 협탁 바구니에 놔둔 과일은 기사분들이 가지고 나가셨어.”
“어, 고, 고마워.”
임시 처소에서 또 다른 임시 처소로 옮길 준비를 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옮길 만한 여관이 있나요?”
“알아보고 있는데, 방을 아직 못 구했습니다. 지금 줄리어스에 빈방이 있는 여관은 많지 않아서요.”
“음……. 경비병들을 좀 신경 써야 하긴 하겠지만, 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있긴 한데요.”
“그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좀 돌아보고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으면 그래야죠.”
막 마차에 타 대화를 듣고 있던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제가 아는 빈집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그쪽은 어떤가요? 외성 남동쪽 지역인데…….”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오가는 곳은 아니긴 해요. 전에 저희가 있던 집처럼 깨끗하고 좋지는 않지만……. 아마 거길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 * *
마차를 타고 일행이 이동하는 동안, 말을 탄 기사들이 먼저 상황을 살펴보러 앞질러 갔다.
기사들을 시켜서 머물기 적합한 곳인지도 살펴보고 먼저 정찰도 하게 하려던 거였지만, 리오넬이 보낸 기사들은 레이나가 알려준 곳을 영 찾지 못했다.
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인데 여기가 맞냐며 줄곧 헤매자, 결국 도착한 레이나가 직접 마차에서 내려 기사들에게 그 집을 안내했다.
“……여기예요.”
루칸이 조금 놀란 눈으로 숲속에 파묻히다시피 숨겨진 산장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좀 을씨년스러웠다.
“……뭐 이런 곳에 집이 있어요? 길도 없는 곳인데.”
레이나가 대답했다.
“10년 전쯤……. 돌아가신 숲지기 아저씨가 쓰시던 사냥용 오두막이에요.”
리오넬이 멍하니 집을 올려다보았다.
“…….”
레이나는 오두막이라 했지만, 오두막이라기엔 큼직한 이 층 짜리 산장이었다.
레이나는 익숙하게 집 뒤로 다가가 벽돌 틈새에 숨겨져 있는 열쇠를 찾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떠나신 후엔 잊힌 곳이라 저 말고 사람이 오는 건 본 적 없어요……. 청소는 해야 머물 만하긴 할 거예요.”
테일러가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레이나가 말한 ‘아저씨’는 테일러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나와 가까운 줄은 몰랐는데…….
레이나가 달각거리면서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며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났다.
레이나는 들어서자마자 문 옆에 놓여 있는 긴 빗자루를 들고 몇 번 위쪽으로 휘저어 구석진 곳에 생긴 거미줄을 걷었다.
바로 몇 걸음을 걸어가 서랍을 열고 성냥을 찾아 램프에 불을 켠다.
익숙한 태도였다.
치익―. 홧…….
작게 불붙는 소리가 들리며 집안이 밝혀졌다.
고급스럽진 않지만 넓은 산장이었다.
기사들이 내부를 둘러보며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괜찮은데?
레이나는 계속 위쪽으로 빗자루를 휘저으며 말했다.
“거미줄은 좀 걷어야 해요.”
오밀조밀하지만 알차게 층마다 두어 개의 방이 있었고 조그만 다락도 지하실도 있었다.
레이나가 빗자루 손잡이로 천정의 거미줄을 슥슥 걷어내자 스산하게 방치된 느낌이 사라지며 사뭇 호젓한 공간처럼 보였다.
……잠시 숨어 있기는 더할 나위 없겠는데?
찾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고.
“레이디 외엔 여길 아는 사람이 없다고요?”
“네.”
이내 주변을 정찰한 기사들이 돌아와 주변 상황을 보고했다.
즉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정리하고 불 피워 두겠습니다. 할머니 모시고 오세요.”
레이나가 웃었다.
“네!”
* * *
레이나와 테일러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두막으로 들어섰을 때는 어둑한 밤이 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청소를 하고 거실이며 방마다 불을 때어 두어 오두막은 꽤나 아늑했다.
타닥, 타닥…….
벽난로에 불이 타고 있었다.
아래층은 테일러와 기사들이 자리 잡았다.
가장 따뜻한 위쪽 방에 할머니를 모셔다 놓고, 레이나는 그 옆의 작은 방에 짐을 풀어놓았다.
할머니는 오랜 이동을 잘 견디셨지만, 피곤하셨는지 침대에 앉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할머니의 이마를 살짝 짚어 열이 없는지 확인하고, 이불을 덮어드렸다.
고생하셨어요, 할머니.
작게 속삭인 뒤, 침대 옆에 앉아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마음의 안정을 채운 레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은 정찰을 위해 밖에 나가 있었다.
테일러가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장작들을 벽난로 옆 장작 함에 내려놓으며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이런 델 알고 있었어?”
레이나가 “별장 같지?”하며 웃었다.
테일러도 마주 웃고는, 짧은 틈을 두고 물었다.
“……네가 말한 그 숲지기, 톰 아저씨야?”
레이나가 답한다.
“응.”
테일러가 둘러보듯 천천히 몇 걸음을 걷다가, 오두막의 나무 기둥을 만져 보며 물었다.
“……여기, 자주 왔어?”
“아니. 그렇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아저씨 기일 가깝다 싶을 때 한 번씩.”
그리고 살짝 웃으며 머쓱하게 덧붙였다.
“빼먹은 날도 있어.”
테일러는 따라 미소 지은 얼굴로 레이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모르는 레이나가 이렇게나 많다.
“그분이랑 친했는지 몰랐어.”
20년을 제일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레이나가 웃었다.
“……아저씬 푸른 피*는 어려워하셨거든.”
맞다.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테일러는 십여 년 전의 기억 속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조용하며 잘 웃지 않던 숲지기 아저씨를 떠올렸다.
“나도 푸른 피는 아닌데.”
“너 작위 있잖아.”
“……그때는 없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
레이나도 안다는 듯이 콧잔등을 만지며 웃었다.
“귀족이나 젠트리나 비슷하지. 로렌슨 가(家)도 저명한 지역 유지잖아.”
톰 아저씨한테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아는데도 레이나로부터 선 긋기를 당한 기분이 든다.
되게 멀게 들리네.
장작을 들고 오며 잔가시에 찔린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린다.
“……그럼 다른 사람하곤 온 적 있어? 푸른 피가 아닌 사람이라거나.”
조그만 질투.
레이나가 웃으며 몸을 굽히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니. 여기는 나만 알아.”
맞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했지.
“너한테만 알려주신 거야?”
“어쩌다 보니. 오두막은 나만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맡기신 거 같아.”
레이나가 그녀 자신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오히려 좀 더 멀어진 기분이다.
가까웠던 줄 알았던 과거조차 사실 내가 아는 것과 달랐다는 걸 확인해서인가.
“아저씨 살아계실 때 너도 친했으면 종종 같이 왔을 텐데.”
레이나가 잠시 우두커니 오두막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생각나는 공간이다 보니 너랑 오게 되진 않더라. 다른 사람들은 더 그렇고.”
“…….”
누구랑 더 친했냐 캐묻는 것도 멋없다.
레이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다시 짐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마저 정리해야겠다. 네 방은 어디야?”
“저쪽.”
“정리하고 들어가자.”
짐을 뒤적이다 테일러의 가방을 자신의 가방으로 착각한 레이나가 그의 가방을 열었다.
“…….”
테일러의 가방에는 최근의 소식지와 신문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 전면에 아서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레이나가 신문을 모으지 못하는 동안에도, 테일러는 계속 신문을 산 듯했다.
“…….”
테일러가 멈칫하고 고개를 들다가 자신의 가방을 연 레이나를 발견했다.
레이나가 어색해하며 물러섰다.
“……미안. 내 가방인 줄 알았네.”
테일러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나도 지금 내 건 줄 알았거든.”
테일러도 슬쩍 몸을 돌리며 제 손을 보여주었다.
테일러는 막 레이나의 가방을 연 상태였다.
레이나가 연 것과 비슷하게 생긴 캔버스 백.
거기엔 레이나의 스크랩북과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브로디가 정리한 레이나의 짐들을 테일러가 몰래 챙겨 가져다준 것이었다.
“…….”
레이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테일러가 그녀의 가방을 닫아 돌려주었다.
“자.”
둘은 어색하게 서로의 가방을 교환했다.
“…….”
잠시 머뭇거리듯 제 가방을 쥐고 있던 테일러가 신문들을 꺼내 그걸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요즘도 모아?”
“…….”
바깥에 있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 아서 경,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리마인드 웨딩?! 】
테일러가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테일러가 레이나의 비밀과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된 후.
레이나는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생각해 봤는데.”
“…….”
“……너한테 나쁜 기억으로 남진 않은 사람인 거지?”
“…….”
레이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테일러는 조금 말을 바꾸었다.
“축복하고 싶은 사람인 거지?”
“…….”
테일러의 부드러운 갈색 눈 위에 벽난로의 따뜻한 빛이 잔잔하게 반사되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럼 나도 원망 안 할게.”
테일러가 손 내밀지 못하는 레이나에게 신문들을 쥐여 주었다.
“…….”
테일러가 미소 지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기다릴게.
다른 사람이 마음에 있어도 괜찮아.
지금은 그냥 널 지키게 해 줘.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에만 나한테 오면 돼.
바람 소리가 들린다.
―――――
*푸른 피: 귀족, 명문 출신, 고귀한 가문 사람을 일컫는 말. 노동하지 않는 계층이 피부가 타지 않아 핏줄이 푸르게 보이는 데서 나온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