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반짝이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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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반짝이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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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반짝이는 빛
2022.08.04.
펄 공작 부인은 렘브란트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황제의 누이와 황후의 조카.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황실 식구들 사이의 인사였다.
“렘브란트 경도 오랜만이군요. 잘 지냈나요?”
“네,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께서도 강녕하셨습니까?”
아서와 나눈 것보다 가벼운 악수와 포옹이 오갔다.
“그대는 더 멋져졌군요. 클라인 공께서 그대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겠어요.”
일상적인 인사말로 들렸지만, 렘브란트는 펄 공작 부인의 말에서 조금 더 깊은 뉘앙스를 읽었다.
<클라인 일가를 정식으로 이어받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당신의 결정은 자랑스럽고 책임감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가 굳이 깊은 대화를 나눌 만한 자리는 아니니까.
렘브란트는 초조해하는 후작 내외를 뒤에 두고 크리스티나를 모른 척해 주며 안부 인사처럼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공작 부인께서야말로 점점 더 아름다워지십니다. 세월이 감히 훼절하고 싶지 않아 공작 부인을 비켜 가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칭찬을 기분 좋게 들어 넘기며 공작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사교계 최고의 미인을 처음 만난 자리인데 내가 민망하게 별 이야길 다 듣는군요. 그래도 고마워요. 어른에 대한 예우라 생각할게요.”
공작 부인이 아서와 크리스티나에게 덕담 몇 마디를 더 건네어 주고, 이내 작별 인사를 했다.
“수도에 갈 때 같이 가게 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 하녀들 잘 부탁하고. 나중에 더 자세한 이야기 나눠요. 연락할게요.”
“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렘브란트가 크리스티나의 일을 모른 척해 주었다는 데에 안도하면서도 후작이 얼떨떨하게 공작 부인을 잡았다.
황제의 누이가 방문했는데 잡지도 않고 이렇게 보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찔리는 것이 있는 걸로 생각될까 봐서였다.
“공작 부인께서는 여기서 머물지 않으십니까? 저희 저택에 머무시면서 편히 말씀 나누지 않으시구요.”
공작 부인이 절제된 미소를 지었다.
“황실 사람들이 폐를 끼치고 있어 도와줄 사람들을 데려온 것인데, 저까지 그럴 수는 없지요. 기별도 하지 않고 왔는데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편히 머물겠습니다.”
“폐라니요, 별말씀을요. 모실 기회가 있다면 저희에게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부디…….”
“후작께서 돌보신 영지에 머무는 것이니 후작께서 마련하신 숙소에 머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편히 지내겠습니다.”
하지만 미소 지어 주는 공작 부인은 너무 아름다웠고, 후작은 예의상 한두 번만 잡으려 생각했던 처음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줄리어스의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아, 그러시다면 안내할 만한 사람을 몇 명…….”
“괜찮습니다.”
“앗, 사실 지금 영지에 사람이 많아서 숙소를 구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곤란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택으로…….”
짜증이 난 후작 부인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러 후작은 말을 멈췄다.
공작 부인이 웃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뒤늦게 후작은 정신을 차렸다.
황제의 누이인 ‘아그네스 펄 공작 부인’이 이 제국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할 리는 없다.
이미 숙소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녀에게 머물 곳을 내주며 교류하고 싶어 할 테니…….
공작 부인은 그저 싱긋 웃었다.
펄 공작 부인은 후작 내외와 렘브란트에게 하녀들을 소개하고 인계했다.
줄리어스의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나와 후작 부인과 함께 하녀들을 인계받았고, 서로 잘 부탁드린다는 말이 오갔다.
“곧 다시 뵙지요.”
“네, 공작 부인! 살펴 가십시오!”
인사를 남긴 공작 부인이 떠나가고, 하녀장은 줄리어스 저택 하녀들이 열심히 준비한 2인실 하녀 숙소로 황궁 하녀들을 안내했다.
줄리어스의 하녀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묘한 박탈감으로 시무룩한 분위기가 되었다.
하녀들은 렘브란트와 아서를 주로 보조하며 후작 저택의 바쁜 일손을 덜어주는 것을 주된 임무로 배정받았다.
* * *
펄 공작 부인의 마차 안.
시녀들이 줄리어스 후작가와 아서, 크리스티나에 대한 덕담을 해 주었다.
“무척 선남선녀네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공작 부인. 아서 경의 대모로서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아서 경의 친모께서도 공작 부인께 무척 고마워하실 거예요.”
시녀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속닥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고마워하실걸요? 이런 아들을 어디서 구해요…….”
시녀들이 서로 장난스럽게 키득키득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아그네스는 웃으며 적당히 대답을 해 주었지만, 내심으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하다…….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인가?
왜…… 아서의 아내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둘 사이가 소문과 달리 소원한가?
그렇지만 부부인데.
이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리는 없는데…….
오러에 관해 분명한 것은 없었다.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 공개할 수가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능력에 대해 눈치챈 사람이 생길 때마다 몇 번이고 가문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수차례나 멸문과 암살의 위기를 겪으며 기사 가문이었던 루사익은 오러를 철저하게 숨기게 되었다.
선황제로 추대되고, 마침내 황제 일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오러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혼자만의 가설과 추측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다.
오러를 가진 사람의 오러는 그가 가까이 두고 오래 사용한 물건이나, 그가 각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특별한 형태로 옮겨진다는 것.
아버지가 아끼는 만년필.
아버지와 오래 함께한 검.
그리고 아버지의 하나뿐인 사랑이었던 어머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것들이 반짝이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손을 대는 몇몇 물건들도.
어릴 땐 그게 뭔지 몰랐다.
그게 그녀에게만 보이는 풍경이라는 것도.
아버지만이 그런 빛을 내는 것도 몰랐고, 어머니만이 아버지에게 그런 빛을 돌려준다는 것도 몰랐다.
어린 소녀였던 아그네스는 황제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에서 반짝이는 오러를 보며 세상은 아주 반짝거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란 원래 반짝이는 거라고 오해했던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이를 먹은 후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그네스는 눈을 감았다.
홀로 오롯이 눈 시린 오로라로 가득한 사람 같았던 아버지.
그리고 그 곁에 영롱한 오색 빛으로 쏟아지는 별빛 같던 어머니가 차례로 떠올랐다.
뭐라 형용할 수 없던 빛의 향연.
두 분이 같이 있을 때 어린 소녀였던 아그네스는 마냥 신이 났었다.
그저 눈앞에 어우러진 빛의 향연이 그저, 신기하고 예뻐서…….
“…….”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세상이 빛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만에 아버지가 뒤따르듯 돌아가시며 아그네스의 세상은 빛을 잃었다.
그 후에야 아그네스는 자신이 보아왔던 그 빛이 아버지의 오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때 멋모르고 했던 말들,
엄마 아빠가 같이 있으면 빛이 나고 반짝인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애정으로 해석해 주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오러를 본다는 것은 그녀 자신만의 비밀로 남았다.
“…….”
아그네스는 아서를 처음 보았던 날을 생각했다.
궁을 찾아온 무희나 배우.
제 주변의 하녀와 시녀.
심지어 때때로 충신의 아내에게까지 남겨져 있는 어딘지 불쾌한 오러의 흔적.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그네스가 눈치챘을 무렵이었다.
비록 황제가 사람에게 남긴 오러는 흐릿하기 짝이 없었고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그것은 아그네스의 마음속에 오라비에 대한 경멸을 남겼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여기저기 묻혀놓은 흔적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빛이 아닌,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연기 같은 것.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오라비의 오러를 혐오했음에도 죄 없는 아이의 오러는 깨끗하고 아릿했다.
오라비에게 분노를 퍼붓고 비난하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지켰다.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그네스는 오라비에 대한 환멸과 아서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모종의 그리움 속에 대모로서 그 아이를 품었다.
그리고 아서를 보며 아그네스는 언젠가, 어린 시절의 그 그리운 빛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던 듯했다.
그녀 자신도 몰랐던 희망이었다.
“…….”
펄 공작 부인은 아서와 크리스티나에 대해 그동안 접했던 떠들썩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크리스티나는 5년 동안 다른 사람들과 일절 사교적 교류를 하지 않으며 묵묵히 승전 기원 미사를 다녔다.
재회했을 때 정략결혼인 두 사람이 꽤나 다정하게 보였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고,
둘 사이가 열정적이라는 소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소문이야 그저 가십이니.
과장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함께 유가족 위문을 다니고, 크리스티나는 아서의 뒤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아서는 부실 보급 의혹에서 그녀의 아버지의 책임을 해명해 주었다.
크리스티나는 보상 범위에서 배제된 아서의 기사들에게 따로 돈을 보내는 등 마음을 쓰고 있다…….
그것들은 가십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래서 좀 속단했었나 보다.
아서가 정 붙일 곳을 찾았을 거라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면서도.
“…….”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레이엄의 형편없는 오러도 타인에게 잠시라도 흔적을 남기는데…….
하다못해 아끼는 만년필에도 남는 것이 오러의 흔적인 것을.
저렇게 강한 오러를 가지고 있으면서.
저를 그 정도로 뒷받침해 주는 아내에게 그 정도 마음조차 내주지 않았다고?
“…….”
펄 공작 부인은 스스로의 얄팍한 생각에 자조하며 실망감을 삼켰다.
……하긴.
조카 부부에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은 거겠지.
생각보다 아쉬운 기분이 들어 공작 부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실망할 정도는 아닌 줄 알았는데.
내심 기대했었나 보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내가 이런 일에 실망하게 될 줄을 몰랐던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그것을 다시 보고 싶었구나.
그의 오라비, 황제에게선 다시 볼 수 없었던 그것을.
* * *
공작 부인은 시녀들과 함께 거리를 걸었다.
시녀들이 아서를 칭찬하며 재잘거렸다.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위해 다시 정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릴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공작 부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결혼식을 다시 올린다……?
아서에 대한 몇 가지 기사가 떠올랐다.
설마, 그 애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아니. 그럴 리가…….
분명 사제가 확인했고, 피할 수 없었을 텐데.
그 혼인 계약서는 내가, 황실이 아서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서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 계약엔 너무 많은 게 걸려 있었다.
초야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혼인은 무효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어머! 부인!”
그녀의 시녀가 소리쳤다.
쿵!
골목에서 튀어나와 그녀와 부딪친 금발의 여자가 바닥에 넘어졌다.
여자가 손에 든 바구니가 엎어지며 바닥에 흰 꽃들이 흩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넘어진 여자가 주저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황급히 사과했다.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넘어진 쪽은 자기면서……?
공작 부인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앞을 살피지 못했다.
“아, 아뇨. 내가 미안…….”
아그네스는 다가오려는 시녀를 물리치고 손을 내밀어 직접 그녀를 일으키려다, 말을 멈추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여자의 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