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두 번째 고백
(90/210)
90. 두 번째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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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두 번째 고백
2022.07.10.
“범인은? 봤다는 사람들한테 증언 받아 봤어?”
“조사중입니다만, 괴한들이 모두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후작 부인이 초조하게 모피를 뜯으며 물었다.
“레이나를 알아봤다는 사람은?”
“수건으로 입을 막힌 채 끌려가는 것만 봤다고들 합니다. 레이나라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는 듯했습니다.”
후작 부인은 그 말을 듣고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후작 부인의 머릿속은 혼란과 조마조마함으로 가득했다.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알아챘다고 하면 문제될 거라고 생각하고 입 다문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
크리스티나가 들어오며 말했다.
“지금 목격자라고 나선 하인들은 눈치 못 챘을 거예요. 모르는 척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봤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테니까.”
“크리스티나!”
후작 부인이 반가워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크리스티나의 말이 옳았다.
크리스티나가 하녀장에게 명령했다.
“같이 있었지만 목격자로 나서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체크해요. 그리고, 어머니.”
“응?”
크리스티나가 냉정하게 어머니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한 일 아니시죠?”
후작 부인은 아서의 기사들에게 당한 수모와 후작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치가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야.”
“아버지도 아니시고요?”
“그래, 아닌 것 같더구나. 내가 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생사람을 잡으며 길길이 뛰는데 아주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다! 네 아비도 아니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네 아비가 아직 그 정도로 맛이 가진 않았더구나.”
아니, 아니지.
내 남편이란 작자는 맛이 갔다!
아서한테 흔쾌히 정부를 들이라 선심을 썼다는 소리가 떠오르며 다시 뒷골이 당겨왔다.
내가 그런 작자와 결혼을 했다니!
후작 부인이 뒷목을 잡으며 으으으 소리를 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상체를 후작 부인 쪽으로 기울인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레이나의 할머니 어떻게 하셨어요? 관리하고 계시죠?”
후작 부인이 눈을 파르르 떨며 손을 저었다.
“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런 일은 전부 엄마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니.”
“할머니를 확인해야겠어요.”
“뭐? 네가 직접? 안 돼!”
“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내어 주세요. 손발이 돼 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소식도 너무 느리고요. 제 사람이 필요해요.”
“…….”
후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딸의 통찰과 냉정을 믿었다.
하지만 마틸다는 딸이 가문을 꾸리기 위해 손을 더럽히길 원치 않았다.
“안 돼.”
“엄마.”
“레이나의 할머니는 확실하게 치료해 주며 관리하고 있어.”
“제가 봐야 해요. 확인할 게 있어요.”
“지금 ‘네가’ 납치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데 납치됐다는 ‘크리스티나’가 사람들을 끌고 수상하게 영지를 휘젓고 다니겠다고? 겨우 그 애 할머니 때문에? 안 돼!”
후작 부인은 딱 잘라 말하고 일어났다.
“방에 가 있어! 넌 아서 경 마음 잡을 생각만 해. 레이나의 할머니는 확실하게 치료해 주며 관리하고 있다만, 네가 원한다면 걔의 할머니가 잘 지내고 있는지는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 * *
오수에 든 할머니는 평온해 보였다.
건강해 보이기도 했다.
가끔 할머니를 보러 집에 돌아왔던 그 어떤 때보다도.
레이나는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
오 년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지.
내가 아무리 할머니를 지키려고 애써도, 후작가에서 베풀어주는 한 번의 후의가 할머니의 삶을 훨씬 더 크게 좌우한다는 걸 느꼈을 때.
마님의 손짓 한 번에 나의 힘으론 구할 수 없었던 할머니가 살아나고, 위독하던 할머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걸 보는 것은 레이나를 행복하게도 만들었고, 무력하게도 만들었다.
“잠드셨어?”
“응.”
방에 들어오던 테일러는 소리를 낮추고 살짝 커튼을 쳐 햇살을 가렸다.
테일러가 익숙하게 낮잠 주무시는 할머니를 챙기는 걸 보고 레이나는 문득 생각이 나 물어보았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여기에는 안 오셔?”
테일러가 답했다.
“응. 여기는 모르셔. 아무래도 후작가에 고용된 분이시니까 바뀐 거처는 말씀드리지 않고 우리만 조용히 옮기기로 했어.”
레이나가 머뭇거렸다.
“……그럼 후작 부인한테 보고되는 거 아니야?”
“글쎄. 언젠간 아시게 되겠지만……. 아직은 모르실걸? 좀 천천히 아시게 되도록 손 써 두긴 했어.”
레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떻게?”
“음…….”
테일러가 머쓱하게 말했다.
“……잘?”
“……?”
테일러가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후작 부인을 속여 넘겨 이중 첩자인 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레이나에게 상세히 하기는 좀 민망했다.
“……천천히 말해 줄게. 일단 후작가에서는 모르시니까 그 걱정은 안 해도 돼. 기사분들도 이쪽이랑 그쪽을 다 지키고 계시니 상황을 파악해 주실 거야. 그보다는 지금 네가 듣는 게 좋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좀 있는데, 잠깐 괜찮아? 지금은 할머니랑 있고 싶으면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고…….”
“아냐. 지금 괜찮아.”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몸에 이불을 덮어 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테일러와 레이나는 할머니가 이야기 소리에 잠을 깨시지 않도록 문을 닫고 나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테일러는 리오넬과 루칸이 마차에서 레이나에게 하려다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레이디가 너무 놀라기도 했고 우리를 경계하셔서 제대로 말씀을 못 드리기도 했으니, 레이디가 신뢰하는 당신이 사정을 대신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
해결사 길드의 의뢰 이야기를 들은 레이나는 영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하는 금발 하녀……? 납치? 해결사에게?’
……내 이야기일까?
조금 전에 납치의 위협을 실제로 느꼈는데도, 왜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
레이나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금발의 하녀들 몇을 떠올려 보았다.
레이나는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테일러. 네 생각은 어때? 그 의뢰에서 노린 게, 나인 것 같아?”
테일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널 불안하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난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져. 기사분들도 그렇다고 판단하신 것 같고. 그래서 널 더 저택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던 테일러가 역으로 물어보았다.
“넌 왜 후작 부인을 의심하지 않는 거야?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 않아?”
“…….”
레이나는 스스로 이마를 짚은 채 말했다.
“……할머니를…….”
“응?”
“할머니를 오 년 동안 보살펴 주셨으니까.”
레이나는 얼굴을 쓸며 손을 내렸다.
레이나는 지친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분들 입장에선……. 나쁜 마음을 먹고 싶었다면 진작 그럴 수 있었잖아. 간병인 임금까지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난 다른 하녀에 비해 두 배 이상 돈이 들어가는 하녀였을 텐데…….”
레이나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오 년 동안 돈을 들여가며 나에게 해 주신 약속을 지키고 할머니를 보살펴 주실 이유가 없었어. 그냥……. 후환 없이 처리할 거라면 진작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는 뜻이야. 그런데 약속을 지켜 주셨잖아.”
“…….”
“그래서 좀…….”
……믿고 있었던 걸까?
레이나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후작 부인을 믿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아서 경의 그늘에 숨기로 했으니 딱히 두터운 믿음을 걸었던 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아서 경 쪽으로 돌아서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까지 긴 망설임의 근원이기는 했던 만큼,
후작 부인이나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했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내가 순진한 건가?
레이나는 아가씨와 후작 부인을 생각하며 잠깐 침묵했다.
순간 눈에 들어온 테일러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
레이나는 내가 좀 바보 같아 보이려나, 머쓱한 기분이 들어 변명했다.
“알아, 나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가 제일 많이 생각했을걸? 약속대로 할머니를 계속 보살펴 주실까……. 나 어느 날 갑자기 제거당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생각했어. 나라고 무섭지 않았을까.”
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근데 내가 살아 있잖아. 할머니도 그렇고.”
“…….”
테일러가 손을 주먹 쥐어 테이블 위에서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
테일러는 레이나를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타는 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한마디도 말을 안 해.”
“…….”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끝이 주먹 쥔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나는 몰랐다는 게.”
“…….”
“네가 그동안 나한테 남 얘기인 척 물어봤던 증상들이 전부 아픈 할머니 이야기였다는 걸 몰랐다는 게.”
테일러가 고개를 들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의지가 안 됐다는 게 화가 나.”
“…….”
레이나가 조용히 테일러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알잖아. 우리가…… 줄리어스의 사용인들이 침묵에 대해 어떤 식으로 교육받는지. 우리가 받는 좋은 대우는 전부 무거운 입 때문이고…….”
테일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으면 내가 너랑 네 가족 정도는 데리고 줄리어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넌 알고 있지 않았어?”
“…….”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레이나는 본인의 숨소리를 의식하며 불편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레이나는 지금 이 긴장감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는 건지, 자의식 과잉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로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테일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의사고, 널 좋아하고, 내가 영지가 딸린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레이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예전의 기억이 훅 떠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나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지, 지금은 아니잖아.”
테일러가 레이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웃었다.
“셋 중에 뭐?”
두, 두 번째 거.
……지금은 아니지 않아?
레이나는 묻지 못했다.
왠지 테일러가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레이나는 그 말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당혹감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으음…….”
방 안에서 기척이 났다.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나신 것 같았다.
“…….”
레이나의 등 뒤로 문 쪽을 본 테일러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아닌 거 없어.”