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첫 번째 행보
(92/210)
92. 첫 번째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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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첫 번째 행보
2022.07.17.
“아……. 그러시구나.”
크리스티나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아주 잘 찾아오셨네요.”
그리고 그녀는 구두를 또각거리며 걸어가 응접실의 의자에 앉았다.
“앉으세요.”
그쯤 되자 후계자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분위기에 압도되었어도…….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고 태연하게 집주인의 자리에 먼저 앉으며 자리를 권한다고?
뭐지?
그러나 그녀에게 흐르는 싸늘하면서도 친절한 분위기는 왠지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정당한 의문을 품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계자는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 그런데 레이디께서는 누구신지…….”
“아, 저요.”
그녀가 무심히 웃으며 답했다.
“전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주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이 저택의 그 누구보다도요.”
의미심장하게 들리긴 했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다.
“…….”
후계자가 입을 열어 그녀에게 제대로 이름을 밝히라고 말하려던 찰나,
크리스티나는 눈을 굴리는 상대를 가늠하듯 가볍게 훑어보더니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앉으세요. 마땅히 받으셔야 할 가문 차원의 감사 표현에 충분한 발언권도 있는 사람이니까.”
“……네?”
“귀하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루모스 상단’이시니까요.”
“!”
계략까지 꾸며가며 인연을 만들려 했던 속내를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순간 당황한 후계자는 변명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닙니다! 물론 루모스 상단 사람으로서 줄리어스와의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기보다 저는, 제가 목격한 이 당황스러운 사태에 순수하게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방문한 것입니다.”
당황해서 순수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크리스티나는 태연히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네, 물론 그러시겠죠. 기꺼이 도움을 주시겠다니 저희 줄리어스로서는 감사한 일이네요. 어디, 얼마나 소중히 생각해 주시는지는 두고 보면 알 테고…….”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한데 당신은 어떻게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알고 있었죠?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함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데.”
직설적인 말들에 얼어 있던 루모스 상단의 후계자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의심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개선식에서…….”
“개선식에선 어두워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요.”
“……낮에 잠깐 열렸다가 중단된 개선식에서…….”
“낮엔 루모스 상단이 줄리어스에 있지 않았고.”
“…….”
크리스티나가 지루하다는 듯이 자신의 잘 가다듬어진 손톱 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몇 번이나 더 물어야 할까요?”
“…….”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내몰린 후계자는 결국 일부의 진실을 말했다.
“실은 우연히…… 아서 경과 함께 계시는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서 경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명하듯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칭찬하는 말을 덧붙였다.
“아서 경과 워낙 잘 어울리셨던 데다가 과연 뭇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무척 미인이셨던지라 기억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그녀가 ‘오호라’ 하고 냉소하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들었다.
상단 후계자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나쁜 의도로 거짓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두 분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외출하셨던 듯해 혹여 불편해하실까 하여…….”
똑똑.
후계자의 말이 중단되었다.
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분부하신 일에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후계자의 눈이 움찔했다.
‘아가씨라고?’
크리스티나는 무심한 눈짓으로 후계자를 한 번 흘깃 보고 말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쩔쩔매는 태도로 나이 든 집사가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살짝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외람되지만 주인어른이나 마님의 허락 없이 이렇게 방문객을 만나시는 건…….”
“됐어. 보고할 사안이라는 건?”
그리고 집사는 손을 들어 입가에 대며 들리지 않는 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뭔가 속닥속닥 보고하기 시작했다.
“…….”
문이 열린 김에 함께 들어온 다른 하녀가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차를 준비했다.
“…….”
줄리어스 저택의 아가씨…….
그녀가 입은 드레스. 금발…….
압도적일 정도로 화려한 미녀.
잠깐만.
후계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쩔쩔매는 사용인들.
집사가 방금 한 말.
태연하게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태도.
후계자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그 여자는?
아서 경 옆에 있을 수 있는 여자라면 레이디 크리스티나 외엔…….
‘허어억…….’
설마…….
설마?
아서 경에게…… 정부가?
집사가 보고를 마치고 크리스티나에게 다시 몇 마디 명령을 듣고 나간 뒤.
후계자는 거의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물었다.
“레이디.”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후계자에게 돌아왔다.
후계자가 더듬거렸다.
“혹시 제가 큰 착각을…… 큰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지……. 혹시……. 레이디의 성함이…….”
더디 나오는 뻔한 말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수려한 눈매가 찌푸려졌다.
후계자는 질끈 눈을 감으며 물었다.
“혹 당신께서 레이디 크리스티나이십니까?”
크리스티나는 짧고 냉하게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네. 제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입니다.”
허억.
루모스의 후계자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미친. 이런 미친……!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실수를 돌이켰다.
자신이 지껄인 말들이 얼음 깨는 해머처럼 머리를 때렸다.
이 재앙의 주둥아리가 레이디 크리스티나 앞에서 뭐라고 지껄인 거야?!
잠깐, 지금 벌어진 일은 그럼……!
“서, 설마. 아서 경에게 정부가……. 아이고,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대체 언제부터…….”
고위 귀족이 정부를 두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입장과 도리라는 게 있었다.
신혼인 데다가 데릴사위인 아서는 사람들의 이목이 이 정도로 집중된 상황에 정부를 들여도 괜찮은 입장이 아니었다.
세기의 기사가, 이 제국 최대 재벌가의 데릴사위가,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신부와 재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부를.
더욱이 수도에서 열릴 데뷔탕트를 코앞에 두고,
아내를 개망신 주려는 게 아닌 바에야!
크리스티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그런 질문에까지 대답해 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후계자는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티나는 시가렛 홀더에 담배를 끼우고 불을 붙였다.
“…….”
후우.
담배 연기를 한번 뿜어낸 그녀가 후계자를 쳐다보았다.
“세상 모두가 다 알도록 자랑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라는 건 짐작하실 것 같네요. 입조심은 말씀드릴 필요 없겠죠?”
후계자는 입을 틀어막고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짧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크리스티나는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제 하녀로 있던 아이예요. 나름대로 아끼던 아이인데…….”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피식 웃었다.
씁쓸하게 보이는 냉한 미소였다.
크리스티나는 담뱃재를 떨며 말을 돌렸다.
“어머니는 사라진 그 애를 굳이 찾아내겠다는 절 이해하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믿을 수가 없네요. 그 애에 대해선 이래저래 집안에서도 의견 충돌이 있는지라, 제가 저택 안의 인력을 믿고 쓰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크리스티나는 말을 이어갔다.
“저로선 그 애를 해코지했다는 오해를 사고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으니, 최대한 무사히, 빨리 찾아낼 수 있도록 제 편에서 협조해 주실 분이 계시면 좋겠는데요. 이왕 제게 저지르신 무례를 사과할 기회를, 어떻게, 드려볼까요?”
후계자는 맹렬히 고개만 끄덕였다.
크리스티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 자리에 온 본론을 꺼냈다.
“좋아요. 몇 명이나 저희를 위해 동원해 주실 수 있나요?”
루모스 상단의 후계자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는 호위병과 심부름꾼, 하인들의 숫자를 이야기했다.
크리스티나가 장난치냐는 듯이 빤히 쳐다보자, 후계자로서 상단 차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이야기했다.
아서도 후작도 아닌 ‘크리스티나’의 줄을 잡아도 되나 망설여졌지만, 이미 그 누구에게도 줄을 댈 수 없는 상황에서 크리스티나의 말을 거역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급한 대로 쓸만하겠군요.”
그의 말을 모두 들은 크리스티나가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리며 생긋이 웃었다.
“도와주신다면 후하게 사례하겠습니다. 물론 상단 루모스도, 따로 공식적으로 초청할 거예요.”
공식적인 상단 초청이란 이야기에 후계자의 눈이 번뜩였다.
“정말이십니까? 수도로 가시기 전에요?”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 어머님 아버님의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으로 해 드리지요.”
파격 제안에 후계자는 거의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 * *
루모스 상단의 호위병과 심부름꾼들이 영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 * *
“테일러.”
레이나가 이 층 방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
채 정리하지 못했으면서도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대답해 달라고 한 말 아니야. 아직 어려운 거 알아.”
약재를 정돈하던 테일러가 장을 닫으며 말했다.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말한 거야. 좀 더 의지해 줬으면 해서. ……오해하는 거 같길래.”
테일러는 피식 미소 지었다.
“……솔직히 우리 사이가 몇 년인데. 할머니 아프신 줄도 몰랐던 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레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서운하다는 듯이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을 짚은 테일러의 옆모습이,
레이나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살짝 굳은 얼굴이 테일러의 가볍지 않은 진심을 알게 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고민하기 좋지 않은 타이밍인 건 미안해. 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이런 얘기 안 했을 거야. 나도 이런 타이밍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
“말해야겠더라고. ……혼자 동동거리지 말라고.”
“…….”
“네가 도와달라고 말하기만 기다리면서 목 빠지는 사람 여기 있으니까. 알아 달라고.”
“…….”
테일러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레이나를 응시했다.
“나 능력 있어. 돕고 싶은 마음도 있어. 조금만 더 의지해 줘.”
“…….”
“친구로서도 안 되겠으면 의사로서라도.”
테일러의 이야기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배려가 깊어졌다.
레이나의 상황과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된 탓이었다.
레이나는 이마를 짚으며 끝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
그대로 레이나는 손을 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고마워. 할머니…… 부탁할게.”
“그래.”
레이나는 얼굴을 가린 채 다시 한번 말했다.
“……고마워.”
테일러는 대답 대신 웃었다.
테일러는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읽었다.
난 그냥 할머니랑 둘이서만 살고 싶어.
누굴 만나거나 다른 사람을 내 인생에 들일 생각은 없어.
미안해.
하지만 테일러는 레이나의 생각보다 그녀를 잘 알았다.
너는 분명 더 어릴 때.
네가 사랑할 사람과, 키워 낼 아이들에 대한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넌 그냥 바닷가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꿈밖에 말하지 않더라.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테일러는 그녀에게 그 꿈을 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