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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93/210)


#93.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2022.07.21.


줄리어스 후작과 아서는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는 사병 이야기였다.

저택 경비병들에게 ‘그 애’를 찾아내라며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작은 아서를 만나자마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네! 나 믿지?”

아서는 가만히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목소리의 크기가 결백을 입증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나를 믿게! 내가 우리 집안 사병들을 죄다 동원해 그 애를 찾아내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기가 막힐 따름이야!”

아서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의 기사들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 그들은 불러들이십시오.”

후작의 눈이 흔들렸다.

본전 생각이 나며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네, 내 말을 믿지 않는 게로군! 내가 그 애를 빼돌렸거나 해코지했다 생각하는 겐가? 내 병사들이 하는 수색은 믿을 수 없다는 그런……!”

“아뇨.”

아서가 단정한 얼굴로 후작의 말을 멈췄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저 실전 경험이 없는 각하의 병사들이 제 병사들보다 나으리라 생각되지 않아서요. 공연한 수고가 될 것 같으니 수색은 제 기사들 쪽에 맡겨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병사들의 수준을 대놓고 비교당한 것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아서와 전쟁을 다녀온 이들이 돈으로 고용한 사병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일 거라는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런 이유로 물러나는 거라면.


“……크흠. 그렇군. 알았네. 그럼 그건 자네에게 맡기겠네. 도와줄 인력이 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아서가 싱긋 웃었다.

이로써 저택의 안과 밖에서 모두 후작의 사병들은 아서의 기사들보다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보다 중대하게 위기감을 느끼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것을 알아챌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바로 두 번째 이야기였다.

후작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자네, 렘브란트 경을 만났지?”

“아, 네.”

후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별말 없었나?”

아서가 싱긋 웃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뻔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도 의논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렘브란트 경께서 ‘제 아내’가 납치된 걸 아시더군요.”

“…….”

“조용히 도와주겠다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목격 증언도 상세해 도움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아서가 엷게 웃으며 찡그렸다.


“‘아내’의 그림을 그려 주신 걸 보고는 좀 놀랐습니다. 카일 황태자의 외사촌이고,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실 분이라는 인상이 강해 솔직히 황실의 환대를 상징하는 분으로 생각했지 화가로서의 실력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히 화가는 화가더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후작의 얼굴에 딱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입을 막을 수도 없는 고위 귀족이 목격자라니.

후작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렘브란트 경께서 잘못 보신 거라고 우기고 싶을 지경이야! 그놈의 그림만 아니었으면……!”

아서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어쩌다 얼굴을 보인 겁니까?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다른 얼굴로 잘못 알고 계신다면 좀 곤란하게 된 것 아닙니까?”

후작이 난처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과거의 잘못에 벌을 받는 중인 모양일세.”

입은 살았군.

아서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서가 웃음을 보이자 후작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가 이제 같은 편에서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이 초조한 듯이 스스로 손을 맞잡아 문질렀다.

그나마 이제 아서를 이쪽 편으로 만들었으니 이렇게 중요한 일이 터졌을 때 터놓고 의논을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같이 대책을 강구하거나, 말을 맞춰 주겠지.

아서가 레이나라는 그 하녀 애가 드레스를 입고 신방에 있었던 이유를 렘브란트에게 잘 둘러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아서가 그 애를 잠시 정부 삼았다거나…….

후작은 내심 그렇게 바라고 아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

아서가 후작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니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뒷수습이라도 할 수밖에요.”

“뒷수습이라면……. 어떻게?”

후작이 약간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선선히 말했다.


“렘브란트 경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비밀을 지켜달라 협조를 구하는 방법뿐이지 않겠습니까? 막말로 렘브란트 경을 위험한 방식으로 입막음할 수도 없잖습니까?”

“무, 물론 그럴 수야 없지만…….”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렘브란트 경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의로운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면 비밀을 지켜주실 거라 생각됩니다.”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정직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뭐,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실 모독이니 처음에야 분노를 살 거고 당황스러워 하겠지만, 불쌍하게 휘말린 하녀와 레이디의 목숨을 구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한다면, 렘브란트 경은 화를 내고 경멸하긴 하겠지만 비밀은 지켜 주실 겁니다.”

후작은 입을 떡 벌렸다.


“아, 하, 하지만 하녀를 대신 결혼시켰다는 건 솔직히 말하기엔 너무 외람되지 않은가. 상대는 황실인데…….”

아서가 웃으며 툭 던졌다.


“그걸 오 년 전에 생각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갑작스러운 직설에 후작의 안색이 당혹스러워졌다.

이놈, 화나지 않은 척하더니 역시 그 여자를 잃어서 화가 난 건가?


“아, 이 사람. 미안하네, 내 미안해! 내가 이 빚은 평생 갚겠다지 않나!”

후작은 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지금 밝히기엔 이게 너무 큰 죄가 될 소지가 있지 않은가. 지금 줄리어스가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말이야. 응?”

아서가 묵묵히 팔짱을 꼈다.


“조, 조금이라도 어떻게, 큰 죄가 되지 않도록, 덜 외람되어 보이도록 잘 둘러댈 방법이 없겠나……?”

“…….”

아서가 물끄러미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이 안달을 내었다.


“아, 어떻게 사람이 거짓말 한번 하지 않고 솔직하게만 살겠나!”

아서가 싱긋 웃었다.


“그건 그렇죠.”

후작은 아서에게 힘껏 마음의 소리를 보냈다.


‘내가 그 애를 정부로 들여도 좋다고 해 주었잖아.’

‘응? 잘 좀 생각해 봐……!’

“그럼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는군요.”

“그, 그게 뭔가?”

아서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그 여자, 후작가의 사생아라 변명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하녀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말 나오는 모양이던데요.”

“!!”

아서가 빙긋 웃었다.


“결국 후작 각하의 딸이라면 그렇게 큰 계약 위반이나 기만도 아니게 되지 않겠습니까? 눈살이야 좀 찌푸리시겠지만, 렘브란트 경도 상대적으로 쉽게 납득하실 것 같고.”

후작이 입을 떡 벌렸다.

내…… 사생아라 주장하라고?

그럼 딱히 사기 결혼도 아니게 된다……?


“아, 아니 자네는……. 내가 그래도 명색이 선제후인데, 선제후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지 않나. 그런데 어찌 그런 부도덕한 일이 있었노라는 거짓말을 하라고…….”

 

 


“아, 부도덕이요?”

아서의 미소 띤 표정이 싸늘해졌다.


“후작 각하께선 제가 누구의 사생아인지 가끔 잊으시나 봅니다.”

후작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 * *

해당 아이디어의 창안자, 브로디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레이나는 무사할까?

보고하러 온 하녀 애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레이나가 납치된 걸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레이나가 납치된 걸 아는 건 나뿐이다.

후작 부인은 날 치우려고 할까?

브로디는 케이 경을 찾아가 레이나의 일에 자신도 얽히게 된 것 같다며 더듬더듬 신변의 보호를 청했다.

그러나 케이 경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시죠? 당신은 후작 부인의 사람이잖습니까.”

브로디는 당황했다.


“제, 제가요? 물론 제가 후작 가문에서 급여를 받긴 하지만…….”

“레이디가 납치된 후에는 제가 아니라 후작 부인께 가셨고요. 그런데 제가 당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브로디는 멍하니 케이 경을 보다가 서러움에 울먹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그래요. 저도…… 저도 마님을 의심하고 있다구요. 저는 케이 경을 만나고 레이나가 외출을 하려다가 납치됐다는 말도 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마님이 무서워서요. 그런데도 제가 후작 부인의 사람이겠어요?”

브로디가 훌쩍거렸다.

흠…….

케이는 브로디가 있었던 일을 후작 부인에게 전부 털어놨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브로디에게 보고를 받은 후작 부인이 그걸로 저희들을 의심하려 들면, 그걸로 싸움을 크게 키우며 후작과 후작 부인을 갈라놓는 판을 짤 생각이었다.

근데 보고를 안 했군.

원하는 건 이미 다 얻었으니, 이쪽에선 크게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브로디가 거의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레이나가 외출하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도 안 했어요. 레이나한테 짐을 갖다 주려고 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님에게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

“저는 케이 경한테 불리한 얘긴 하나도 안 했는데. 케이 경은 안 믿어주고. 마님한텐 이미 뻥을 쳤으니 저는 이제 들키면 큰일 났는데 케이 경은 후작 부인 사람이라고 나는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마님은 나를 쓱싹할 것 같고! 으헝!!”

“…….”

브로디는 통곡했다.


“내가 죽으면 케이 경이 책임질 거냐고요! 으허헝!! 여기서 죽으면 원혼이 돼서 케이 경을 따라다닐 거예요! 으허어엉!!”

케이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십시오.”

“……상황은 알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리자면, 후작가가 당신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줄리어스는 선제후고, 지금 여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으니까요. 저택 앞엔 기자들이 깔려 있고 이 안엔 렘브란트 경이 있어요. 이런 상황에 납치 사건만으로도 부담인데, 갑자기 수상한 살인사건까지 날 순 없습니다.”

브로디가 눈물 맺힌 눈을 껌벅껌벅하며 케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신 약점을 잡아서 강제하거나 입단속 시키려고 할 순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 가족이 있습니까? 아니면 후작가가 당신을 협박할 수 있는, 약점이랍시고 쥘 만한 것들. 가령 당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브로디는 새파랗게 질려 자신의 약점이 될만한 것을 죄다 털어놓았다.

그렇게 브로디의 약점을 간단히 손에 넣은 후, 케이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렘브란트 경에게 가십시오. 그분 곁에 있다면 후작가의 마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겁니다.”

“!”

브로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브로디는 황급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변의 안전이 필요한데 믿기는 애매하고, 후작가의 손에서는 보호해야 할 것 같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 * *

그리고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아서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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