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조우 (98/210)


#98. 조우
2022.08.07.


여자는 미안한 듯 웃으며 공작 부인이 내민 손을 사양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자는 쪼그려 앉아 바닥에 흩어진 꽃을 줍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여자의 몸에선 와르르 와르르 빛이 쏟아졌다.


“…….”

공작 부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주춤했다.

눈을 찌푸리고 쏟아지는 빛을 가리자 눈부심이 가시며 금색으로 보였던 여자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흰 꽃은 푸른 꽃이 되어 있었다.


“……?”

아그네스는 눈을 깜박였다.


‘눈이 부셔서 잘못 본 건가?’

멍하니 꽃을 줍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펄 공작 부인은 따라서 몸을 굽히고 꽃을 줍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이 직접 몸을 굽히자 당황한 시녀들이 덩달아 꽃을 주웠다.

여자들 서넛이 동시에 꽃을 줍자 떨어져 흩어졌던 꽃은 순식간에 다시 모여 여자의 바구니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여자가 고마워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후드를 쓰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여자가 떠나려 하자 공작 부인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네?”

공작 부인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야?

줄리어스 저택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아서를 알아요?

그 모든 질문을 삼키고 아그네스는 침착하게 가장 이상하지 않게 들릴 말을 골랐다.


“이름이 뭐예요?”

“네……?”

잡힌 여자는 머뭇거리더니, 꽃의 이름을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바구니를 내려다보고는 대답했다.


“젠티아나요.”

공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아니, 당신 이름이요.”

“……?”

아차. 여자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당황한 듯 검은 머리의 여자가 그녀에게 손목을 잡힌 채 상체를 살짝 뒤로 당겼다.

몸을 떨어뜨리는 그 모습에서 경계심이 읽혔다.


“제 이름은 왜…….”

공작 부인이 손수 꽃을 주울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시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예의를 지키세요.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감히. 이분께선 펄 공…….”

시녀의 말이 잦아들었다.

공작 부인이 순간 차갑고 지엄한 눈빛을 보내며 그녀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럽지 않게 둘러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부러 외성의 한적한 거리를 찾아온 상황이었다.

신분을 밝히지 말라는 뜻을 깨달은 남작 부인이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

펄 공작 부인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흑발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잡아서 미안해요. 우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여기가 초행길인 귀족인데……. 내 이름을 먼저 밝혀야 실례가 안 되겠군요. 나는 바실리사라고 해요.”

펄 공작 부인, 아그네스는 이름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례명을 대었다.

신분을 숨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대는 세컨드 네임이었다.

아그네스는 유명한 이름이었지만 바실리사라는 그녀의 세례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여자는 안심하긴커녕 더 겁에 질린 듯 창백해졌다.

그녀가 귀족이란 말에 당황한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은 속으로 혀를 차며 더욱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부딪친 걸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나 여자는 무서운 것이라도 닿은 사람처럼 팍 공작 부인의 손을 떨쳤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 없는 공작 부인은 엉겁결에 손을 놓쳤다.


“죄, 죄송합니다.”

여자가 뒷걸음쳤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여자는 확 그녀를 뿌리치고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아나 버렸다.


“잠깐만요!”

당황한 공작 부인의 입에서 저 여자를 놓치길 원치 않는다는 신호가 나왔지만, 드레스를 입은 시녀들 가운데 누구도 그 여자를 붙잡지 못했다.

* * *

레이나는 떨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후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바실리사라는 소개를 듣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 이런 외진 거리에서…….’

검은 머리, 자색 눈.

품위 있는 태도에 무표정한 얼굴.


「이분께선 펄 공…….」

 
그분의 시녀였던 듯한 귀부인이 불쾌한 듯 나서서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레이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벽에 기대었다.


‘……무사하지? 내 머리카락.’

레이나는 후드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에 쓴 검은 가발이 멀쩡히 씌워져 있는지 만져 보았다.


‘휴우.’

다행히 가발은 제대로 씌워져 있었다.

레이나는 골목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바실리사.」

 
모를 리가 없잖아.

아서 경의 대모이자 황제의 누이.

그건 북부의 안주인인 아그네스 펄 공작 부인의 세례명이었다.

독실한 신자로, 결혼 전 이름은 ‘아그네스 바실리사 폰 루사익’.

아서의 생물학적 고모님이었다.

30여 년 전, 혼인해 북부로 가신 이후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분인데.

정말 많은 귀족들이 영지에 찾아오고 있다곤 생각했지만…….

그분까지 줄리어스 영지에 오신 거야?

아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라면 전부 외우고 있는 레이나였다.

아서 경의 영웅 서사의 최대 조력자라 할 수 있는 펄 공작 부인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가 외면한 사생아 아서를 거두어 대모가 되어 주고, 로아스 자작가의 양자로 만들어 준 사람.

아서 경이 사교계에서 외면당했을망정, 세상에서 잊히지 않게 해 준 사람.

아서 경에게는 은인인 대모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와 줄리어스 후작, 아서 경과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이름이 들어간 ‘혼인 계약서’에 증인으로 사인한 세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머지 두 사람의 증인은 교황, 그리고 줄리어스 교구의 대주교…….


“…….”

새삼 아서 경의 혼인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제때 납치당하지 못했다면 그분 앞에서 쩔쩔매며 ‘크리스티나입니다.’ 따위를 말하고 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건가?

레이나는 스스로의 팔을 감싸 안았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안 됐으려나?

후작님네도 생각이 있을 테니…….


‘……모르겠다.’

레이나는 어둠 속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복잡한 마음이면서도 십년감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이름은 왜 물었을까?

레이나가 숨은 골목 너머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아가씨들이 들뜬 듯이 재잘거리며 거리를 걸어간다.

손에 신문이나 소식지를 쥔 사람들도 보였다.

거리에서 아서 경이 다시 결혼식을 올릴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

레이나는 골목 속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 *



“줄리어스 쪽 경비병들이 다시 한번 ‘그 집’을 지나갔습니다. 세 번이나 왔는데도 아무것도 찾지 못해서 이제 무관심해진 것 같아요. 얼마 전부터 이미 외성 밖으로 벗어난 거 아니냐는 의견이 득세하기 시작해서 내부 수색이 느슨해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들은 외성의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경비병들의 수사 범위가 조만간 그들이 머무는 집 근처로 향할 것 같다는 예측 때문이었다.

루칸이 말했다.


“슬슬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며칠 정도는 더 여관에서 머물며 상황을 볼까요?”

그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비교적 한산한 줄리어스의 교외였다.

귀족들과 거상들이 미어터지는 내성과는 달랐지만, 줄리어스엔 워낙 방문자가 많은 상황이었기에 한적한 교외에도 낯선 외지인들이 꽤 오가고 있었다.

편하게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레이나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예 영지 바깥으로 옮기는 건 아직 위험할까요?”

“…….”

테일러의 시선이 잠시 레이나에게 머물렀다.

리오넬이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밖으로 이미 빠져나간 거 아니냐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어서요. 오히려 관문과 바깥쪽의 경계가 더 삼엄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후작 일가는 영지 내에선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싶은 모양이라 경비병들 분위기가 거칠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깥은.”

루칸이 바깥으로 턱짓하며 말을 이어받았다.


“해결사 길드의 용병들이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아…….”

루칸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래저래. 지금은 안쪽에 있는 것이 나을 겁니다. 이쪽엔 할머니도 계시고 하니까.”

리오넬도 부드럽게 덧붙였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 여기에 잠시 머물러 계시다가, 아서 경과 후작 일가가 수도로 출발하면 그때 조용히 이동하시는 게 안전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레이나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가 불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루칸이 장담했다.


“후작가 쪽 병사들 움직임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십쇼.”

“…….”

레이나도 알고 있었다.

후작은 아서의 말을 듣고 경비병들을 호령하길 관두었지만, 대신 후작 부인이 경비병들을 시켜 레이나와 할머니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가에는 레이나를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았고, 경비병들의 기강은 느슨했다.

수색은 엉성하고 어설펐고, 기사들은 줄리어스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나 일행은 눈앞에서 젊은 금발 여자가 검문을 당하는 걸 본 적도 있었는데, 잠시 검문하겠다던 경비병들은 그저 그녀의 이름과 집, 일하는 곳을 확인하더니 그냥 보냈다.

심지어 옷을 좀 고급스럽게 입었다 싶으면 금발 여자여도 붙잡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문제 될 수 있는 수색은 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비교적 잘 차려입은 데다 검은 머리로 변장한 레이나가 그들의 관심을 끄는 일은 없었다.


“…….”

하지만 경비병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거리에서 공작 부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레이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음……. 저기, 리오넬 경, 루칸 경. 확실하지는 않은데요…….”

“네.”

“제가 오늘 거리에서 펄 공작 부인을 마주친 것 같아서요…….”

“……?”

기사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네?”

레이나가 어색하게 머리를 만졌다.


“그분은 제가 누군지도 모르실 테니 별문제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리오넬과 루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가 애매하게 웃었다.


“……이 근처에 계신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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