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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대모(代母) (96/210)


#96. 대모(代母)
2022.07.31.


후작 부인이 악을 쓰며 손님 맞을 채비를 하는 동안, 후작은 렘브란트를 찾아갔다.

펄 공작 부인이 영지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렘브란트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후작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수색에는 차도가 있으셨습니까?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행방에 대해서 단서를 좀 찾으셨나요?”

“…….”

후작의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 렘브란트가 묵묵한 눈빛을 보내었다.


“……큰일이군요. 무사하셔야 할 텐데요.”

“…….”

렘브란트가 대답하지 못하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심려가 많으시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이디의 안위가 아니겠습니까? 소동이 일어나더라도 이제는 레이디를 무사히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요.”

“…….”

렘브란트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걱정을 끼치게 되더라도 공작 부인께 먼저 말씀을 드리고 공개 수사로 전환을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럼 저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하고, 어쩌면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렘브란트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테이블 위에 놓인 캔버스 한 장이 후작의 눈에 들어왔다.

렘브란트는 완성된 그림을 후작 쪽으로 슥 밀었다.

크리스티나의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였다.


“…….”

후작은 굳은 얼굴로 렘브란트가 내민 그림을 바라보았다.


“찾아야지요, 레이디를.”

렘브란트가 완성한 그림 속에서 레이나가 입은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애를 크리스티나 대신 내보냈던 개선식 날의 드레스였다.


“…….”

신방의 발코니에서 우연히 레이나를 봤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렘브란트는…….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면 렘브란트는 비밀을 지켜주리라는 아서의 말이 떠올랐다.

이미 그 애의 존재를 완벽하게 비밀로 만들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찾아온 이상, 이제는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렘브란트 경의 선에서 어떻게든 수습해 볼 수밖에 없었다.


“……렘브란트 경, 사실 제가 말씀드리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네?”

후작은 눈을 꽉 감았다.


“……사실 렘브란트 경께서 보신 아이는, ……크리스티나가 아닌 다른 아이입니다.”

고개 숙인 후작을 향한 렘브란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아이라니요?”

후작이 난처한 얼굴로 뻘뻘 땀을 흘리며 말했다.


“렘브란트 경. 제가 곧, 제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일단 공작 부인께 인사드리는 동안 잠시만 크리스티나에 대해선 모르는 척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제후도, 아서와의 관계도, 혼인 계약도.

그 무엇도 잃을 수 없었다.

후작이 떠난 직후.

프랜시스가 문 뒤에서 나오며 문간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렘브란트 경. 제가 경이 내주신 수수께끼를 푼 것 같습니다.”

“…….”

렘브란트가 프랜시스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프랜시스가 손에 든 한 묶음의 서류 뭉치를 까닥여 보였다.

【 레이나 아스타린 사건 보고서 】

이미 후작이 오기 전부터 완성하여 가져오고 있던 듯했다.

그리고 방금의 대화를 듣고 그는 자신의 결론에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알아냈군요.”

프랜시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좀 자존심 상하네요. ‘당신 능력에 비해 늦었다’고 해 주실 줄 알았는데.”

렘브란트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능력을 보여 줄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 그 아가씨를 구해볼까요?”

프랜시스가 팔짱을 낀 채 입매만 웃는 듯이 늘이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연유로…… 나와 보시겠어요? 브로디 양.”

프랜시스의 부름에 문 뒤에 있던 브로디가 슬그머니 어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프랜시스가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짐작하시다시피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

“그리고…… 아마 그건 당신이 케이에게 신변의 보호를 부탁해 저희 쪽으로 보내진 이유하고도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맞나요?”

브로디는 프랜시스의 손에 들린 ‘레이나 아스타린 사건’ 보고서로 눈길을 향했다.


“저는 프랜시스 포드. 케이의 친형입니다. 알고 계시죠? 한동안 당신의 안전을 책임져 달라고 요청받았습니다.”

프랜시스가 미소 지었다.


“도와드리고 싶은데,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 * *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펄 공작 부인. 이곳의 영주, 안토니오 줄리어스입니다.”

“안주인 마틸다 줄리어스입니다.”

허둥지둥하는 후작 내외의 인사를 받은 검은 머리의 귀부인이 미안한 듯이 웃으며 몸을 뒤로 물리곤 더 젊어 보이는 뒤쪽의 귀부인을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제가 아니라 이쪽이십니다.”

“아……?!”

그녀가 공손히 손짓하여 가리킨 곳에는 흑발, 자색 눈의 아름다운 귀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헉.

뒤늦게 공작 부인의 얼굴을 알아본 그들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고, 공작 부인. 실례했습니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공작 부인의 일행 대부분이 미소 지었다.

몹시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공작 부인과 그녀를 모시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50대로 보이지 않는 그녀를 공작 부인이라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시녀를 공작 부인이라 착각하는 것.

펄 공작 부인이 제국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오래다 보니, 그녀의 얼굴을 몰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줄리어스 후작, 후작 부인.”

“죄송합니다. 너무 젊어 보이셔서 실수를…….”

“괜찮습니다. 어려워 마세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펄 공작 부인은 그리 화려하게 입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의 개인적 취향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권위를 의심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공작 부인은 복장이나 의례 따위에서는 소탈한 면이 있었다.

그녀 자신이 권위이기에.


“내 대자(代子)와 인사 나누고 싶은데요.”

“아, 예! 물론입니다.”

후작 내외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까지 시선을 두고 웃어 주는 예의를 지키자마자, 그녀의 시선이 곧바로 아서를 찾아냈다.


“아서.”

펄 공작 부인이 그를 향해 웃으며 팔을 벌렸다.


“대모(代母)*님.”

아서가 웃으며 다가가 가볍게 그녀와 포옹했다.

공작 부인이 아서를 마주 안아 주었다.


“드디어 너의 권리와 명예를 되찾게 되었구나. 네 어미도 하늘에서 기뻐할 게다.”

“…….”

아서가 이내 지그시 그녀를 안으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모님께서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그게 어떻게 내 덕이겠니. 다 네가 한 거고, 그 다음으론 로아스 자작 내외가 보살펴 준 덕분이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훈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펄 공작 부인이 아서를 로아스에 밀어 넣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서를 직접 키우고 돌본 것은 로아스 자작가였다.

대모로서 공작 부인의 지원은 정신적이기보단 물질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때때로 이렇게 아서의 뒤에 자신의 권위가 있음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그를 보호했다.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아서는 싱긋 웃었다.


“자작님과 자작 부인께서도 건강하시죠?”

공작 부인이 아서의 팔을 잡고 몸을 떼며 눈을 흘겼다.


“무정하긴. 네가 직접 연락해 보렴. 네 양부모잖니.”

아서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아서는 공식적으로 자작가의 양자였지만, 양부모가 되어 준 두 사람을 부모라 불러 본 적은 없었다.

너의 아버지는 자작이 아니라 황제라는 공작 부인과 자작가의 엄한 가르침 때문이었다.

어린 아서에겐 가혹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펄 공작 부인은 황제의 아들인 아서가 황제의 외면에 굴복해 스스로를 숨기고 살아가며 자작가의 일원으로 만족하길 원치 않았다.

공작 부인은 아서의 대모가 되어 주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땅인 먼 북부에서 살고 있고, 아서는 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을 내세워 로아스 자작가에 그를 맡겼다.

로아스의 사람들은 황제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황제의 누이인 펄 공작 부인을 대모로 둔 아서를 무시하지도 못하고 대놓고 존중하지도 못한 채 난감해하면서 어려워했고,

아서는 아서대로 자신을 불편해하는 로아스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묵묵히 거리를 두고 지냈다.

아서는 외롭게 자랐지만, 덕분에 그녀가 바랐던 대로 황제의 아들로 인정받고 자신의 자리를 갖기를 원하게 되었다.

펄 공작 부인이나 로아스 자작가를 의지하지 않은 채.

공작 부인은 장성한 아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황제는 아서를 사생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황제의 눈치를 본 귀족들이 거기에 침묵으로 동조했지만, 공작 부인만은 아서가 황제의 아들일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펄 공작 부인이 아서의 어머니와의 친분과 동정심으로 아서의 대모가 되어 주었다고 알려졌고 공작 부인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펄 공작 부인은 아서의 친모와 깊은 교류가 없었다.

그녀가 믿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눈이었다.

그녀는 오러를 발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오러를 알아보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서가 성장해 자신의 핏줄을 증명하며 공작 부인의 믿음은 보답받았다.


“큰 영광을 거머쥐고 돌아온 걸 축하한다. 곧 공작이 되겠구나. 늦었지만 결혼도 축하하고.”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네 아내를 나에게 소개해 주겠니?”

애써 미소 짓고 있던 후작 내외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아서는 후작 내외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몸을 뒤로 물렸다.

또각.

뒤쪽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화려한 금발의 미인.

사교계 최고의 보석이자 세기의 신부로 알려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앞으로 나서서 황제의 누이, 펄 공작 부인에게 절제된 예를 올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펄 공작 부인.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입니다.”

 

 
공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당신이…….”

미소 지으며 말하던 펄 공작 부인이 멈칫했다.

그리고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공작 부인이 아서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애매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묻는다.


“당신이…… 아서의 부인?”

일상적인 소개와 인사에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러나 이내 공작 부인은 미소를 되찾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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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代母): 여성 후견인. 종교적인 전통이 있는 후견인 제도로 아이가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보호해 주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양부모와는 다르며, 여럿을 두기도 한다. 주로 친척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이 맡는다. 피후견인이 된 아이는 대자(代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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