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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넓혀가는 영역 (91/210)


#91. 넓혀가는 영역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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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닌 거 없어.」

 
의사인 거. 영지가 있는 거. 그리고 널 좋아하는 거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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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닌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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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누구여?”

잠에서 깨어난 할머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다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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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로렌슨입니다. 레이나 친구요. 저 자주 놀러 와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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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팬케이크?”

웃음기가 섞인 다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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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팬케이크요.”

하지만 레이나는 차마 테일러와 할머니가 있는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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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루모스 상단의 후계자는 초조하게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마차 창 너머로 겁에 질려 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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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크리스티나였어. 틀림없이.’

법원 앞 의상실에서 봤던, 아서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레이디.

그는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복면을 쓴 괴한들에게 붙잡힌 채 마차를 타고 가는 걸 봤을 땐 자기 눈을 의심했었다.

이게 뭐야?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괴한들에게 납치?

저 마차,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어?

그럼 저택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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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 저 마차 쫓아!”

당황하고 놀란 마음과 별개로 입은 본능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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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놓치면 안 돼!”

동시에 깨달음이 엄습했다.

이건 기회다!

그들은 어떻게든 ‘줄리어스’와 그럴싸하게 마주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벼르고 있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언젠간 반드시 다시 외출하리라 믿고 있었기에 루모스의 후계자는 그들의 시나리오를 실현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상황은 그들이 짠 시나리오와도 제법 비슷한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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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습격합니까? 복면을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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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쫓아가서 구해!”

그는 상단 소속의 호위병들을 위장해 그녀의 마차를 강도인 척 습격하게 한 뒤, 강도들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 척 나타나 그녀를 구해 주고, 젠틀하게 저택에 데려다주며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상대가 레이디 크리스티나라는 걸 모른 척하고 일단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 된 다음, 그녀를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줄리어스 후작 영애’라는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슬쩍 흘린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는 예리한 안목으로 그녀의 우아함과 귀티를 간파하며 말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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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습격을 당할 만한 레이디. 당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 그리고 당신의 그 눈부신 금발과 숨길 수 없는 미모. 당신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로군요.」

 
그럼 다음은 일사천리.

상단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줄리어스 저택에서 사람을 보내 정중하게 루모스 상단을 불러들이겠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서면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인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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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엔 고마웠습니다. 신세를 졌어요.」

 
하고.

상대가 알아채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부하들이 있었지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고 겁만 주고 달아난다면 호위병들이 꼬리를 밟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레이디라면 마땅히 그런 이야기를 덮고 싶어 할 테니까.

레이디가 강도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추문이 도는 건 치명적인 문제다.

개선장군인 아서 경의 명예에도 크게 해가 되는 일이니.

제법 마음에 드는 구상이었다.

솔직히 위험에 빠진 가련한 미녀를 구해 준다는, 그런 역할 안 해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 상단 루모스를 난관에서 구해낸다는 실익까지 따라온다면 일석이조 아닌가?

심지어 상대는 베일에 싸여 있는 제국 최고의 미인.

그리고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에게 ‘사실 제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티나입니다.’ 하고 정체를 밝히는 순간의 짜릿함을 즐기고 싶지 않을까?

좋은 관계가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습격과 구출만 실감 나게 해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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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진짜 강도를 당하는 중이라고?!’

어떤 놈들이 선수를 쳤나?

계획이 좀 틀어졌다는 걸 느꼈지만 루모스의 후계자는 재빨리 주변에 숨어 있던 호위병들에게 소리쳐 작전 변경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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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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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미친놈들아, 복면 쓰지 말고!

어쨌든 납치를 당할 뻔한 크리스티나를 구해 준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줄리어스 일가에도, 무척이나 애처가라는 아서에게도.

그럼 루모스 상단의 신용이나 계약 한두 개가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오히려 습격에 관해 꼬리 밟힐 염려도 없으니 더 좋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상황에서 그들은 시나리오와 달리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구해낼 능력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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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이거 이러면 곤란한데?’

말을 탄 호위병 놈들이 왠지 모르게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가는 마차와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걸 느끼며,

루모스의 후계자는 계획이 좀 틀어진 게 아니라 아예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그들이 준비한 건 적당히 서로를 겁주어 쫓아내는 그럴싸한 칼싸움이었지 마차 추격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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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마! 달려!”

큰일이다.

이미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위험에 처했으니 그들이 준비한 시나리오를 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지금 구해내지 못한다면 은인이 될 기회는 사라진다!

그래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괴한들의 마차를 쫓았다.

반드시 이번 기회에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구해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지직! 쾅! 드드드드드득!

요란하게 나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마차는 바퀴가 부서지며 바닥에 긴 자국을 남기고 거칠게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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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마차 벽에 얼굴을 처박으며 호되게 넘어진 루모스의 후계자는 끙끙대며 마차에서 기어 나와, 어디선가 날아온 철침이 마차 바퀴에 박히며 마차를 부숴버린 걸 발견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다시 말을 타고 쫓아가 봤지만, 갈림길이 나타나 크리스티나가 탄 마차는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 *

루모스의 후계자는 아쉬운 대로 마차에 박힌 철침을 증거물 삼아 들고 줄리어스의 대저택으로 달려갔다.

다짜고짜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납치된 걸 봤다고 소리치면 의심을 살 수 있겠다 싶어, 이 저택에서 웬 레이디가 마차로 납치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달려왔다는 말로 밑밥을 깔았다.

급한 대로 자신의 상단 호위병들을 수색 보내 두었다,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며 그는 혼신의 연기로 수선을 피웠다.

루모스의 후계자는 일단 저택의 문을 두드릴 정의롭고도 합당한 이유가 생겼음에 만족하며 경비병들을 설득했다.

나는 이 집에서 레이디가 납치되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녀를 위한 병사들까지 보내 두었다.

돕고 싶다!

비록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사건의 목격자로서 도움이 될 만한 진술을 해 주거나 함께 수색에 협조한다는 명목으로 인연을 만들어 볼 수는 있겠지.

당장 후작이나 후작 부인을 만나게 될 거라고, 운이 좋다면 아서를 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이 결과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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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조금 더 다급하고 일사불란하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그는 우왕좌왕하며 눈치를 보는 하녀와 하인들에게 이리저리 떠넘기기를 당하다가 손님용 응접실에 앉혀지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거나, 슬금슬금 피하거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혹시 이 일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아서 경에게 추문이 될까 봐 없는 일인 척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건가?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자신이 생각한 만큼 긴박감이 없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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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째깍. 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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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에는 들어왔는데…….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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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래도 밀접 목격자일 텐데.

무려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납치됐는데…….

이렇게 시간 끌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왜…… 아무도 안 오지……?

* * *

하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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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모스 상단이라면 그쪽 아냐? 전에 후작님이 초대장 보내는 리스트에서 싹 빼 버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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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부실 보급 기사 났을 때 발 빼려다가 후작님 미움 산 곳이잖아.”

하녀들이 혀를 차며 빨랫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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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영 타이밍 잡는 재주는 꽝이다. 하필이면 분위기 엉망일 때 왔네.”

후작님과 마님이 싸우는 소리가 닫힌 문 너머 복도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금 끼어들면 불똥 튈 것 같다는 분위기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타이밍에 굳이 후작 내외를 찾아가 반갑지도 않은 상단의 후계자가 찾아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하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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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납치 사건을 목격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급한 일인 척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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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후작님 만나려고 수작 부리는 거 같은데. 납치된 레이디가 없잖아.”

세 가족이 전부인 단출한 이 집에 레이디라면 마님과 아가씨뿐이다.

마님은 후작님이랑 싸우는 중이시고, 아가씨는 좀 전에 저 계단 위에서 지나가셨는걸?

다들 멀쩡히 계시는데 무슨 레이디가 납치됐다는 거야?

* * *

끼익.

그리고 마침내 루모스의 후계자가 기다리던 응접실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금빛 공작새 같은 화려한 미인이었다.

루모스의 후계자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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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누구지?

대단한 미녀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그렇고 이 저택엔 금발의 미녀가 많네?

하녀들이 공손하게 허리 숙여 그녀에게 인사한 뒤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

미녀는 그런 하녀들이 익숙한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후계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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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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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크리스티나와 혈연이 있는 친척이거나 지위가 높은 책임자인가?’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후계자에게 크리스티나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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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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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상단 루모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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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싱긋 웃었다.

숨이 막히는 미소였다.

루모스의 후계자는 바짝 어깨를 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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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저택에서 ‘레이디’가 납치되는 걸 목격하셨다고요. 오늘 저택에 약간의 소동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만. 어떤 레이디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루모스의 후계자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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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밖에선 혹여 추문이 될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짐작하시다시피…….”

후계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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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납치된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라면 확실하게 알고 있었거든요!”

크리스티나가 녹색 에메랄드 같은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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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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